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을 27일 동안 혹독하게 고문한 선조는 어떤 왕이었나?
조선왕조의 특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으나, 가장 상식적인 측면에서 언급하자면 아무래도 조선왕조는 500년 내내 당파싸움으로 일관한 나라이고, 백성들의 의식을 지배한 사상은 성리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모든 것을 이런 각도에서 보지 않으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이순신장군과 선조와의 관계도 이런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나라의 근본 중에서도 근본은 왕통의 계승이었다. 거기에서 통치권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조선은 왕권의 계승과정에서의 잡음을 피하기 위해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장자 승계를 법제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선왕의 유지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차자나 삼자 혹은 먼 혈통의 사람이 왕권계승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자승계이든, 집안 내 다른 파의 승계든, 가장 중요한 것은 선대왕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 합법적인 승계의 필수조건이었다. 이런 절차만 있다면 장자가 아니더라도 굳이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조의 경우, 선왕인 명종의 왕권승계의 직접적인 고명이 없었다. 명종은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건강을 회복하곤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끝까지 세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자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장자가 있었고, 세자로 지명된 자가 있었으나 열몇살에 죽어 버렸다. 그후 명종에게는 아들이 생기지 않았다.
명종은 가까운 혈통 중에서 현명하고 학식이 높은 청년 몇 명을 뽑아서 특별 교육을 시켰다 만일의 경우 그들 중 한명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선조는 뽑힌 집안청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학식이 높지도 않았다.
그러나 머리가 명민한 편이어서 명종과 왕후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명종이 시름 시름 앓다가 아무런 유언도 없이 갑자기 붕어하니, 명종왕후와 당시 영의정 이준경이 입을 맞춰 선조를 후계자로 옹립한 것이었다.
명종 붕어시 도승지였던 이양원이 영의정 이준경에게, 삼정승 이외에도 조정의 집행자들인 삼사의 수장들이 명종의 마지막 유언(고명)을 같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영의정 이준경이 하성군(선조)의 옹립을 위해서, 그이 주장을 가혹하게 막아 버렸다. 조정의 최고직인 영의정인 자신이 임종을 하고 고명을 들으면 되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수장들이 임종할 필요는 없다고 정승으로서의 위엄과 명령을 하달하였다.
결과적으로 명종의 하성군 지명의 고명은 없었다. 병상에 있던 명종은 오히려 하성군의 거명에 심한 불쾌감을 표시하였다. 그는 공주와 죽은 세자를 생산한 적이 있었기에 병상에서 일어나 왕자 생신의 강한 의지를 표시하였다.
이것이 선조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즉 선왕의 후계 왕에 대한 직접적인 고명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정통성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신하들은 알고 있었다. 즉 하자 있는 왕이었던 것이다.
선조는 선대선대왕인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 덕흥군 이초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사실 왕통과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1년간 재위하면서 선조는 언제나 자신의 이런 불비한 정통성에 고통을 받았다. 정통성은 왕권확립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1592년(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일년 전(1591)에 당쟁이 발발하여 동인 서인으로 갈라졌다. 선조의 세자책봉문제로 서인(서인 영수는 좌의정 정철)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하였으며, 서인들에 대한 죄의 강약을 다투다가 동인이 분열하여, 남인 북인으로 갈라섰다.
선조 연대에는 유능한 신하들이 많았다. 선조를 왕으로 추대한 이준경을 비롯하여, 이항복, 이덕형, 류성룡,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이산해, 이원익, 정탁, 권율 등이 삼정승을 지내면서 선조를 돕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자신이 가지는 이런 하자 때문에 어느 신하든 굳건히 믿지를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하자로 인한 역신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신하들을 대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선조는 문신으로서는 드물게 탁월한 군사지식과 경륜을 가진 서애 류성룡을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기용하여 전란의 전권을 가지도록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마지막 희망 신립장군이 충주벌 싸움에서 완패하고 난 후 나라의 멸망은 목전에 있었다. 신립과 이일이 도총제로 임명된 것도 류성룡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신립은 도통제로 임명되었으나 수하에 싸워줄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서애가 나서서 군사를 모은 결과 그런대로 8000명의 장사를 모아서 신립휘하로 넘겼다. 신립이 완전히 허무하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벌에서 알군과 기병전을 벌여 16만명 일군을 4 차례나 쳐부셨다. 대단한 전과라고 할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휘하 장병은 1만명을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립의 패전 후 나라가 거의 멸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을 갔고, 한양에 남은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과 장례원을 붙태웠다. 선조가 압록강을 넘지 않은 것은 그가 끝까지 조선국토 안에 있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명이 국경을 넘어오는 선조를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 만주 벌판의 빈 관아건물에 넣겠다는 답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면서 망명정권을 기대했던 선조에게는 퍽 차가운 대우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망명을 포기하였다.
