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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조선 성리학의 계보

鶴山 徐 仁 2014. 7. 23. 22:13

유학과 성리학의 혈통

유학과 성리학이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인데, 시기적으로 유학이라함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기원 후 221) 노나라의 공자의 학문을 받드는 것이고, 성리학은 송나라(남송 1127-1279)의 주자(주희)의 학문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주자의 성리학은 공자의 유학에서 출발하였고, 그것을 심화발전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략 계산해서 두 나라 사이에는 근 천년의 차이가 있다.

이 학문의 기본은 존왕사상과 인(仁)으로 사상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이 사상은 종교는 아니고, 정치와 학문을 겸하는 일종의 정치학문사상이다. 학문으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정치사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나 현실성을 띄고 있다. 그러기에 일종의 윤리학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러므로 언제나 일반 백성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나 가톨릭교 마호멭교가 종교사상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정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과는 비교가 된다.

우리 나라에 성리학이 들어온 고려말기를 기준하여, 그전 시대를 유학의 시대라 할 수 있고, 고려말기 이후를 성리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문헌상으로 확실히 나타나는 유교의 한반도 전래는 고구려의 경우, 372년에 태학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는 285년에 왕인박사로 하여금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한발 늦어 신문왕 대인 682년에 국학을 세워 유학의 경전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500년사는 불교숭배의 시대이기 때문에 유학은 성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물이 정비되는 6대 성종 때에는 국자감을 설치하여 유학을 가르쳤으나 시류를 좌우하는 중심학문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1대 문종 때에 최충이 9제를 세워 본격적으로 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크게 성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고려말 충열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에 갔던 안향이 주자전서를 가지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안향의 문하에 우탁, 백이정, 권부 등이 있어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현, 이색, 정몽주, 조준 등 걸출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중 정몽주는 성리학의 이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도학과 경륜에 있어서 특출하여 동방이학의 조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포은 정몽주는 조선개국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태종)에게 격살되었기에 그의 저서들이 거의 불타 없어지고, 203수의 시편들만이 포은문집에 남아 있을 뿐이다.

특기해야할 이 시대 성리학자로는 또 정도전과 조준과 정몽주의 제자 야은 길재가 있다. 정도전은 경세의 견식과 정치수완이 출중하여 한 시대를 휘어잡았으며, 조선 개창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준은 많은 성리학의 저서를 남겨 조선 개국에 주춧돌의 기능을 하였다.

야은 길재는 도은 이숭인과 함께, 정몽주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고려의 신하로서 높은 학문과 절개로서 고려말 성리학의 실천강령을 잘 수행한 학자로 남았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를 고려말의 국운을 붙잡고 변절하지 않은 고려4은으로 유학계에서는 존경하고 있다.

조선으로 넘어와 한 때 잠잠하던 성리학은, 7대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사육신의 존재는 성리학의 존왕정신의 발현으로 이 학문의 존재가치가 입증되었다. 성종 때는 양성지가 포은 정몽주를 문묘(공자묘)에 제향해야한다는 청원을 넣어 성리학의 정신이 불붙기 시작했고, 결국 중종조에 포은 정몽주는 조선개국 후 처음으로 신하로서 문묘에 배향된다.

낙중(洛中, 낙동강중간지역을 지칭, 성주 선산등) 문인의 조종인 야은 길재의 하학들 중에서, 강호 김숙자,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 등이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로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등 쟁쟁한 성리학자들이 나타났다.

김굉필의 제자로는 김안국, 김정국, 이장곤, 조광조 등 발군의 유학자들이 대를 이어갔다.

