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1년11월05일 QT - 만남의 통로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1. 11. 10. 11:06



만남의 통로


우리가 하나님께 분명한 것을 구하고
그분이 그것을 주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그분은 바로 거기에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막연한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적인 분으로 모시고 있는 것은 복된 일이다.
치유의 기쁨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더 크다.


-R. A. 토레이의 ‘이렇게 기도하자’ 중에서-



흔히 기도는 ‘축복의 통로’ 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도를 통해 삶의 축복이 전달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축복이 전달되는 통로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의 장소가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 어떠한 마음으로 그 분 앞에 나와 왔든지
자신도 알지 못했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손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문제라도 좋습니다.
지금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
그 기쁨이 오늘 당신의 삶을 풍성케 할 것입니다.




역설의 진리- 전 7:1~4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신구약 성경에는 무수한 역설이 나옵니다. 그래서 흔히 성경 말씀을 <역설의 진리>라고 합니다. <역설>이란 언뜻 보기에는 앞뒤가 안맞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어떤 논리보다 탁월한 호소력이 담긴 말을 뜻하는데 <파라독스>라고 하는 이 어법을 가장 탁월하게 구사하신 분은 역시 주님이십니다. <죽어야 산다. 낮아져야 높아진다. 썩어야 열매를 맺는다. 원수를 사랑하라.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라!> 이 모두가 세상적인 상식과는 배치되고, 일반적인 관념에는 다 모순되는 현란한 역설들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가운데는 특히 이 전도서 7장이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1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름>보다도 <기름>을 택합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존재>를 뜻한다면 기름은 그 사람의 <부>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중동의 산유국들을 보십시오. 기름이 그들의 막강한 힘이며 오일 달러의 위력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할 만큼 절대적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 보배로운 기름이나 권세 당당한 부보다도 아름다운 이름이 더 낫다고 합니다. 에리히 프롬이 쓴 <소유냐 삶이냐>도 소유형의 인간이 아니라 존재형의 인간이 진정한 <실존>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는 옥합을 깨뜨려 값진 기름을 주님께 다 부었던 마리아가 단연 돋보입니다. 제자들은 값 비싼 <기름>을 허비했다며 호되게 책망했지만, 주님은 세상 그 어디에서나 이 여자의 <이름>이 기억될 것이라며 치하하셨습니다. 기름이 아니라 이름입니다. 소유형이 아니라 존재형입니다. 그런 역설적인 존재가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실존입니다.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2절).
일반적인 상식이나 통념으로는 우울한 초상집보다 당연히 즐거운 잔칫집이 더 낫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라고 합니다. 역설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잔칫집은 들뜨게 하고 흥분하게 하고 환상에 젖게 하고 착각에 빠지게 하지만 초상집은 진지하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삶과 죽음을 사색하게 하고 허무가 어떤 것이고 슬픔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며 겸허하게 합니다. 그 점에서 초상집이야말로 가장 엄숙한 인생교실입니다. 잔칫집에 가면 한바탕 웃고 떠들고 배불리 먹고 오는 것 밖에는 더 없지만 초상집에 가면 인생의 원초적인 배움을 얻고 옵니다. 더구나 우리는 내세와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잔칫집에서 내세 혹은 부활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거기는 다만 즐겁고 행복한 현세 뿐입니다.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을 가십시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절).
왜 그럴까요? 슬픔은 슬픔이기에 다들 슬픔을 곧 불행으로 간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웃음보다도 오히려 슬픔을 통해, 눈물을 통해 더 소중한 것들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우리의 정서나 인격이나 영혼은 웃음보다 오히려 눈물을 통해 더 맑게 정화되는 것을 봅니다. 죄를 범했을 때도 애통해 하는 기도로써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마 5:4)고 하신 주님도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곳은 있으며 성경은 예레미야나 다윗,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들도 다 눈물의 사람들이었다고 전합니다. 웃음은 자칫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슬픔은 겸허하게 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부디 이런 역설이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현실의 허구들을 밝히 보게 하고 많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 참된 진리가 되길 진심으로 빕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