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소련 장군 스티코프의 비밀수첩!~
'당시 북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스티코프을 경유하지 않고 이루어진 일은 하나도 없었다'
1949년 6월 26일 서울.
김구가 암살됐다.
한결같이 민족통일을 부르짖던 정치인.
그의 죽음과 함께 통일의 노력도 사라지는 듯 했다.
그로부터 50년.
2000년 3월 러시아,
한 소련군 장교의 비밀수첩이 발견됐다.
분단 직전 한반도의 상황을 담고있는 이 한 권의 수첩에서
김구를 만난다.
"역사스페셜은 최근에 우리 현대사의 한단면을 밝혀주는 중요한 사료를 하나 입수했습니다.
자그마한 크기에 빨간 가죽으로 포장되어 있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런 수첩입니다.
이 수첩속에는 러시아말로 글씨가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볼펜으로 쓴 것도 있고, 연필로 쓴 것도 있구요.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4월 25일 담배를 끊도록 맹세한다'
'빨래를 잘 안 해서 더럽다 세탁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기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록으로 보이는요,
전혀 다른 기록도 있습니다.
'북조선 헌법, 인민군 , 한반도 상황, 스탈린...'
이렇게 보자 뭔가 심각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실제 이 수첩속에는
남북한이 분단되기 이전에
북한의 정치,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은 누가 남긴 것일까요?
소련 장군 스티코프입니다.
소련군 연해주 군관부 정치담당 부사령관이었던 스티코프는
스탈린의 심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였고,
48년에는 초대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기도 하는데요,
실제 소련군의 북한 진주후에
북한 사회를 움직였던 실질적인 실력자가 바로 이 스티코프입니다.
해방 이후 이 스티코프가 한반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오늘 이 시점에서 이 스티코프의 수첩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요,
1948년 백범 김구가
38도선을 넘어 이북에 건너가 남북협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 수첩속에는 그 역사적인 사건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러시아의 고도 상트페테르부르그로 찾아간 것은 지난 3월이었다.
교회옆 낡은 아파트에서 한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취재팀을 맞은 사람은 빅토르 스티코프(65세).
그는 쩨렌치이 스티코프의 아들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아버지의 유품부터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좁은 거실을 채우고 있는 자개상은
1948년 8월. 15일. '북조선임민위원회'가
해방 3주년을 기념하여 스티코프에게 선물한 것이다.
또 '북조선노동당'이라고 새겨진 화병도 눈에 띄었다.
그의 유품들은 하나같이 북한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빅토르의 어린시절 기억속에도
아버지는 북한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주로 평양에 머물렀지만
아버지를 따라 서울과 제물포에도 가 본 적이 있다.
아마 47년이나 48년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가세가 기울어지자
얼마전까지만해도 빅토르씨는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이런 그들에게
소련군 최고위급 장성이였던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절은 자랑스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는 스타일이었다.
천성적으로 없는 일도 만들어 하는 분이셨고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건설적으로 업무에 임하였다고 기억한다.
북한에서도 아버지는 쉬지 않고 농촌을 순시하였고
나도 북한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따라 농촌에 가 본 적이 있다."
스티코프.
그가 북한에서 한 일은 무엇일까?
"북한 주재 소련 민정청이란 기구가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민정 관련 일을 총괄하는 기구였는데,
민정청의 최고 지도자가 레베제프라는 사람인데,
그가 남긴 활자화된 회상기에 의하면,
'당시 북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스티코프을 경유하지 않고 이루어진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였어요.
그만큼 스티코프는 소련의 대북한 정책,
실제 북한에서 그 정책을 실천해나가는데 있어
기안하고, 집행하고, 그 결과에 대해 다시 수정하고 추진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일을 했어요."
- 전현수, 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관
스탈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스티코프는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에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는 주도면멸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많은 일기와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취재팀은 이번 방문에서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한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이 수첩은
스티코프가 북한에 머물렀던 1948년의 기록이었다.
담배를 끊겠다는 개인적인 기록부터,
미코얀이라는 사람에게 인사청탁을 부탁한 일까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꼼꼼히 적고 있었다.
