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고서원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은 충신의 표상으로 그리고 만고의 효자로 온국민이 존경하는 포은 정몽주를 제향하는 서원이다.
최근 KBS에서 정도전이라는 역사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사실 주인공은 정도전이지만 사극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정몽주를 통해 발현되었다. 이 사극의 주제가 바로 “충”이기 때문이다.
포은 정몽주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은 비단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만이 아니다. 조선 500년 사에서 포은 정몽주처럼 온 백성의 끊임없는 존경을 받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가 그가 그야말로 사직에 대한 충성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포은을 존경한 대표적이 조선시대 사람들로는 우선 태종을 들 수 있고, 정암 조광조, 그리고 우암 송시열, 그리고 퇴계 이황 등이다.
태종은 아비 이성계가 세우려는 새 나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측면에서 포은을 척살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는 내심으로는 고려사직에 바치는 포은의 충성심을 존경하였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포은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여가를 바쳐 그의 변심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은의 대답은 백 번 죽어도 사직을 버릴 수 없다는 백사가로 대답하였다. 그는 새 왕조를 세우면 제일 먼저 포은을 영의정으로 모시고 그의 경륜을 정치에 펼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포은의 마음은 추호도 변하지 않았다.
조광조는 중종의 마음을 움직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가 이끄는 사림파는 사실 별 힘이 없었다. 건국 초기부터 나라를 휘어잡아온 개국공신을 위주로 하는 훈구파들을 이길 힘도, 명분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진사류가 주장하는 개혁의 밑바탕으로서, 송나라의 주자학 즉 성리학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그것은 원래가 그들의 주전공이었다. 그러자니 자연히 동방이학 지조인 포은을 역사에서 끌어내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포은의 충을 새로운 정치학이론으로 들고 나왔고, 그를 그들의 전면에 내세웠다.
포은이 후세인들에게 사표가 되는 것은 비단 그의 “충”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효” 역시 대단하여 남들의 사표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즉 그는 지독한 효자였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졸하였을 때, 그는 각 각 두 부모닙에게 3년씩 여묘살이를 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짚으로 움막을 짓고 부모님의 묘 옆에서 각각 3년 도합 6년을 보낸 것이다.
당시 원나라에 나라가 지배되는 시절이라, 원의 풍습대로 부모 상사 시 묘자리에서의 여묘살이는 1년으로도 충분하였다. 그는 실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효를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포은을 중종조에 문묘(공자 사당)에 배향한다.
조선 정치의 근본은 제사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계파가 누구를 제사지내느냐는 그 정파의 색깔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척도가 되었다. 하물며 자손이 선조를 제사지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되었다.
서인계 기호학파의 영수 우암 송시열 역시 의리와 명분론을 받드는 자파의 명분상 포은을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다. 송시열은 자신과 자파가 정권을 쥐고 있지 못할 때에도 포은가의 정부 차원에서의 보호를 강력 주장하였다.
그는 포은가의 영고성쇄는 한 가문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문제라며, 포은가의 영락을 절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포은 가의 11손과 14손 사이에서 장남들의 한결같은 단명으로 절손의 위급한 처지에 빠졌다. 그러니 가세가 자연히 위축되어 끼니가 어렵게 되었다. 계속해서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갔지만, 가세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송시열은 어전에 나가, “우리 나라는 기자로부터 지금까지 유학을 널리 보급하여왔고, 그 분야에서 포은 정몽주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포은은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일깨워주었고, 중국과 오랑캐의 차이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 집 가문이 쇄락하여 절사(제사를 못지냄)의 위기에 처해 있으니, 별료를 내리시어 포은 사당에 제사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옵소서”하고 중중에게 간청하였다.
포은 가문의 가사 혹은 종사가 일 개인의 것이 아니라, 조정의 논의의 대상이 됨을 일깨워준 사람이 우암 송시열이었다. 대현 종사의 멸절은 가장 위급한 국난에 속한다는 사실을 송시열은 주장하고 있다. 입양에 입양을 거듭하다 보니 출중한 인물이 대를 이을 수는 없었고, 언제나 가세가 쪼들리는 입장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라에서는 나라의 녹봉으로 포은가를 보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포은의 후손들이 선조 포은을 제향하기 위해 서원이나 제사를 지으면, 자연스레 그 지방에 살고 있는 타성 유학자들이 몰려와서 그 지방 유생들의 집합처가 되었다. 이런 사례는 전국적으로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들 유학자들의 머리 속에는 만고의 충신으로서의 포은의 영상이 너무나 확고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릉지방에 있는 충정사와 전충사는 이 지역에 입향한 15대 손 정도와 조종 포은을 제향하기 위한 제사지만, 어느 틈엔가 강릉을 비롯한 영동 유자들의 집단적인 제향처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영남 유학의 흔들림없는 유학자는 물론 퇴계 이황이다.
이황의 유학은 당시 서인들의 기호학파를 압도하였고, 그들의 학문은 곧 나라의 공론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런 퇴계가 가장 선두에 서서 포은 정몽주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포은이 1300년대 사람이니 한 700여년 전의 인물이라면, 퇴계는 1500년대 사람이니 두 사람 사이에는 대략 200 여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적극적으로 포은을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모시고 지지의사를 펼쳤다.
