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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리더는
숙달된 사냥꾼들은 발자국을 보고, 실로 많은 것을 알아낸다고 한다. 발자국을 보고 그것을 남긴 사람이나, 동물의 특성을 금방 안다고 한다. 사람인 경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를 아는 것은 기본이고, 이 사람이 얼마나 단련된 사람인지 아닌지,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몸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언제 그 자리를 지나갔는지 까지도 안다고 하며 능력있는 리더는 대원들의 작은 표정에서도 그들의 마음상태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사랑과 관심으로 그들을 다스린다면. -한홍 목사의 ‘그만 좀 세상에 밟아대고, 쪼까 멈춰보지 친구?’에서-
우리는 역사의 수많은 인물들과 단체들, 교회들, 국가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남기고 간 발자국들을 통해, 누에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듯이 리더십의 귀중한 원리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리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십니까? 사람들의 삶의 역사는 참으로 귀중한 교과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가 막힌 메시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게 또 열린 마음을 가지고 들여다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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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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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성 - 이사야 22장 5~11절 |
5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6 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7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8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9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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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다윗 성>입니다. BC 1003년 다윗이 여부스 족속에게 빼앗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다윗 성이라 명명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 성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으며 70세에 죽어 다윗 성에 장사되었습니다(왕상 2:10-11).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다윗 왕의 묘가 AD 70년까지는 존재했으나 유대인 제2차 대반란 때인 AD 135년 경 파괴되었다고 전합니다.
아름다운 골짜기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7절). 그런데 그 다윗 성 주변 아름다운 골짜기로 엘람 사람들, 즉 바사 사람들이 화살 가득한 화살통을 메고 마병들과 함께 올 것이라고 합니다. 기르 사람들, 즉 메대 사람들은 칼을 빼들고 방패를 앞세우고 전투를 위한 모든 채비, 다윗 성을 에워쌀 모든 준비를 다 마쳤음을 과시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이런 곤경 속에 몰아넣으신 이유는 8절 말씀처럼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덮였던 것>이란 위선을 말하고 외식을 가리킵니다.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이란 그동안 유다의 치부를 가려준 일종의 엄호물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허물이 다 드러나고 가차 없이 폭로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무엇이든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그게 비록 <다윗 성>이고 <아름다운 골짜기>일지라도 덮였던 것은 반드시 벗겨질 날이 온다는 엄중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성벽 사이의 저수지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11절). 다윗 성 예루살렘에는 물이 몹시 귀했습니다. 시온 산 꼭대기에 건설한 도성이어서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의 유일한 샘은 <기혼>이었습니다. 그나마 기혼 샘이 있었기에 고대로부터 예루살렘이 성읍으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기혼은 <솟구쳐 나오다>는 뜻이며 성 밖에 위치했고 물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성 밖에 위치한 그 기혼 샘물을 터널을 통해 성 안쪽으로 끌어들여 외성과 내성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고 물을 비축해 한결 편리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두른 산들(시 125:2)과 아름다운 골짜기와 샘 같은 천혜의 자연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앙망하지 못하고 그 모든 조건들과 환경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 성과 그 아름다운 골짜기에 재난을 내려 그들을 낮추시고 회개케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덮고 감추는 위선에도 빠져서는 안 되지만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은혜만 누리고 배은망덕 하는 행위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결국 그점에서 실패하여 적들에게 무참하게 당하며 처절한 고난을 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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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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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아침을 준비하시는
인생이 비록 어둠에 빠졌다 해도 부활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부활 생명이 넘치는 영원한 아침의 인생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힘들어하고 아파하며 좌절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침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 어두움 속의 인생들에게 밝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동희 목사의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하라’에서-
삶의 어두움을 벗어버리고 밝고 영원한 아침을 맞이하는 인생이 되고자 하면 반드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어두움과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그 분을 믿음으로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부활, 생명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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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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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가 되었던 교회 |
저기 멀리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서 누구를 위한 방어였는가, 저 자리에 무기를 들고 서있었을 누군가를 생각해 봅니다.