"미코얀은, 스탈린 동지에게 나를 받아달라고 부탁해보라고 했다.
쥐다노프 동지에게도 전화해서 부탁했고, 그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북한의 정치, 경제 관련 상황들은
이 수첩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북한의 실권을 쥔 스티코프가 직접 기록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통일 정부를 가상한 내각 명단
1. 대통령 서재필
3. 총리 김규식
4. 내무 신익희
5. 외무 장택상
7. 국방 김일성
8. 법무 허 헌
9. 노동 박헌영
13. 교통 김성수
14. 통신 조만식
15. 보건 조소앙
하지만 이 명단이 언제, 어떤 경위로 작성된 것인지 내용은 없었다.
"내용이 굉장히 소략하고, 압축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기라는 것이 개인적이다 보니까 자신만이 아는 집약과 추상적인 부분이 많은데,
1947년말에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1948년초에 남북한에서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상황속에서,
당시 한국에 대한 소련 군정의 정치적 태도에 대한 시사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 전현수(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관)
비록 간략하지만 이 수첩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해방 이후 북한 사회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수첩의 이름 중에서 한 정치인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백범 김구.
왜 스티코프의 수첩에 김구의 이름이 나온 것일까?
"해방 이후 북한 사회에서 이 소련의 영향력은 막대했습니다.
북한 사회를 어떻게 어떻게 이끌어갈 것이지,
그 정책을 만들고 실현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스티코프입니다.
그런데 이 스티코프의 수첩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김구입니다.
당시 38선 이남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구는
정치 지도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소련으로써는 아주 껄끄러운 정치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스티코프는 이 김구에게 주목을 한 것일까요?
<둘> '임형'에게 보낸 김구의 편지,
48년 남북회담 개최!~
'임형이여 이래서야 되겠나이까!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주장으로 영원히 분할할 필요가 있겠나이까!
임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 낼지언정
허리 끊어진 조국을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하는 모습을 어찌 더 보겠나이까!'
1948년 4월 평양에서는
'남북연석회담'이라는 이름으로 남북회담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김구는 이 회담에 참석을 했던 것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남과 북이 분단되기 이전인데 김구가 참석한 남북연석회의,
그것은 과연 어떤 회담이었을까요?"
KBS 도서실.
48년 남북회담은 공개회담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렸을 것이다.
회담이 열린 시기는 48년 4월.
당시 신문을 통해 남북회담은 4월 19일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북회담의 장소는 38선 이북의 평양.
38선 이남에서 올라오는 대표들을 위해 대대적인 환영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시작된 회담은
4월 3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회담엔 남로당의 박헌영, 한국독립당의 김구 등
38선 이남에서 모두 695명이 참석했다.
"한독당에서 김구,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등이 있구요,
민족자주연맹에 김규식, 김봉준 등이 있구요,
민주독립당에 홍명희, 전봉하 등이 있습니다.
다음에 남한에 극좌적인 세력으로써 박헌영, 허헌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외 인민공화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전평, 여맹 등
56개 정당 사회단체, 695명 참석했습니다.
따라서 참석한 사회단체 대표들의 면모를 살펴볼 때
극좌부터 중도우파까지 망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전현수(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관)
스티코프의 수첩에서는 이런 메모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1948년 김일성이 작성한 남북 대표 초청자 명단이다.
남측 -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북측 -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달현
스티코프는 그 당시 남북 대표들이 스탈린에게
대규모 남북회담을 열 것을 주창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48년 3월 25일.
북한은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제의했다.
남북회담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북조선 사회정당단체 지도자인 우리들은...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합니다."
당시 북측의 제의에 대해
김구의 생각을 알기 위해 백범김구기념사업회를 찾았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서울 효창동).
주로 백범에 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곳은
<백범일지>와 어록과 백범의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당시 백범의 수행비서였던 선우진 선생.
그는 48년 남북회담과 관련해 취재팀에게 중요한 문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백범 김구가 '임형'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였다.
'임형'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두봉이란 사람이었는데
당시 김두봉은 38선 이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안부편지가 아니었다.
"48년 2월 16일로 되어있습니다.