이런 망국의식과 패망의식에 젖어있던 조선백성들에게 감연히 일어나 일본침략병들과
대결하여 이겨보자는 열정이 싹튼 것은, 네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이순신 장군의 바다에서의 승리...곡창 호남지방 온존, 일병 병참선 두절의 효과
2)류성룡의 면천법과 속오군(양반 양민 천민의 합성부대)의 편성
3)의병의 봉기
4)명군의 지원
이것들 중에서 2번과 3번은 결국 같은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양반은 전쟁이 나도 청년들이 전쟁에 나갈 의무가 없었다. 특권만 많았지 의무가없는 것이 조선 양반들이었다. 반대로 의무만 많았지 특권이 없는 것이 조선 양민과 천민들이었다.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은 천민인 사노와 공노도 일병의 수급을 베어오면 숫자에 따라 면천해주고 상당한 벼슬도 준다는 면천법을 시행했던 것이다. 이것이 의병이 일어난 큰 원인의 하나였다. 조선의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서애는 그때까지 조선병이 사용하던 소위말하는 제승방략에 의한 전쟁수행을 폐지하고, 진관체제로 바꾸어 큰 효과를 보았다. 제승방략이란 병은 각 지방의 관아와 수령들이 지휘하고 전쟁에서의 지휘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장군에 의해서 전략을 짜고 전투에 임한다는 전술이다. 그러나 진관체제는 주진, 거진, 진 등 병을 각 진 별로 주둔하게 하고, 각 진들은 주진의 지휘자의 지휘를 받으면서 각개 전투를 벌린다는 전술이다. 일본수군이 조선 남해안을 침범했을 때, 조선수군의 전략이 바로 진관체제였다. 경상도우수영, 좌수영이 패전해도, 전라도 좌수영 우수영이 살아남아서 일군병들과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진관체제의 잇점 탓이었다.
임진왜란과 정류재란(1597)을 통해 일병은 결국 자신해서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다시말해 전쟁에 져서 쫓겨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선조는 남모르는 고통을 받았다. 즉 전쟁이 국왕인 자신의 주도로 전개되지 않았고, 자신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을 갔고, 만주로 망명하고자 명국에 교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이 정통성이 없는 군주라는 사실에 심한 심적인 고통을 느꼈다. 즉 전쟁의 영웅들이 은근히 미운 것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빼앗은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빼앗아간 것이었다.
기막힌 전투력으로 강적 일병의 해군력을 초토화시키는 이순신장군이 반갑기도 했지만 은근히 밉기도 했고, 면천법이나 속오군 편성, 진관체제로 전세를 승리로 이끄는 서애 류성룡이 은근히 미웠다. 그리고 전라도의 탁월한 의병장 김덕령 장군도 미운 털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 모든 전공을 군왕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전법으로 일군을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결과적으로 군왕이 누릴 수 있는 백성들의 하늘같은 칭송을 받고 있는 것이 은근히 싫었던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 뿐만아니라, 육전의 영웅 김덕령을 이몽학의 역모에 엮어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런 전쟁 영웅제거의 심리는 선조의 제왕으로서의 정통성 미비라는 심리와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류성룡과 이순신 등이 속한 남인의 정적인 서인쪽으로 기웃거리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우렸다. 전쟁이 끝날 무렵 서애 류성룡을 격렬하게 탄핵한 남이공 등 서인들의 공격에 귀를 기우리고, 서애를 내쫓았다. 그리고 전후 공신 선발에서 이순신과 류성룡을 2등 공신에 넣었다.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한 도승지 이항복과 명의 군사를 참전케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정근수를 일등공신에 넣었다.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대승하고 수많은 일병들을 바닷 속에 쳐넣었다고 좌의정 이덕형이 보고했을 때 선조의 대답을 싸늘하였다.“너의 장계는 과장이 심하다...”
가 선조의 대답이었다.
이순신의 전사가 보고되었을 때도 선조는 슬퍼하지 않았다. 병은 전장에서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서애 류성룡이 파면되는 날 이순신장군이 전사하는데,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이라는 서책에서, 발악처럼 총을 쏘아대는 일병들의 공격진 앞으로 이순신장군은 이례적으로 북채를 흔들면서 앞으로 나아가서 독전하다가 총알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조정의 가혹한 분위기를 겪은 바 있는 이순신 장군은 서애 없는 조정과 선조의 성격을 알기에 스스로 전사를 자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을 제시했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문초한 위법성은 아래와 같다.
