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숲으로 갈 때이다.2013-7-2 |
동두천 숲 속으로 들어온 지 2년 남짓 되었다. 그간에 가장 좋았던 것이 세 가지이다. 첫째는 날마다 숲길을 한 바퀴씩 돌며 몸이 건강하여진 점이다. 둘째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 점이다. 셋째는 말 많은 속세를 벗어나 하늘에 더 가까워진 점이다. 숲에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안하여진다. 숲 가꾸기를 하며 땀을 흘리노라면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내 72년 평생에 동두천 숲으로 들어와 살게 된 요즘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하다. ‘숲 속에 들어오면 이렇게 편안하고 여유가 생겨지는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본다. ‘아마 숲이 인류의 고향이어서가 아닐까?’하고도 생각해 본다. 인류는 긴긴 세월 동안 숲 속에서 살아왔다. 숲에서 걷고 뛰며 갖가지 열매를 따 먹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인류의 DNA속에 숲 속 생활이 편안하고 인간다움을 누릴 수 있도록 입력되어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동두천두레마을에는 인터넷에 중독된 젊은이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인터넷 중독으로 인하여 가정에서도, 교실에서도, 병원에서도 어떻게 손 써 볼 방법이 없어 마지막 수단으로 두레마을로 온 것인데, 신기하게도 두레마을에 오면 회복이 된다. 숲이 가지는 치유능력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새소리,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걷고 숲 가꾸기로 땀을 흘리며, 숲 속을 뒤지며 약초 나물을 캐어다 먹을거리를 삼으며 살아가는 나날이 인터넷으로 망가진 마음과 몸을 낫게 하여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숲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두레마을에서는 숲속창의력학교를 세우고 지치고 병든 청소년들을 치유, 회복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을 E.P.C 프로그램이라 이름 지었다. E는 숲 속에서의 온갖 체험활동을 뜻하는 Experience이다. P는 숲 속에 닦아놓은 운동장에서 열리는 각종 체육활동을 뜻하는 Physical Education이다. C는 청소년들의 혼속에 깃들어 잠자고 있는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일깨워 주는 창의활동, Creative Activity이다. 두레마을에 들어올 때는 시험공부에 지치고 학원 다니기에 지쳐 축 늘어진 어깨로 들어오던 아이들이 두레마을에서 며칠 동안 E.P.C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나면, 마치 비 개인 뒤의 숲처럼 싱싱하여지고 활력이 넘쳐나게 바뀐다. 올 여름 방학에도 두레마을은 청소년들을 위한 풍성한 숲속 창의력 캠프를 마련하여 놓고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다. *두레마을 여름 숲속창의력 캠프 참가 문의와 신청 : 010~8812~6404(김애민 부장), 070~8845~4280(두레마을 사무실) |
침묵의 힘2013-7-3 |
지난 주 토요일에 두레수도원에서는 10일금식수련모임을 마쳤다. 8회째로 열린 이번 모임에는 34명이 참여하여 10일간 금식수련을 은혜 중에 마쳤다. 마칠 즈음에는 모두들 행복한 마음이었다. 10일간의 금식수련기간 중에는 3일에 걸쳐 침묵의 날이 있다. 하나님과 더 깊은 만남을 위하여 침묵으로 보내는 시간이다. 동서고금을 걸쳐 영성수련을 위하여 자신을 던졌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침묵하며 홀로 지내는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AD 430년경 사막에서 수행에 전심을 기울였던 인물로 아바 아르세니우스(Abba Arsenius)가 있다. 그는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궁궐에서 살았던 귀족 출신이었다. 그가 궁궐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물었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렀다. 하늘로부터 듣는 음성을 영음(靈音)이라 한다.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을 떠나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에 그는 사막 깊숙한 곳을 찾아들어 다시 같은 기도를 드렸다. 이번에는 다음의 음성이 들렸다. "아르세니우스, 벗어나고, 침묵하고, 기도하라. 이것이 죄를 없애는 길이다". 우리들 크리스천들이 수시로 홀로 있으며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함이다. 우리는 침묵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간다. 마음을 비우고 침묵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열왕기상 19장 12절에서 엘리야 선지가 호렙산 굴에서 금식하며 깊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선 "완전한 침묵"속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홀로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에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실 것이다. 침묵의 힘은 경험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축복의 세계이다. |
