[국보 탐방] [1]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입력 : 2014.08.06 10:21
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숭례문 (한자 명칭 : 서울 崇禮門)
- 지정일 1962. 12. 20
- 테마 유적건조물,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 시대 조선시대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문화재청 설명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숭례문 전경.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 ▲숭례문 입구. 放火의 교훈으로 울타리와 출입문, 경비원이 배치되었다.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붕괴되었으며, 5년간의 복구공사를 거쳐 2013년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 주관 하에 복구 기념식을 갖고 다시 공개되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후 먼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읍을 방어하기 위하여 서울 주위로 성곽을 쌓도록 하고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사소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큰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으며, 남쪽 문은 한 나라의 도성을 출입하는 상징적인 正門(정문)으로, 남쪽에 있다 하여 속칭 '남대문'이라 불렀다.
- ▲안으로 들어서자 숭례문의 정면 모습.
숭례문은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과 함께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성문 중 하나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숭례문은 크게 石築(석축), 또는 陸築(육축)과 門樓(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석축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두고 남쪽에 면하여 큰 문을 달았다. 문루는 2층으로 된 목조건물로 동서 양쪽으로 작은 문을 두어 문루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2층은 바닥 전체가 마루로 되어있고, 사방에 두터운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달았으며, 문루 2층 중앙 남쪽에는 崇禮門(숭례문) 세 글자를 세로로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숭례문은 도성인 한양의 정문으로서 지니는 일상적인 기능 외에 도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과 연관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기능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숭례문은 鐘樓(종루)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세종 7년 4월 흥천사의 종을 옮겨와 숭례문에 건다는 기록이 있는데 숭례문의 종은 성문의 종과 함께 성문의 개폐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일출 일몰의 시차 관계로 계절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 밤 10시가 되면 28번의 종을 울려 문을 닫고 외부와의 통행을 막는 한편, 성내에서는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새벽 4시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 ▲숭례문 현판 글씨부터 살펴본다. 참 잘 썼다.
또한 숭례문은 풍수 지리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태종 8년 7월 23일에 오랜 비로 인해 한양의 사대문에서 기청제를 지낸 이래 숭례문은 조선 시대 내내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내는 용도로 자주 활용되었다. 이 밖에도 숭례문은 백성에게 국가의 시책을 보여주는 공개적인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임금이 직접 참관하여 반역자를 비롯한 국가적인 중죄인을 재판하고 참수 또는 효시하는 장소로 활용하였으며, 외국으로 가는 사신을 전송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견하는 등 주요한 국가행사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역사 속의 숭례문
- ▲양녕대군 사당 지덕사에 보존중인 숭례문 현판 탁본. 표시된 부분이 숭례문 현판과 일치한다.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좌우 성벽이 헐리기 시작하여 1910년에 주변 석축 등이 완성되었고,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이 성벽 철거는 명목상으로는 교통통행량이 많은 숭례문 주변 도로를 확장 정비하는 것이었으나, 숭례문의 원형이 파괴되는 결정적 사건으로, 이후 주변의 전철과 교통통행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진동에 의해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물산공진회 장소로도 사용되었고, 1930년대 중반부터는 홍예 내부로의 출입마저도 금지되어 숭례문은 주변 도로에 의하여 섬처럼 고립되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숭례문 석축 전면과 문루 등이 피해를 입어 1952년에 긴급 보수가 진행되었고, 1961~1963년에 석축 일부와 문루 전체에 대한 해체 수리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몇 번에 걸친 지붕 기와 교체공사와 단청 공사 등이 진행되었고, 2006년 3월 주변 공원 조성사업 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으나 그로부터 2년 후인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은 방화에 의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月刊 종로문화 62호 인용]
- ▲복구 공사 과정에서 숭례문 좌우측 성벽을 조금씩 연장하여 살려놓았다. 새로 쌓은 돌이 표시가 난다.
세로로 쓰인 숭례문 현판
도성 문의 현판은 모두 가로로 쓰여 있지만, 숭례문만은 세로로 쓰여 있다. 이것은 ‘불의 산’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관악산의 화기가 강해 경복궁에 화재가 나기 쉬운데, 현판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리면 성문 밑을 막고 누르는 셈이 되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누가 썼을까?
조선조 제일의 명필로 일컫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는 늘 과천에서 서울에 올라올 때면 숭례문 현판 앞에 서서 해저무는 줄도 모르고 현판을 올려 보았다고 한다. 그가 천하의 명필이라고 칭송하는 현판의 글씨가 과연 누구의 필적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그 주인공은 태종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기도 했던 양녕대군의 작품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천장에는 앞 쪽(바깥쪽)으로 황룡, 뒤쪽(안쪽)으로 청룡이 그려져 있다.
태종실록에 기록하기를 경복궁 안에 경회루를 새로 꾸미고 현판을 당시의 왕세자인 양녕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지금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의 사당(祠堂)인 지덕사(至德祠)에 그의 유묵인 숭례문 현판 탁본이 보존되어 있어서 양녕대군의 작품으로 증명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도 양녕대군을 지목하고 있다.
- ▲홍예문을 지나 성문을 들어서면 도성을 들어온 셈이다. 뒤돌아본 숭례문 모습.
숭례문 액자는 임진왜란 때 없어져서 조정에서 새로 써서 달았으나 다는 족족 떨어지곤 하였다. 사람들이 이것을 괴상히 여기던 중에 밤이 되면 남대문 밖 청파(靑坡) 배다리 근처 웅덩이 속에서 서광(瑞光)이 남대문 쪽으로 뻗치는 지라 그 웅덩이를 파내어 보니 원래의 현판이 묻혀 있었으므로 남대문에 다시 달아놓게 되었다고 한다.
- ▲안쪽의 숭례문 좌우 石築(석축). 몇몇 돌은 새로 박아 넣은 듯 하다.
숭례문은 무료로 개방되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2층 문루는 토, 일요일에 한하여 정해진 시간에 제한된 인원(신청, 접수순)만 올라가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보 제1호답다.
- ▲반지하로 관리사무실도 지었다.
덧붙이는 글
문화재 명칭을 기술할 때는 지역명+문화재명=서울 숭례문. 이런 방식으로 쓴다. 문화재청에서 그렇게 적기로 하였다. 일부 지역을 명기하기 어려운 문화재는 그냥 명칭만을 쓰지만 해당 지역에 위치하거나 명확하게 지명이 확실한 문화재는 앞머리에 반드시 지역명을 쓴다.
예를 들어 충남 아산에 있는 맹사성의 고택인 '맹씨행단'의 정식명칭은 '아산 맹씨행단'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맹사성의 맹 씨를 아산 맹 씨로 잘못 알게 되는 폐단이 있어서 맹 씨 문중에서는 문화재 이름 쓰는 법이 지역명을 앞에 쓰게 되어 있어 그렇다고 설명하면서 원래는 신창 맹 씨임을 따로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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