1,무군지죄(왕을 무시한 역적죄)
2,부국지죄(국가반역죄)
3,함인지죄(동료 원균을 모함한 죄)
조선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체질개선을 했던 서애 류성룡은 파면되고 난 후, 그가 입안했던 면천법과 속오군법(조선군은 양반 양인 천인을 섞어서 편성할 수 있다.)은 선조를 조종하던 서인과 북인들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폐기되었다. 선조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 유능한 인재가 집결한 남인을 등용하였으나, 전통적으로 조선 정국을 주도해온 서인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내밀한 끈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는 당쟁을 처음으로 야기한 김효원과 신의겸을 문책한다고 이 두 사람을 귀양을 보냈는데, 김효원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신의겸을 광주 부윤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경흥부사와 광주부윤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자리였다. 신의겸은 좌천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문책이었다. 광주부윤은 지방직이었지만, 한양 벼슬아치가 부임하는 경직이었다.이 사안에서 서인 쪽으로 기우는 선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호문의 선조는 율곡이 살아 있을 때는 서인을, 이황이 살아 있을 때는 남인을 가까이 했다.
조선의 초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남인이 주류를 이루었던 사림파가 태종과 세조의 쿠데타의 주류를 이루었던 공신 중심의 훈구파와의 대결에서 4차례의 사화를 통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을 만나 그들은 집권자인 선조의 후원을 얻어 다소 세력을 회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서인들이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율곡 자신이 사림 출신이면서도 서인으로 돌아섰고, 우암 송시열이라는 거물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인은 조선 정국의 주류로 등장한다. 임금의 사랑을 다투는 원로 훈구파들의 시절이 가자 사림파가 정권을 놓고 서로 싸우는 당쟁이 시작한 것이다. 이 당쟁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조선사의 핵심을 노치게 된다.
조선사에서 가장 뚜렷한 비극인 사도세자의 뒤쥐 속 죽음도, 겉으로는 탕평책을 부르짖으면서 불평부당을 주장하던 영조의 서인으로의 경향 탓이었다. 숙종을 한몸에 받고 있던 장옥정(장희빈)이 정식 왕후에 자리에 오르자, 서인은 숙종의 마음을 서인 쪽으로 돌기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 즉 무수리 최씨를 받친 것이었다. 절색인 최씨에게 빠진 숙종은 최씨와의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이런 영조의 탄생비화는 등극후 그의 진로를 가늠하는 지랫대가 되었다.
당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사도세자가 남인 소론 쪽으로 기우러져 있었기 때문에 노론 측에서 그의 제거를 획책한 것이 결국 뒤지 속 아사였다. 연만한 영조가 붕어할 경우,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이 일망 타진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부인 혜경궁 홍씨까지 남편을 버리고, 노론의 영수 친정아비 홍봉환의 수족이 되어 남편 살해의 주역이 된 것이다. 서인들은 손자 정조를 영조 후계자로 옹립하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혜경궁을 포용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장인 홍봉환과 처삼촌 홍인환(우의정)을 죽여야 하지만, 홍봉환이 자당 혜경궁의 친정아비이기 때문에, 효자였던 그는 외삼촌 홍인환만 사형에 처하고 만다. 아비를 뒤지 속에 가두어 죽인 장인 서인의 영수 홍봉환을 손대려 하자, 홍봉환의 딸 즉 정조 자신의 자당이 단식을 시작한 것이다. 정조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봉환은 참수를 면하고 자연사했다.
조선 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정조의 갑작스런 독살설이 떠도는 것도 일리있는 추측이다.
전후에도 전쟁 중 혁혁한 공을 세운 세자 광해군을 밀쳐두고 인목대비와의 사이에 태어난 갓난 아기 영창대군에 뜻을 두고 아침하례를 하는 광해군에게 하례를 그만둘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하는 서인들의 입김을 의식해서였다. 이것이 결국 서인들에 의한 인종반정으로 이어진다.
어느 왕조국가이든 제왕에게는 제왕으로서의 정통성과 합법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제왕의 통치력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자가 있었던 선조는 그의 호문하고 호학하는 학자풍의 기질에도 불구하고, 세력이 우세한 당파의 눈치를 보고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다시말해 충천하는 서애 류성룡과 이순신의 국민 신망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미비한 정통성을 허물어 버릴 수도 있다는 심적인 콤플렉스를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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