그때 처음 북한에 있는 김두봉 선생에게 편지를 하면서
우리가 어떡해든지 통합을 이룩해야 하지 않느냐 편지를 하신 겁니다."
- 선우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고문)
북측이 연석회의를 개최하기 한달 보름전
김구는 이미 김두봉을 통해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의했던 것이다.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흔히 '남북연석회'의라고 부릅니다.
북한에서는
이 회의의 초청장을 남측의 대표들에게 많이 보냅니다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회의를 북한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제 이 회담을 제안한 사람은
김구와 김규식이었습니다.
이 회담을 제안한 백범 김구 선생의 편지를 한 번 보면,
'임형이여 이래서야 되겠나이까!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주장으로 영원히 분할할 필요가 있겠나이까!
임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 낼지언정
허리 끊어진 조국을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하는 모습을 어찌 더 보겠나이까!'
김구 선생님의 절실한 심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절실한 심정으로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한 것입니다.
김구는 왜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했던 것일까요?
이 시기는 우리의 역사상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시간속으로 한 번 들어가보겠습니다."
<셋> 임시정부 시절, 김구의 좌우통합운동!~
"김두봉을 만나 좌우통일전선 결성을 제의했다.
김두봉은 찬성하고 직접 중경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좌우합작이 정말 성공하는구나..."
- 장건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일제 시대,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광저우를 거쳐 충칭(중경)으로 옮겨야 했다.
새로운 곳에 터전을 잡은 임시정부는
김구의 주도로 뜻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공동의 적,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일단 임시정부에서부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들이 가담해
민족주의 계열과 연합을 시도했다.
김구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1942년. 10월. 25일.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의정원엔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을 포함해 좌파 계열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 20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좌우대통합이었다.
김구의 좌우합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구는 다시 연안에서 독립운동 중인
또 다른 좌파와 연합을 추진했다.
당시 그곳엔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 김두봉이 있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오기전
상해에서 김구와 동거동락했던 사이였다.
1924년 백범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김두봉은 그 묘비명을 직접 써주는데,
자음으로 표기한 이 독특한 묘비명은
한글학자이기도 한 김두봉의 면모를 보여준다.
'최 준례 묻엄'
'ㄹㄴㄴㄴ해(단기 4222년)
ㄷ달(3월)ㅊㅈㅈ날(19일)남
대한민국ㄷ해(6년)
ㄱ달 1날(1월 1일) 죽음'
그런 김두봉에게 김구는 연합전선을 제의한 것이다.
"42년에 임시정부가 통합을 시도할 때
그때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제 1진으로 들어오고,
또 44년에 연립내각을 구성할 때도
전부 '통일전선' '통합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거든요.
특히 43년 3월에 연안의 김두봉과 통합을 추진해가지고
김두봉이 거기에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44년에는 장건상(당시 임시정부국무위원)이가
연안에 대표로 파견되어 있었지요."
- 조동결(국민대 명예교수)
좌우합작을 위해 연안에 파견된 장건상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두봉을 만나 좌우통일전선 결성을 제의했다.
김두봉은 찬성하고 직접 중경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좌우합작이 정말 성공하는구나..."
- 장건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넷> 38도선, 우리가 원치 않았던 분단!~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있고, 공산주의도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단정 수립에 참여하지는 않겠다."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5. 8. 15.
해방이 찾아왔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독립운동세력이 하나로 힘을 모았지만
그 힘을 발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김구는 갑작스런 해방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해방에 감격에 젖어있는 동안 한반도의 운명은
또 다른 비극속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38도선.
한반도는
세계 질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점령지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고심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신탁 통치'를 알리면서
한반도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38도선 이남에는 반탁 운동이 일었다.
그 선두에 선 이가 백범 김구였다.
그는 반탁 운동을 제 2의 독립 운동이라고 했다.
사실 모스크바 결정은 신탁 통치 이전에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소는 결국 타협에 실패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1948.1).
하지만 이북 지역은 이들의 방문을 거부했다.
유엔은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을 결의했는데,
이것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의미했다.
총선 날짜는 48년 5월 10일로 잡혔다.