파스칼이 만난 하나님2013-7-4 |
17세기 유럽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황폐하기가 극에 달하였던 시대였다. 케토릭과 개신교간의 30년에 걸친 종교전쟁 이후 민심은 피폐하여지고 회의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한 천재가 등장하였다. 팡세의 저자 파스칼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요 철학자였다. 그리고 영의 사람이었다. 젊은 날에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과학과 철학의 세계를 넘어선 초월의 세계, 영의 세계를 탐구하였다. 그런 탐구의 끝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다. 1654년 11월 23일 저녁 10시 30분에서 12시 30분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였다. 이 날의 체험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가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리스도의 불꽃같은 임재가 방을 가득히 채웠다. 그는 그때의 감격을 양피지에 간결하게 기록하고는 맨 위에 빛으로 둘러싸인 십자가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는 그 양피지를 코트 안쪽에 꿰매 놓았다. 그가 죽은 후에 그 양피지가 발견되었다. 불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하나님 외에 세상과 다른 모든 것의 망각.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분을 떠나고, 그분에게서 도망하고, 그분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제는 절대로 그분을 떠나지 않으리라.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만 우리는 그분을 붙든다. 전적인 포기이지만, 달콤한 포기. 예수 그리스도 나의 인도자에 대한 전적인 순종 지상에서 하루를 정진하는 동안 누리는 영원한 기쁨 아멘. |
호주 멜보른(Australia Melbourne)2013-7-5 |
2일 화요일에 인천공항을 떠나 이곳 호주 멜보른으로 왔다. 멜보른 한인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다. 멜보른 한인교회는 40년 전 호주에서 한인교회로는 처음 세워진 교회이다. 그러니 이번 집회는 40주년 기념집회이다. 이 교회는 연세대학, 장로회신학교를 거쳐 보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고동원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이다. 고동원 박사는 두레장학생 2기 출신으로 정직하고, 실력 있고, 올바른 영성을 추구하는 엘리트 목사이다. 이런 후배들을 대하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호주를 좋아한다. 그럴 일이 없지만 내가 외국으로 나가 살라 하면 호주를 선택할 것이다. 넓은 땅에 자원이 넉넉하고 상식이 통하는 나라여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제대로 사람대접하는 나라가 호주이다. 호주의 땅 넓이는 한반도 전체의 77배에 이르는 넓은 땅이다. 그렇게 넓은 땅에 인구가 고작 2,100만이다. 호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15만 정도이다. 시드니에 10만 여명이 살고 있고 이곳 멜보른에 2만이 산다. 나머지는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번 호주 방문은 2주간에 걸쳐 멜보른, 퍼스, 시드니를 거치며 집회를 인도하고 17일에 귀국한다. 호주 국민의 96%가 영국계 백인이다. 기독교가 세속화 되어 호주교회가 많이 약화되고 있지만 오늘 오후에 방문한 수도원(Tarrawarra Abbey)을 돌아보며 수도사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는 아직 영성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멜보른은 한국에 많은 선교사들을 보낸 도시로 유명하다. 지난 130년간에 호주인으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섬긴 선교사들이 무려 136명이나 된다. 그들 중 거의가 이곳 멜보른 출신이다. 호주는 많은 선교사들을 한국에 보내어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거기에다 6·25전쟁 때는 참전하여 큰 희생을 치르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도 이들에게 무언가 갚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좁은 한국 땅에서 아웅다웅 다투며 살지만 말고, 좋은 일꾼들이 이 넓은 나라로 많이 와서 이 나라가 더 좋은 나라가 되게 하는 일에 보탬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