특히 조광조는 중중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 일약 대사헌에 올라, 왕도정치와 지치주의 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나, 조선 백년사에 존재했던 개국공신세력을 비롯한 세조의 찬탈에 협조한 정난공신 등 훈구파들의 질시에 걸려 중도하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광조의 사림파들은 심정 남곤 등 훈구파들의 술책에 몰려 기묘사화를 맞아 대부분 참형에 처해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일망타진된 신진사류 성리학자들은 중앙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자연히 성리학은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낙향하여 살면서 성리학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있었으니 서경덕과 이언적이었다. 서경덕은 주기(主氣)적인 연구를 하였고, 이언적은 주리(主理)적인 연구를 하여, 각각 서경덕은 율곡 이이의, 이언적은 퇴계 이황의 스승이 되었다.

명종, 선조대에 성리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서경덕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아 율곡 이이는 기호학파를 조성하여 성리학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었고, 이황은 그의 장기인 4단7정론으로 성리학을 심화시켰다. 이황은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기대승과의 8년 동안에 걸친 4단 7정론에 대한 토론으로 그의 학문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후대인으로서 정경세, 이현일, 이상정 등은 퇴계의 먼 제자들이다. 퇴계의 성리학은 성장을 거듭하여 국제적으로도 알려졌고, 일본 주자학자들 사이에서도 깊이 있게 연구되었다.

이에 비해 율곡은 성혼과의 논쟁으로 자신의 학문의 깊이를 증명하였다.

이황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항 조식 김인후같은 대학자들이 있어서 성리학은 그 깊이를 더해갔다.

한편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장현광이나, 율곡의 문인으로 송준길, 김창협등은 양 파의 절충적인 학설의 개발에 힘쓰는 면을 보여주었고, 타파의 학설에도 전폭적으로 가담하는 자세를 보여주기도 해서 조선 성리학 계파의 특이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황의 제자들로는 걸출한 학자들이 속출하였다. 허목, 이덕홍, 정구, 유성룡, 김성일이 배출되었고, 이이의 제자들로는 성혼, 김장생, 정엽, 이귀, 조헌, 황진, 안방준 등이 배출되었다.

이이, 성혼의 교우로서 송익필이 있는데,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은 학문적으로는 이이의 제자이지만, 예학은 송익필의 제자이다. 후대인으로 송시열, 권상하도 율곡의 문인이다.

성리학은 어느틈엔가 예학으로 성격을 바꾸어서 정치에 깊이 간여하였다. 그와 동시에 예학으로 둔갑한 성리학은 정치학으로 변신하여 정쟁에 이용되었고, 그 피해는 막심하였다.

병자호란 때, 청국에의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여 청국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 홍익한 오달제 윤집도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숙종, 경종 연간에는 당쟁이 가장 격심하여 피해를 입는 정치인이 허다하였고, 예론으로 변한 성리학을 멀리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것이 실학의 대두였다. 경국제민과 이용후생의 기치를 내세운 실학은

정파간의 정권싸움을 일삼는 성리학의 난점을 대처하기에 충분한듯했다. 마침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북학론과 고증학의 영향도 있어서 실학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실학은 유형원이 개척하여, 이익, 안정복, 신경준, 정약용,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등의 신진학자들이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런 좋은 경륜과 학자를 가진 실학운동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이유는 이들 실학자들이 어떤 현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재야학자들이라 이들의 주장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학 때문에 힘을 잃었던 성리학자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격증하는 외세동점의 기세를 감지하였으나, 사단칠정론에 여전히 붙잡혀 있어서, 적극적으로 외국문물의 수입에 소극적이었고, 하물며 반대하였다. 그들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서구세력을 잘 수입하여 국세확장의 길로 나가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척사위정의 정신으로 무장하였다.

그러나 일부 성리학자들은 나라의 앞날을 위해 적극적인 문호개방의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송병선, 최익현, 조병세, 민영환, 안중근 등이 그런 분들이다.

일제시 일부유학자들이 성균관을 경학원이라고 개칭하여 성리학 강좌를 열었으나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했고, 해방후 대한유도회에서 다시 이름을 성균관으로 고쳐 한국 성리학 연구 교육기관으로 키우고 있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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