그 구체적인 예가 바로 영천 임고서원의 창립이다. 포은을 향사하기 위한 서원이지만, 이 임고서원의 설립은 퇴계의 기획과 추진력이 작용한 그야말로 퇴계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된다. 그것은 퇴계가 포은을 뼈속 깊이 존경하였다는 표시이다. 퇴계 이황은 “서원은 주자학이 조선에 주입되고 유통되는 혈관과도 같다” 고 말한 적이 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설로 설립되기 때문에 나라의 경제력에 오로지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측면이 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나라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정도 공인을 받을 수 있는 공적인 측면도 있다고 하였다.
수많은 영남 유생들이 하늘처럼 받드는 이황은 바다처럼 넓은 학덕과 심성의 소유자지만, 만사에 주도 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스서원)에 임금의 사액을 받게 함으로써 사적인 조직인 서원에 국가의 행정력의 원조가 가능하게 하는 길을 튼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문하에 드나드는 제자들로 하여금 영천에 임고서원을 짓게 함과 동시에, 조선에서 임고서원을 두 번째로 임금의 사액을 득하게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결국은 성사하게 된다.
오늘날 임고서원의 위상은 포은을 제향하는 4대 서원 즉 묘역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모현 면에 있는 충열서원, 포은의 출생지인 경주에 있는 오천서원, 포은이 졸한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 그리고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이다. 이중 임고서원이 주제향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고서원의 창설 후 영천 유생들이 급격히 불어나, 여헌 장현광같은 당대 불세출의 대유학자를 배출하였다. 그래서 임고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포은학파는 안동의 퇴계학파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이룩하게 된다.
문헌상으로 영천 임고서원을 창설한 영천문인들로는 김응생, 정윤량, 노수가 있는데, 이들 한결같이 퇴계문인들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영남에 퍼져 있던 퇴계문이니 대략 100 여명 되었는데, 영천의 퇴계문인은 5명 정도였다. 이들은 스승인 퇴계의 강력한 조언으로 임고서원의 창설에 나선 것이다.
1553년에 창설된 임고서원은 창설과 동시에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기 위한 운동에 나섰다. 퇴계의 강력한 후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마침 경상도 감사가 정언각으로 포은의 후손이었다. 정언각은 오히려 자신이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임고서원에 사액을 내려주고, 노비와 전답을 내려주기를 간청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포은 정몽주라는 압도적인 백성의 지지를 받는 만고의 충신 포은의 위상을 등에 업고 있음은 사실이다. 포은을 받들면 자신도 충신이 되는 것같은 느낌을 당시 유생들은 한결같이 가슴에 품고 있었다고 한다.
퇴계의 용의주도한 기획으로 임고서원은 창립과 동시에 사액되는 신기한 기록을 세웠다.
1553년에 창설된 임고서원은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을 피할 수 없었다. 일군들의 침략로 상에 위치하고 있던 영천의 위치 탓으로 임고서원은 전소되었다.
그나만 다행으로 영정이 영천유생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소실을 면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영천 유생들이 손에서 손으로 영정은 건네지면서 일군들의 눈길을 피했다고 한다. 어느 임금의 영정 못지않게 그들은 충절의 표상인 대현의 영정이 불에 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1602년부터 임고서원의 재건작업이 시작되었다.
재건작업에 참여한 유생들로는 한강 정구문인과, 여헌 장현광 문인, 그리고 지산 조호익 문인 등 세파로 갈라져 있었다. 한강과 지산은 여헌에 못지않는 제자들을 거느린 조선 당시 유학계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여헌의 제자들이 주도권을 잡았는데, 당시 영천 유생들이 영남 유학을 장악할 정도로 그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여헌이 행차하면 따르는 영남문인들이 대략 50명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여헌 장현광은 과거를 보지 않고 재가수학했지만 그 실력과 인품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보은현감을 잠시 지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후, 광해군 때 군수, 사헌, 지평을 모두를 거절했으며, 인조 때 지평, 장령, 집의, 공조참의, 이조참판, 대사헌을 모두 거절했고, 인조 후반기 의정부우참찬, 공조판서, 지중추부사 등 모두 사퇴했다.1637년 나라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가 있다가 죽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마도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마저도 거부했을 것이다.시호가 내렸는데 여헌(旅軒)이다.
한강(寒岡) 정구는 선조, 광해군 때의 대학자였고, 7,8세에 논어와 대학에 통달했다는 천재였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퇴계와 남명에게 배웠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강릉부사, 강릉감사, 성천부사, 충주목사, 안동부사를 거쳤다. 따르는 영남유생들이 많아서 그의 거처에는 언제나 젊은 유생들로 득시글거렸다고 한다. 대사헌 재직시 소를 올려 임해군의 생명을 구해 칭찬을 받았으며, 고향인 성주 사람들의 적극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사후에 성주 천곡서원과 동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목이다.
