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20년간 전교조 손안에서 놀아난 교육/ 최성재

鶴山 徐 仁 2012. 2. 24. 21:56

20년간 전교조 손안에서 놀아난 교육
지난 20년간 교육정책이 어지럽게 변했지만, 결국 전교조의 이념에 갇혀 허우적거렸다.
최성재   
 
  과거의 교육이 외부로부터 오염되고 침해된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이 같은 오염으로부터 교육의 본질을 수호하고 정치적 오염이 있으면 과감히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겠다. (정원식, 1988/12)
 
  교육이 정치와 경제에서 벗어나 독야청청할 수는 없다. 교육도 어디까지나 한 사회, 한 국가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전문성이라는 배타적 울타리 안에서 전문가의 독점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이 정치나 경제에 함몰되어 버리면, 본말이 전도되어 교육이 표류하게 된다. 정치가 윤리에 종속되고 경제가 이념에 예속되면, 현실과 유리되어 정치가 사람들을 옥죄고 경제가 사람들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육에선 교육 논리가 주가 되고 정치와 경제 논리는 보조적이어야 한다.
 
  교육이 정치의 시녀가 되어,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교육의 씨가 10년간 거의 말라 버린 나라가 있었다. 1966년에서 1976년까지 문화혁명이란 권력투쟁에 휘말린 중국이 바로 그 나라다. 지식보다 인간이 우선해야 된다는 그럴 듯한 정치 논리에 의해, 학업 적령기의 모든 학생들이 홍위병(紅衛兵)이 되어 삶의 목적인 이념(공산주의 이념 紅)을 한갓 수단에 지나지 않는 전문지식(專)에 우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걸고, 교사와 교수의 목과 어깨에 자본가와 지주의 주구(走狗)라는 죄목을 줄줄이 걸고 두르고 그들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수천 년 동안 부모와 동격이었던 스승은 폭도로 변한 제자들로부터 온갖 상스런 욕을 듣고 미친 개인 양 두들겨 맞았다. 때로는 맞아 죽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질질 끌려 다니다가 신성한 육체노동으로 봉건주의 또는 자본주의에 오염된 정신을 개조시켜야 한다는 정해진 결론에 따라, 농촌으로 끌려가[下放]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했다. 홍위병은 스스로 저승사자가 되어 어제의 스승만이 아니라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모든 기성세대를 심판했다. 인민 재판했다. 즉결 처분했다. 일단 걸려들었다 하면 누구도 그들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배겨날 수가 없었다. 홍위병 뒤에는 동방홍(東方紅)이,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모택동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8년 중국에서 대학입시가 부활되었다. 교육이 정치의 악어 이빨에서 벗어난 것이다. 중국이 서양에 뒤지고 일본에 뒤져 100년간 세계제일주의, 중화주의가 지나가는 개도 코웃음 칠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은 10억이 하나되는 협동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과학기술이 뒤져서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국가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약 1억 명의 희생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과학과 기술, 과학의 기초인 수학은 모든 과목 중에서 가장 중시되었다. 학교에서 이들 과목을 10년, 20년 배우지 않고서는 절대 선진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중국의 국가 지도자는 대부분 이공계 전공자이고, 일선 학교와 대학에서는 수학과 과학과 공학을 최우선으로 가르친다. 30년도 안 되어 중국의 중고등학교는 학력에서 단연 세계 1등이다. 특히 수학과 과학은 발군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대학은 아직 전반적으로 국제경쟁력이 떨어지지만, 청화대와 북경대는 이미 어떤 국가의 대학에도 뒤지지 않는다.
 
  한국의 교육은 1980년과 1994년에 큰 분수령을 맞는다. 1980년 전두환 정부의 이규호 교육장관은 사교육비를 줄인다는 경제논리에 따라, 사교육을 금지하고 대학의 학생 선발권을 박탈했다. 재학생은 어떠한 형태의 사교육도 금지되었고, 대학은 본고사가 금지되었다. 1994년 김영삼 정부의 김숙희 교육장관은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정치논리에 따라, 대학설립준칙주의를 만들어 말뚝 박고 울타리만 치면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98학년도부터 대도시의 고입연합고사 폐지한다는 정책도 이때 결정되었다. 이것도 정치논리였다. 학력(學力)에 관계없이 출석일수만 채우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고, 등록금만 내면 대학 졸업장을 주는 정치논리였다. 원하면 아무리 학력이 미달이어도 중졸자는 100% 고등학교에 갈 수 있고, 고졸자도 원하면 아무리 학력이 미달이어도 등록금만 마련할 수만 있으면 사실상 거의 100%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이때 마련되었다. 대학진학률 세계 1, 2위를 다투게 된 계기가 이때 마련되었다.
 