거룩한 예배의 자리, 그러나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그 자리마저 온전하지 못했나 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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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 이사야 22장 12~18절 |
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16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 17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18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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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을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13절). 전형적인 쾌락주의고 허무주의입니다.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바울도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내일이면 죽으리라 오늘 먹고 마시리라>는 향락주의, 허무주의로 귀결된다며 나날이 팽배해 가는 현대 쾌락주의 앞에서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하리라>(32절).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절).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재난을 경고하시며 선지자를 통해 환난을 예언하신 의도는 당연히 그들이 애통해하며 머리를 뜯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는 것이었는데 유다는 엉뚱하게도 하나님의 그런 뜻을 거스리며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잔치를 베풀고 온갖 환락과 쾌락을 다 즐기며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진탕 먹고 마시자고 남까지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변방에 적국이 없거나 곧 그들의 성읍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이 없기라도 하다는 듯 어느 때보다 더 안일하게 흥청망청 했다는 것입니다. 애곡해야 마땅하고 옳은 자들이 술을 즐기고 고기를 탐했다는 것입니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비웃고 선지자를 조롱하는 처사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는 게 가장 실리적인 인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우리를 심판하신다>(전 11:9)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보다 경건하게 책임적으로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너를 공 같이 던질 것이라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18절). <셉나>(15절)는 히스기야 왕의 서기관이며 궁을 관리하던 고위 관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향해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던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자야 말로 <내일이면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는 쾌락주의, 향락주의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공처럼 멀리 차시면 그 인생은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네가 그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객사할 것이라는 예언이고 그가 타고 다니던 영광의 수레도 그 주인의 운명처럼 그렇게 광야에 널부러질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응징은 언제나 이토록 무섭고 가차가 없으십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왕이든 관료든 하나님이 그를 모질게 차버리시면 마치 축구 선수가 프리킥을 차듯 그렇게 아주 먼 광야까지 날아가 패망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누리던 영광도 버려진 수레처럼 다 끝장나고 맙니다. 따라서 누구든 절대 하나님의 발길에 차이지 않아야 합니다. 공처럼 모질 게 던져지지 않아야 합니다. 부디 당신의 운명이 셉나처럼 던져진 공이 아니라 주님께 든든히 붙잡힌 복된 인생이 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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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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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착각하는 자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만든 자신만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본다. 아프리카에 갔다가, 인도에 갔다가 충격을 받고, 또는 자기가 옳게 보이는 것에 대해 성경의 하나님이 반대하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없다, 혹은 이런 하나님이면 나는 더 이상 믿지 않겠다"라는 식의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며 벼락 맞을 소리들을 하기도 한다. 실로 심각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박성업 선교사의 ‘이미 시작된 전 세계적인 배도!’에서-
믿는 자 중에 하나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자비롭고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고 더 사랑 많고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착각하면서 진리를 점점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여기게 만들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혐오의 대상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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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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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앞에서 |
선교사의 무덤 앞에 서서... 그들은 진정, 자신들이 기념되길 소원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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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집의 열쇠 -이사야 22장 19~25절 |
19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 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24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25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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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22절). 주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중보자로서의 자신의 권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여기서 열쇠란 곧 왕의 통치와 권세를 상징합니다. 다윗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다윗 집의 열쇠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을 가리킵니다.
내 종 엘리아김 <그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20절). <엘리아김>은 <하나님이 세우시리라>는 뜻의 이름이며 그의 아버지 힐기야는 히스기야 왕의 궁내 대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아김에 대해 <내 종>이라고 하십니다. 국고와 왕궁을 맡아 관리하던 셉나를 내치시고 그 자리에 당신의 종 <엘리아김>을 두사 유다 집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셉나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애굽을 의지하게 한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백성들의 신앙이나 삶보다는 자신의 이름과 지위와 업적만을 과시하고 남용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엘리아김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이 친히 그의 충성됨과 신실함을 입증하셨기에 <한 번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의 열쇠를 그에게 맡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도 당신의 교회에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마 16:19)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당신도 엘리아김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셔서 주님이 맡기시는 다윗 집의 열쇠로 놀라운 영적 권세를 바르게 행사하며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집의 영광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23절). 하나님이 당신의 종 엘리아김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므로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마치 못을 단단히 박음같이 견고하게 하사 아버지 집의 영광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실제 하나님은 그를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셨을 뿐 아니라 최고의 지혜와 미덕으로 그의 가문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가문은 이전에도 귀했지만 엘리아김 이후에는 더욱 빛났습니다. 믿는 자들은 누구나 부모 친척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문의 이름과 명성으로 덕을 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재능과 경건이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해야 합니다. 엘리아김이 고위직에 오르자 그의 아비집의 모든 영광이 그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한 종들을 축복하사 그의 집안과 가문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부디 당신의 가정, 당신의 가문에서 엘리아김 같은 복된 하나님의 종이 되십시오. 그래서 모든 일가친척들의 기쁨과 영광이 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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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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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말로 드리는 기도
우리는 "주님, 제가 기도를 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마귀에게 패배한 것 같습니다"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문제를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한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믿음의 말로 기도해야 한다. 믿음 없는 말로 하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기도가 없이도 역사할 수 있다. 기도는 믿음을 나타내는 수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찰스 캡스의 ‘혀의 창조적 능력을 사용하라’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을 표현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다스려야 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 즉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영적인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십니까? 믿음 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말로 드리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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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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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하늘 |
중앙아시아. 그 곳에도 하늘은 있고, 복음은 홀씨 되어 바람타고 전해지는 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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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진가미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졸업 현, 중국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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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한 도전 - 창세기 12장 1~4절 |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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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라고 했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그 사이에 C(choice)가 있다는 것입니다. B로 시작해서 D로 끝나고 만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며 어떤 경우는 선택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통하여 나를 살펴보십시다. 아브람은“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설정된 상황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가족과 친척들과의 인간관계를 뒤로하고 75세에 소명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무리였을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이 말은 선택하고 결단하여 행동화하기까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확실하다면 순종하기 쉬운데,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낫선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것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누구와의 만남도 불확실하다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을 향한 소명 앞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4).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인격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나침반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항해하는 선박이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파도를 무시하고 나아가면 등대가 보이고 소원의 항구로 나아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때론 이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말씀하신 그분을 믿고 순종할 때에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귀한 믿음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입니다. 물론 이 믿음조차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물입니다(엡2:8-9).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2-3). 이 약속의 축복은 부르심앞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결단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여 그와 그 가정을 통하여 거룩한 민족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믿음은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형이나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 기회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명 앞에서 바른 결단과 선택을 통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결국 그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향하는 인생을 믿음으로 바르게 선택함으로 이를 통해 복된 삶의 향하여 도전함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습니다.
[적용] -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부르심(달란트와 은사)을 받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그 소명 앞에 바르게 선택함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응하셨는지 지금의 나를 돌아보십시다. -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서 나의 약점은 무엇인지 관찰해 보고, 바른 믿음에 서도록 기도하십시다.
[기도] 나를 부르신 하나님, 불신과 탐욕으로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가는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말씀앞에 다시 서서 희생하고 순종함으로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향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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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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