지산(之山) 조호익은 퇴계문인으로 학문을 닦아 문명을 날렸으며, 경상감영 도사에게 항변한 죄로 귀양을 가서 산속에서 칩거하며 명상의 삶을 살았다. 임진왜란시 좌시할 수 없어서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왜군을 무찔렀다. 안주부사 성천목사를 거쳤으며, 대읍인 선산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영천 유생들은 지산 조호익을 존경하여 그의 거처 유지를 후배제자들의 독서당으로 만들어 그를 추모하였다. 지산 조호익은 당시 송에서 수입된 성리학 서적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조선의 학자는 정몽주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지산을 따르는 당시 젊은 유학자들이 많아서 그의 고향인 창녕에는 유생들이 흘러넘쳤다고 한다.
한강과 지산 그리고 여헌은 성리학의 트라이앵글로 영남 유생들을 삼분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학문상의 주인은 물론 퇴계 이황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통인 이황을 넘어서, 전조의 인물인 포은 정몽주를 자신들의 학문의 조종으로 인정하고 받들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임고서원의 재건립은 1613년에 끝이 났는데, 원래 것보다 사우들이 많이 불어난 탓이었다.
유생들의 거점공간인 동서재가 설립된 해는 1605년이고,본당인 흥문당은 1611년에 완건되었다.
소수서원에 이어 1554년에 조선에서 두 번째로 사액된 임고서원은 조선 서원문화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존현과 명교육기관으로서 여헌과 한강 지산의 명성까지 덧붙여져 유학의 종사 포은 정몽주의 주향처라는 위상을 한껏 차지할 수 있었다. 묘우인 문충사(문충은 포은의 시호)에 퇴계 이황의 친필 편액이 걸려 또하나의 볼거리가 되어 임고서원을 찾는 유생들의 발걸음이 끊일 날이 없었다.
임고서원 중건에 앞장선 유생들은 주로 여헌의 문인들로서 정사물, 김각, 장학 등이었다.
임고서원은 영남유생 혹은 퇴계문인들만 찾는 것이 아니었다. 포은은 어느 특정 계파 문인의 영역을 벗어나는 대유였고, 온 백성을 감복시키는 충절의 신하였다. 남명학파(조식)와 기호학파등 대척적인 위치에 있던 학파의 유생들도, 주저함이 없이 임고서원을 찾았다. 그것은 포은의 충절이 학파와 당파를 초월하여 전국 사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도학상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명학파의 경우, 남명의 고제 노진이 친히 임고서원을 찾아 스승의 포은 존경의 뜻을 전하고 치제했다. 기호학파의 경우 대표적인 인사인 중봉 조헌이 일부러 멀고 먼 영천 임고서원을 찾아와 백이 숙제에 비견되는 포은의 충절을 기렸다.
임고서원은 이런 유학자들만의 방문처가 아니었다. 임금의 사액 사원인 탓도 있었겠지만, 포은에 대한 존경의 염으로 찾아오는 벼슬아치들의 숫자가 유생들의 그것을 능가하였다. 전란 중에는 도체찰사 이원익이 일부러 임고서원을 찾아와 그 보존상태를 살피고 돌아갔다. 영남감사 부사 군수들은 부임과 동시에 제일먼저 임고서원을 찾아왔다. 영남감사 이시발은 제일먼저 위치를 옮겨 중건된 서원에 임금의 재사액이 내리도록 장계를 올린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여헌 장현광이 죽어 그의 제향처를 정할 때, 임고서원으로 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를 포은과 병향으로 하느냐 배향으로 하느냐 논쟁이 붙은 것이었다.
임고서원은 당연히 포은의 주향처이지만, 당시 영천 유생 나아가 선산을 비롯한 영남유생들의 강력한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던 여헌을 포은과 병행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였다. 그래서 병행으로 하자고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다가 포은의 8세손 정준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문제를 바로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어느 가문의 제향처의 순서와 위치문제가 아니었다. 임금이 나서야할만큼 막중한 위상을 지닌 포은 정몽주의 주향처를 후대의 명현과 병행으로 해서 양보할 수 없다는 후손들의 주장이었다. 인조의 답신은 아래와 같다.
“서원향례의 위치는 조정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림의 공론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임고서원에 장현광을 정몽주와 병행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배향으로 바로 잡도록 하라.”
영천 시와 경상북도는 최근 임고서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성역화 하였다.
필자는 성역화되기 전에 두 차례나 영천으로 조종을 찾아 뵙고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승용차를 사용하지 않는 필자는 서울에서 경상도 영천까지 가는 일이 보통이 아니라, 성역화된 후로는 가보지 못하고 있다.
최근 경상도 양산에서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친회가 있었다. 만사를 제치고 이 모임에 참석한 필자는 다시한번 포은 선조의 숭고한 나라정신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조선민족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정권과 문물이 바뀌어도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대의에 살고 죽는 민족인 것같다. 몇해 전 연달은 실수와 적나나하게 노출된 미비점으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을 받은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보내는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은 참으로 뜻밖이었으며 그 정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국민들의 심성 속에는 그를 옛 왕조의 나랏님으로 보는 무의식이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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