Creative Therapy, 창조적인 치유2013-7-10 |
지금 호주를 여행 중이다. 오늘 멜본(Melbourne)을 떠나 퍼스(Perth)로 왔다. 멜본을 떠나던 새벽에는 고동원 목사가 공항까지 와서 챙겨 주었고, 퍼스에 도착하여서는 박재범 목사 부부가 마중을 나와 숙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박재범 목사는 구리두레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지난 해 이곳 퍼스로 옮겨온 일꾼이다. 한국교회가 이러니저러니 하여도 희망이 있는 것은 멜본의 고동원 목사나 퍼스의 박재범 목사 같은 목사다운 목사들이 건재하기에 희망이 있다. 이들은 해외로 나와 목회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도 각 지역에 순수하고 정직하고 실력 있고 헌신적인 젊은 목사들이 줄줄이 있기에 나는 한국교회의 미래에 낙관적인 기대를 걸고 있다. 여행 중에 읽고 있는 책 중에 <크리에이티브 테라피>란 책이 있다. 영화계와 광고계에서 성공적인 카피라이터로 활약하고 있는 윤수정이 저자인 책이다. 오늘 멜본에서 퍼스로 오는 중 비행기에서 읽은 한 부분을 소개하고 싶다. 저자 윤수정은 모든 광고와 모든 크리에이티브의 핵심에 들어가야 하는 콘셉트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어떻게 하면 최고의 콘셉트를 만들 수 있을까?를 언급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망해야 한다. 좋은 콘셉트를 얻으려면 먼저 망해야 한다. 실패하여야 하고 가진 것이 없어야 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공은 실패라는 옷을 거꾸로 입을 때 이루어진다."는 말은 창의력을 다룬 책의 한 구절이다. 둘째 쉬어야 산다. 두 번째 비법은 휴식이다. "쉬어라"의 놀라운 효력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바이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때가 아니다. 흑사병이 유행하여 대학이 휴교하자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을 때인 1665년이었다. 캠브리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더라면 그런 발견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쉬어야 보인다. 셋째 놀아야 산다. 날마다 꾸준히 놀아야 한다. 놀 줄을 모르고 일만 하는 사람들에게서 창조적인 업적을 기대할 수 없다. 잘 노는 사람이 창의력 있는 업적을 이룬다. 시피노자의 말에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놀이"는 크리에이티브의 보고인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열쇠이다. 언젠가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넓게 넓게 놀아야 한다. |
창의력과 상상력의 시대2013-7-11 |
19세기는 농경사회였고 20세기는 산업사회였다. 그리고 지식정보화사회가 뒤를 이었다. 농경사회는 힘이 센 사람이 인정받던 시대였고, 산업사회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 으뜸이었다. 그러나 지식정보화사회는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최고의 인재로 인정받는 시대이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정보사회에서 한걸음 더 나가고 있다.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 상상력을 바탕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사람이 가장 쓸모 있는 시대가 되고 있다. 이른바 창조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창조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는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창조적인 사고를 하고 상상력이 넘치는 두뇌를 지닌 사람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그런 사람이 길러지려면 지금의 교육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지금의 가정, 지금의 교실, 지금의 교회에서는 그런 인재들이 배출되어지기가 불가능하다. 지금은 모범생들 즉 범생들을 길러내는 것을 인재육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창조성이 넘치고 상상력이 솟아나는 인재들은 모범생 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반항적이고, 어딘가 규범을 벗어나고, 빈둥빈둥 놀기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자기 내면에 남다른 콘텐츠를 갖춘 인재들이어야 한다. 최근 들어 교회에서 탁월한 인재들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일정한 규범에 묶여 사는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하지 말라" 일색으로 가르친다. 그런 풍토에서는 영감과 상상력, 창의력과 도전정신이 넘치는 젊은이들을 길러내기 어렵다. 교회 분위기부터 바꾸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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