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기도 씨앗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양이 다 찼다고 판단하실 때까지 ‘쌓아야’ 하는 때가 많다. 그러고 나면 응답이 온다.
마지막 추수를 위해서는 수만 개의 씨앗을 뿌려야 하듯이, 바라는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반복적으로 끈기 있게 드려야 한다.
진정한 믿음은 결코 좌절할 수 없다.
-체리 풀러의 ‘기도 입히는 엄마’ 중에서-
씨앗을 뿌린 농부 중에 추수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봄에 씨를 뿌린 농부는 가을이 되기까지 수고하며 땀을 흘립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 역시 첫 씨앗을 뿌린 후 응답의 열매를 거두기까지 많은 눈물과 쉼 없는 간구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씨앗을 뿌린 후 우리는 얼마만큼 수고하며 풍성한 응답의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수확을 하기까지 쉬지 않는 농부처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 |
|
| |
|
|
|
사람의 수고 - 전 6:7~12 |
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9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10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
|
사람은 누구나 늘 수고하며 삽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근로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다>(시 127:2)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편은 직장에서, 아내는 집에서 하는 그 모든 수고와 노동이 왜 신성하지 않고 오히려 허무할까요? 인간의 노동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뜻입니까?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그러나 현자는 노동의 기원이나 본질보다 노동의 목적에서 그 이유를 확인합니다.
입을 위함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7절). 너무나 원색적이긴 해도 엄연한 사실 아닙니까?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잠 16:26). 이는 인간 노동의 목적이 식욕충족에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음식이란 원래 배를 위해 있고, 또 배는 음식을 위해 있습니다. 머리와 가슴을 위한 음식은 없고, 더구나 영혼을 위하고 마음을 풍성하게 해 줄 음식은 없다는 데 노동과 근로가 가져다 주는 근본적인 허무가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영혼의 허기를 면케해 줄 음식은 없습니다. 인간은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도 같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19절). 영혼은 결코 많이 쌓아 둔 물건으로 즐거워 할 수 없습니다.
눈을 위함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9절). 사람들은 갈수록 <눈으로 보는 것>의 즐거움을 위해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현대문화는 점점 보는 즐거움에 더 많은 비용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TV, 영화, 각종 문화예술, 패션, 디자인, 오락, 성형 등 거의 모든 문화 콘텐츠와 관심 트랜드가 오직 시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하와의 타락도 <보는 것>의 유혹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자가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이렇듯 인간이 밤낮없이 뛰는 노동이 결국은 보는 것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고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우리를 허무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함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10절). 이것은 인간의 노동과 수고가 입을 위하고, 눈을 위하기보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뜻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복무하는 것일 때만 허무를 이기고 의미와 보람을 누리는 값진 수고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현자는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11절)고 합니다.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이 사람에게 무슨 낙이냐>(12절)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고 주님의 사역에 헌신하는 일만큼은 복되고 아름다운 근로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
|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