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넷향기] 박상희 소장과 최호준 총장의 넷향기 동영상

鶴山 徐 仁 2011. 1. 28. 15:15

부모의 제재는 자기제어의 기초
박상희

안녕하세요 샤론정신건강연구소의 박상희입니다.
많은 어머님들이 아이를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키우려면 칭찬을 해야 하는건 알겠는데 그럼 혼내면 안되는 거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저도 여덞살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그말에 의도나 고민을 이해하고 저도 여전히 알아가고 고민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정확한것은 아이들을 모질고 잔인하게 대하면 절대 안되고 그렇지만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즉각즉각 자기의 만족만을 위해서 떼를 쓸 때에도 사실은 아이들도 자기를 제재해줄 어떤 권위를 바라고 찾는 다는 겁니다. 아이들도 자신들의 세찬 감정을 힘들어 한다는 것이죠.
안정감을 위해서는 내가 어디까지 허용되는 범위인가를 알게 에 대한 범위를 설정해주는 것도 원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하나 둘 이다보니 오냐오냐 yes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내가 원하는걸 모두 다 만족하면서 컸을경우 사람들을 좋아하는 아이로 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충동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때문에 어려운것들을 이뤄나가는 기쁨과 성취를 잘 못한다는 겁니다.
어렸을때는 잘했는데 커가면서 끈기도 없고 자기의 힘도 없고 어려워요 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이에게 제재를 가하는것과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데 아이에게 제제를 가하는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서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커서도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른인데 어린이처럼 살게된다는 고백들이 많이 나오는것을 보면 어른이되서도 충돌을 조절못한다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힘든일인가를 느끼게 되는데요. 끈기있게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어른으로서 세운 목표를 향하여 더디게 어렵사게 나가는 가운데 만족을 얻는 것을 쉽사리 포기하고 즉시로 채워지는 충동적인 만족을 찾아 끝없이 헤메기 때문입니다. 어렸을때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했던것 우리의 한계를 지어줬던 방식그대로를 흡수해서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때 우리의 충동이나 욕구를 조절하고 우리의 가치있는 목표를 위해서 달려갈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냐오냐 하면서 충동적으로 내 자신을 대하는 것도 어릴적에 나에게 부모님이 대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나를 대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충동적으로 끈기를 갖지 못하고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한번 점검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오냐오냐 하는것만이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주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전을 해치는 것이 될수도 있습니다.

 

 

 

섬김과 나눔의 리더십
최호준

대학에는 총장외에, 부총장, 일반대학원장, 특수대학원장들, 단과대학장들, 교무처장을 위시한 처장들, 도서관장을 위시한 부속기관장들 등의 보직이 있다. 그리고 이들 보직은 거의가 교수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런 보직은 수직적인 권한 체계를 특징으로 하는 관청조직과는 다르게 수평적인 협동체계를 특징으로 하는 대학조직에 있어서의 직위이기 때문에 그 어느 조직보다도 행정서비스를 통한 섬김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지않은 대학에서는 보직이 마치 명예나 혜택을 누리고 섬김을 받으려는 자리로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적지 않은 보직자들 스스로가 망가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임에 따라 대학의 다른 구성원들이 보직자를 경원시하게 되었고 이들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져만 갔다.

총장이라는 자리도 더하면 더했지 예외는 아니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일명 명망가로 불리우고 있는 총장들은 대학에 애정을 갖고 봉사하기보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잠시 머무는 곳으로 혹은 사회에서 얼룩진 비리를 세척하고 다음 자리를 대비하는 곳 정도로 여기고 행동해 왔다. 이들에게 총장자리란 남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권세나 권력을 누리는 자리이며, 소외된 이웃이나 구성원에게 가진 것을 나누고 베푸는 자리가 아니라 명예나 혜택을 챙기고 채우는 자리이다.

총장을 위시한 지도자의 이러한 누림과 채움의 리더십 하에서는 구성원들의 신선한 창의력이나 지혜나 능력을 끄집어 낼 수가 없고 그들이 가진 역동적인 에너지를 대학발전을 위해 결집해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총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의 한 사람으로서 버려야 할 의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의 의식이다. 무슨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다. 지도자가 존경 받지 못하는 세태하에서 자신이 지도자라고 불린다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부족감을 느껴야 한다. 총장이 아니라 총종(servant) 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널리 인용되고 있는 마태복음 20:26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쓰고 있다. 누가 지도자라는 말인가? 회개를 제일 많이 하고, 남을 섬기는 자가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가장 많이 낮추는 자가 지도자이다.

바나드(C.l Barnard)에 의하면 조직은 비인격적인 조직과 인격적인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모순 대립물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힘든 과제이다. 바나드는 조직이 내재하고 있는 여러가지 모순을 통합하는 것이 최고관리자(top management)의 리더십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구성원의 조직에 대한 일체감(identification)과 조직에의 충성심(loyality)을 일으키는 문제이다. 개인 목적을 희생하더라도 조직 목적에 공헌하려고 하는 의식, 혹은 개인 목적과 조직 목적이 일치되어 있다는 신념을 주는 것이 리더십의 궁극적인 과제인 것이다. (Barnard 1938: 250~59)

이 과제에 적절한 응답이 섬김과 나눔의 리더십인 것이다. 종의 마음을 가지고 구성원이나 고난당한 이웃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리더십을 위대함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참된 종이 되려면 자신을 낮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불붙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종은 계산하지 않고 남을 돌보며 이웃을 용서하고 축복한다. (토미테니와 테이넷 케이프저, 이상준역 2008: 58~65)

그러나 나눔이 동반되지 않는 섬김은 반쪽의 섬김으로 진정한 의미를 지닌 온전한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나눔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자신의 탐욕의 유혹에서 해방되어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쪼개고 나누워 남의 필요를 채워줄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대학구성원들 대부분은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적지 않은 혜택을 받으며 자신을 성장시켜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에서 벗어나 순간순간 이웃과 나누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나눔은 수직적인 베품이 아니라 수평적인 주고받음이다(법정, 2008: 55).

이기심으로 얼룩진 대학과 혼탁한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대적 과업은 대학에서 리더라고 불리우는 보직자들, 특히 총장이 솔선수범하여 얻기보다는 잃어버리는 것이고, 누리기보다는 섬기고, 으뜸이 되기 보다는 종이 되는 길로 들어섰을 때 비로소 달성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