  그 사이에 외롭게 돈키호테처럼 정치논리와 경제논리를 거부하고 교육논리를 내세운 장관이 있었다. 1991년 총리로 임명된 후 마지막 강의에서 계란세례를 맞은 정원식,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1988년 12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교육장관으로 재임했다. 정원식은 교육논리의 핵심을 국제경쟁력 있는 인재양성으로 보았다. 평준화 정책을 보완하기 위해(폐지는 아니었고) 과학고와 외고를 설립하거나 내실화했다. 그 다음에는 명문 인문고를 몇 개 설립하는 것이었다. 선발시험은 당연히 보는 것이었다. 1994년부터 대학에 선발권을 되돌려 주기로 했다. 원하는 대학은 본고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헌법이 보장한 학문의 자율성과 전문성(헌법 제31조 4항)을 보장한 것이다. 암기와 이해 중심의 학력고사를 이해와 응용 중심의 수학능력고사로 바꿨다. 단, 이것은 한 단계 높은 지식을 요하는 본고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원식은 전교조의 사회주의적 정치논리를 단연코 거부했다. 정치 중립의 원칙에 따라 전교조 교사의 대량 해직을 서슴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는 전교조 합법화는 반대했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바는 하나하나 다 들어 주었다. 전교조의 이념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은 악이고, 협동은 선이다.(=학생은 경쟁하지 말고 협동해야 한다. 경쟁은 전교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독점하겠다. 인간을 서열화하는 시험은 안 볼수록 좋다.)
 자유는 악의 뿌리이고 평등은 선의 뿌리이다.(=전국의 모든 학교를 평준화해야 한다. 대학도 프랑스와 독일처럼 평준화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다. (=북한은 정통성이 있지 않을까.)
 친일파와 군사독재를 위해 개와 말처럼 충성한 구세대 교육자는 입을 다물라.(=정년 단축하여 전교조 이념에 동조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고용 기회를 대폭 열어 주어야 한다.)
 잘못한 학생도 무조건 용서하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모든 악은 잘못된 사회구조 탓이다.)
 
  한국은 전 세계 개도국의 희망이다. 역할 모델이다.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보다 못 살던 나라가 미국과 중국과 캐나다를 합한 땅보다 큰 아프리카 전체의 GDP에 어금버금하는 부를 생산한다. 구매력 기준으로 하면, 이제 일인당 국민소득(구매력지수 PPP)이 3만 달러를 넘겨, 일본이나 서구와 비슷해졌다. 정치인이 3류 수준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도 두 세대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전 세계 개도국들이(몇 년 전까지의 중국도 포함해서) 한강의 기적에 가장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새마을운동, 다른 하나는 교육이다. 예전에는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으나 요즘은 한국의 교육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새마을운동과 한국의 교육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온정주의적 일회성 원조나 사회구조의 인위적 변화가 아니라 장기적 안목의 인재 양성이었다. 자립하고 자조(自助)하고 협동할 수 있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었다. 오늘보다 내일을 낫게 만들겠다는 각오와 희망이 가득 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 주라.”
 
  한국은 교육도 새마을운동도 거창한 것부터 시작한 게 아니다. 서양을 맹종하지도 않았다. 대약진하려고 무섭게 덤빈 게 아니라 우리 수준과 환경과 능력에 맞게 굼벵이처럼 꿈틀꿈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초등학생처럼 차근차근,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현재보다 항상 미래를 먼저 생각했다. 아무리 못 살아도 나라도 개인도 교육을 최우선했다. 학교 다닐 형편이 못되면 일찍 사회로 나가서 무엇이든 배웠다. 상술이든 기술이든, 공중도덕이든 준법정신이든, 아첨이든 눈치든, 가리지 않고 배웠다. 수학과 과학과 기술을 중시했다. 해방 직후 전문대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1만 명도 안 되었지만, 끼니를 굶어가면서 누구나 배우려고 애썼다. 교육에 관한 한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 선생님들은 한 명의 학생도 낙오시키지 않으려고 방과 후에 무료로 한글을 못 깨우친 아이들을 따로 가르쳤다. 구구단은 100% 외우게 만들었다. 돈은 있으나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재수하고 삼수해서 학력을 쌓아서 진학하는 제도를 고수했다. 돈으로 대학 졸업장을 사는 사람이 많아지자, 박정희는 예비고사 제도를 도입했다. 예비고사 합격생 명단은 문교부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강의실을 들락거리다가 졸업장을 사 가는 청강생이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전 세계 후진국 중에서 외국의 원조를 받아 과학기술연구소를 세워 기술 자립을 이룩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육이다. 학교, 연구소, 산업현장이 유기적으로 맞물리게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공은 교육의 성공이다.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도 학교에서 가르쳤다. 학생 시위가 유난히 많았던 것도 교육 덕분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높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알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공은 교육의 성공이다! 이걸 1990년대부터 아예 부정하면서 교육이 점점 후퇴하게 되었다. 누가 한국 교육의 세계적 성공을 부정하는가? 전교조다. 친북좌파다. 김영삼 정부 이래의 모든 정부이다.
 
  교육장관 중 국무총리로 발탁된 사람은 정원식과 이해찬 두 사람이다. 이들은 소신이 뚜렷하지만, 정반대되는 견해를 가졌다. 정원식은 전교조의 원수이고 이해찬은 전교조의 대부이다. 정원식은 교육전문가이고, 이해찬은 정치시위 전문가다. 정원식의 서울대 제자들이 80년대에 주사파의 영향을 받아 정원식에 반기를 들었다. 이해찬은 80년대 운동권의 머리요 이빨이다. 현실은 이해찬 승리, 정원식 패배다. 그리고 또 다른 현실은 좌우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인정하듯이 교육 실패다.
  (2012.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