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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여시동의 차이나 인사이드 아웃] '죽일지언정 귀국은 안된다'는 美 반대 무릅쓰고 人材 모셔간 중국… 달려온 인재를 내친 한국/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3. 3. 17. 10:05

[Why] [여시동의 차이나 인사이드 아웃] '죽일지언정 귀국은 안된다'는 美 반대 무릅쓰고 人材 모셔간 중국… 달려온 인재를 내친 한국

입력 : 2013.03.16 03:01 | 수정 : 2013.03.17 02:15

이달 초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의 사퇴를 보면서 중국의 '싼첸(三錢)'을 떠올렸다. 싼첸은 중국의 인공위성과 미사일, 원자탄 등 이른바 '양탄일성(兩彈一星)'을 개발한 3명의 첸씨를 가리킨다. 첸쉐썬(錢學森), 첸웨이창(錢偉長), 첸싼창(錢三强)이 그들이다. 중국 역학과 응용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첸웨이창은 저명한 역사학자 첸무(錢穆)의 조카이며, 중국 원자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첸싼창은 근대 신문화운동의 대표 학자 첸셴퉁(錢玄同)의 아들이다. 이들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귀국해 조국의 항공우주과학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최고의 인물은 역시 첸쉐썬이다. 상하이(上海) 자오퉁(交通)대학에 가면 그를 기리는 도서관이 있다. 여기엔 전장 21m의개량형 중단거리 미사일이 건물 중앙을 관통해 위로 치솟아 있다. 이 미사일은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 첸쉐썬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지난 2011년 12월 11일 첸쉐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이 도서관에 갔을 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50여m나 됐다.

첸쉐썬의 귀국 스토리는 극적이다. 첸은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비상해 세 살 때 이미 당시(唐詩)와 송사(宋詞)를 암송하고 곱셈 나눗셈까지 해 신동으로 불렸다. 1931년 자오퉁대학에 입학했다가 1934년 미국 유학을 떠난 뒤 매사추세츠공대 항공과, 항공이론학과, 항공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탁월한 연구 성과로 주목받았다.

그가 국제적 인물로 부상한 것은 미국의 반공 매카시 선풍 속에서 공산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긴 싸움을 시작하면서부터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그는 "학문으로 조국에 봉사하겠다"며 이듬해 800㎏에 달하는 서적과 노트를 갖고 중국 귀환을 시도했으나 미 연방수사국에 의해감금됐다. 당시 미 해군참모차장은 "그는5개 사단의 위력과 맞먹는다. 총살할지언정 귀국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5년 동안 구금과 감시 속에 놓여있던 첸은 1955년 담뱃갑 종이에 글을 써 스위스의 친척에게 보냈다. 귀국을 도와달라고 조국에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전달됐고, 중국 정부는 즉시 미국과 협상을 벌여 6·25 전쟁 당시 생포한 미 조종사 11명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첸의 귀국길을 열었다.

1956년 마오쩌둥(毛澤東)은 귀국한 첸쉐썬에게 "미국인들은 당신을 5개 사단 병력과 맞먹는다고 했지만 내 보기엔 그 이상이다"라며 환대했다. 첸이 이후 중국 미사일 개발에 획기적인 공을 세우고 중국 항공우주과학 발전의 기틀을 놓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鄧小平) 등 역대 중국 최고 지도자들은 그를 끔찍이 예우했다.

미국에 있던 김종훈씨는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건너와 장관 내정자가 됐다가 좌절감만 안고 돌아갔다. 그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싼 여러 혼란상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던 저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며 통한했다. 첸쉐썬이 스스로 귀국을 원했고, 중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 예일대 교수 에이미 추아는 저서 '제국의 미래'에서 "외부인과 외부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과 포용력이야말로 진정한 제국의 요체"라고 했다. 개혁개방은 중국과 북한만의 화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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