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총리에 오른 율리야 티모셴코는 2009년 러시아에 맞섰다. 우크라이나 땅에 놓인 러시아 가스관이 볼모였다. 유럽으로 수출되는 러시아 천연가스 66%는 우크라이나를 거쳐간다. 그러자 러시아는 2009년 1월 1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끊어버렸다. 이어 7일엔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마저 잠갔다. 가스 소비량의 68%를 러시아에 의존한 우크라이나는 물론 헝가리·불가리아·그리스와 독일·이탈리아·프랑스가 때마침 닥친 강추위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결국 13일 만에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백기를 들었다. 당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굴복해 가스값을 대폭 올려준 티모셴코 총리는 나중에 직권 남용 혐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이후 유럽은 에너지 공급선을 다변화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여전히 천연가스 소비량의 3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가 미국·EU와 군사적 충돌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데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2004년 러시아의 앞마당인 발트해 3개국(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이 나란히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자 푸틴은 경악했다. 러시아는 2010년 서둘러 벨라루스·카자흐스탄과 관세동맹을 맺었다. 이를 발판으로 소련에 속했던 국가들과 2015년까지 유라시아연합(Eurasian Union)을 구축하려는 게 푸틴의 구상이다. 이미 아르메니아·키르기스탄·타지키스탄이 가입 의향을 밝혔고 아제르바이잔·몰도바·조지아·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베트남 등과도 협상 중이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5월 러시아가 이끄는 관세동맹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를 EU에 내주면 푸틴의 유라시아연합 구상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친서방 바람이 불고 있는 몰도바나 조지아 등 이웃 국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당근과 채찍 삼아 우크라이나를 압박해 왔다. 2010년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간발의 차이로 티모셴코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자 푸틴은 지난해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야누코비치에게 선물꾸러미를 안겼다. 천연가스 가격을 30% 깎아주기로 한 것이다. 여기다 150억 달러 차관까지 덤으로 얹어줬다. 야누코비치가 EU와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중단한 데 대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친서방 임시정부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장악하자 러시아는 차관 지원을 끊고 가스가격 할인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국가부도 위기에 빠지자 EU와 미국이 우크라이나 구하기에 나섰다.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 차관을 지원했던 국제통화기금(IMF)은 7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금융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미국과 EU는 우크라이나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전에 디폴트(국가부도) 사태를 맞지 않도록 긴급 자금지원도 약속했다. 군사적 대치 못지않게 경제적 대립에서도 양측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선 형국이다.
당장은 천연가스란 무기를 쥔 러시아가 느긋한 모양새다. 그러나 길게 보면 푸틴의 도박은 제 발등을 찍는 악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의 분석이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세계 1위 산유국에 올라선 미국이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수출을 검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동안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천연가스 수출을 금지해왔다. 그러다 거듭된 러시아의 횡포에 미국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천연가스 수출 제한을 풀라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자구책을 모색 중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의 셰일가스 매장국이다. 지금까진 자본·기술이 없어 개발을 못했지만 미국과 EU가 손길을 뻗치면 달라진다.
유럽이 러시아 천연가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러시아는 고립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러시아는 수출의 50%를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유럽으로의 천연가스 수출길이 막히거나 줄면 러시아 경제는 치명타를 입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푸틴일 수 있다는 얘기다. 애초 크림 반도 병합에 관심이 없다고 연막을 쳤던 푸틴이 전광석화처럼 군사력을 동원해 크림 반도를 장악한 것도 러시아 지배를 기정사실화해 사태를 조기에 종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가 푸틴의 계산대로 풀릴지는 미지수다.
EU의 품에 안기느냐, 러시아의 그늘에 안주하느냐. 선택은 오는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크라이나 국민의 몫이다. 그러나 서방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워낙 팽팽하게 맞서 앞날을 점치긴 어렵다.
더욱이 러시아군이 실질적으로 장악한 크림 반도 자치공화국이 오는 16일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해 러시아와 병합하자는 안을 주민투표에 부치겠다고 하면서 상황은 더 꼬였다. 러시아계가 다수인 크림 반도에선 이 주민투표가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칫 우크라이나 내전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2008년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러시아는 조지아(당시 그루지야)를 침공해 남오세티야·압하지야를 분리시켰다. 우크라이나로선 악몽의 데자뷰다.
정경민 기자 jkm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