북한도 48년초 헌법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사회 전반에 걸친 급속한 사회 개혁이 성공하면서
북한은 이미 남한과는 다른 사회가 되어 있었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로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구는 단독 정부 수립을 원하지 않았다.
48년초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단정 반대 운동을 벌여나갔다.
48년 2월, 김구는 3천만 동포들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다.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있고, 공산주의도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단정 수립에 참여하지는 않겠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겨레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었던 당시,
우리 민족지도자들은, 그리고 우리 민중은, 거의 모두가,
남북한의 분단이 오래 가리라고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지만
그러나 종국에는 반드시 통일정부가 서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이념적인 투쟁도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1948년 초에 들어서면은
통일정부가 서리라는 전망이 무참하게 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이념적인 대결보다도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과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그러한 판단이 백범, 우사(김규식), 그 밖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북행을 결심하게 만든 것이죠."
- 김학준(인천대 학장)
남북한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이루기 위해
김구는 남북회담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면
남북의 통일 정부가 들어서리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당연한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세계 정세와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한반도의 상황은 그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조국이 두조각으로 나뉘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김구는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 통일을 이루어보고자
남북지도자회담를 시도한 것입니다.
김구가 좌우합작을 시도한 것은 비단 이때 뿐만이 아닙니다.
백범일지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동삼성 방면에 김일성 등 무장 부대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 왜병과 싸우고 있다."
김구는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그 시절부터
이미 김일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후 김구는
중국에서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세력을 통합하려는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했는데
그 일환으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무장부대인
김일성부대와의 연합을 추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분단을 눈앞에 두고 김구가 제안했던 남북회담,
과연 이 회담은 순조롭게 성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다섯> 남북회담을 위해 사전에 보낸 두 명의 연락원은?
1. 어떠한 형태의 독재도 반대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
2. 독점자본주의를 배제하는 경제체제를 건설할 것.
3. 민족의 총선거를 통해 전민족적 정부를 건설할 것.
4. 국가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무력에 호소하지 말 것.
5. 외국군 철수 문제는 소련, 미국측과 합의하에 할 것.
스티코프의 수첩엔
남북지도자회담이 이루어지기전에 있었던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어제 두 명의 연락원이 날 찾아왔다.
자신들을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김구와 김규식의 도착이 늦어질거라며
그런 사실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해달라고 부탁했다."
두명의 연락원, 그들은 누구일까?
"조국의 위기 상황은 공감을 하지만,
그걸을 어떻게 타결해나갈 것인가 구체적인 준비 과정이 없었던 것이죠.
여기서 김구와 김규식 선생은
직접 자신들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두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여서
사전에 몇가지 문제를 먼저 파악하여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해결한 후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은 자신이 가장 믿었던 측근
안중근 동생의 사촌 안경근을 북으로 보내기로 합니다."
- 김광운(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수소문 끝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살고 있는
안경근의 후손을 찾을 수 있었다.
취재팀이 만난 사람은 안경근의 아들 안철생옹이었다.
아버지 안경근은 지난 78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었다.
집안 대대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안철생옹의 대답을 통해
역사속에 묻힌 안경근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일제시대 안경근도 중국에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는데
그 과정에서 북한의 실력자인 최용건, 김두봉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최용건이는 아버지하고 군관학교 동기생이었고,
김두봉씨는 아버지 2년인가 선배고 ,
그러니까 이북에 가면 동기고, 안면이 있으니까,
제일 적임자라 해서 보낸거죠."
- 안철생옹(89세, 안경근 아들)
그가 밀사로 선택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안경근과 함께 밀사로 파견된 또 한사람은 김규식의 비서, 권태양이었다.
그들이 북측에 제시한 5개항 조건이
스티코프의 수첩에 나와 있다.
1. 어떠한 형태의 독재도 반대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
2. 독점자본주의를 배제하는 경제체제를 건설할 것.
3. 민족의 총선거를 통해 전민족적 정부를 건설할 것.
4. 국가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무력에 호소하지 말 것.
5. 외국군 철수 문제는 소련, 미국측과 합의하에 할 것.
북측은 이 제안에 동의했다.
남북회담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당시 소련 민정청 책임자 레베제프의 비망록이 소장되어 있는
대구 매일신문사를 찾았다.
'레베제프의 비망록'은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3월 11일.
소련은 김구를 '통일을 방해하는 사람'이라고 쓰라고 지시하고 있다.
그런데 4월 8일.
스티코프는 김구를 대화에 꼭 참석시킬 것과,
남북연석회의의 합의 사항으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추방, 군대 철수, 총선 실시를 지시하고 있다.
소련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38선 이남 지역에서도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찬반 논쟁이 분분했다.
특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이
어떠한 입장을 나타낼지는 커다란 관심사였다.
"미군정은
단독정부 수립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고,
따라서 백범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에 쐐기를 박게 됩니다.
그래서 백범이 북행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
미군정은 아주 냉소적인 성명을 발표합니다.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지금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우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를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취지로 담화를 발표할 정도였습니다."
- 김학준(인천대 총장)
<여섯> 김구의 북행을 막는 사람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한반도 전체를 독립운동 시킬려고 한 것이지,
일방적으로 한곳에만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북행하는 것은
한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을 하려 가는 것이니까
길을 열어달라 호소하셨지요."
- 선우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고문)
지금은 병원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은
김구가 총탄에 쓰러지기전까지 숙소와 집무실로 사용했던 것이다.
50여 년전, 김구는 이곳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1948년 4월 19일.
400~500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김구의 북행길을 막기 위해 경교장에 몰려들었다.
김구는 그들을 설득해보려 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한반도 전체를 독립운동 시킬려고 한 것이지,
일방적으로 한곳에만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북행하는 것은
한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을 하려 가는 것이니까
길을 열어달라 호소하셨지요."
- 선우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고문)
그러나 학생과 시민들은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출발이 계속 지연되었지만 김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김구는 탈출을 시도했다.
"그때 정면으론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구요,
그래서 김구 선생님이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 하셨고,
그때는 보일러에 기름을 땐 것이 아니라 석탄을 땠습니다.
뚜껑을 열고 석탄을 부어 사용하였단 말이죠.
그래서 김구 선생님은 밖으로 난, 석탄 넣는 뚜껑을 열고 나가셨지요."
- 선우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고문)
김구 일행은 임진강으로 향했다.
지금은 민통선 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김구 일행은 임진강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 임진나루에 도착했다.
"일반 사람이나 차나 모두 임진나루에 배를 타고 건너곤 했습니다.
그때 백범 선생님도 이리로 오셔서 차를 배에 싣고서,
저희들도 그냥 차에 탄 채로 배에 실려 저쪽으로 건너가서 바로 개성으로 향한 겁니다."
- 선우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고문)
그렇게 나룻배에 몸을 싣고 김구는 38선으로 향했다.
38선에 도착한 김구 일행은 단 세사람.
수행비서 선우진씨와 김구, 그리고 김구 선생님의 아들 김신씨였다.
급하게 경교장을 빠져나오느라 일행은 손수장 하나 변변히 챙기지 못했다.
그리고 김구는 급하게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저녁 6시.
김구가 38선을 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본 이는 단 한 명의 기자였다.
사람들은 신문에 실린 특종 기사를 통해 김구의 북행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김구의 북행을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고요한 삼팔선에 스미는 듯 어둠의 장막이 내려왔다.
이북 마을에 등불이 반짝인다.
달이 뜨고 하늘에 별도 반짝인다.
김구씨가 떠난 하늘 아래도 별은 반짝인다."
"이렇게 해서 김구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습니다.
참으로 힘겨운 북행이었습니다.
김구는 시위대를 피해서 경교장을 빠져나와야 했을 만큼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습니다.
불투명했던 김구의 입북이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지는데,
이 남북연석회의는
그야말로 서로 다른 이념과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그런 회의였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김구와 김일성 등 남북의 지도자들의 회의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련과 미국도 이 회의에 개입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회의에선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요?"
<일곱> 성공적인 4김회의, 남북대표자회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은...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 것이며...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수립..."
- 로동신문, 전조선동표에게 고함.
김구가 평양에 도착하기 전,
이미 평양에 모란극장에선 남북연석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4월 19일부터 시작된 남북연석회의는 형식적으로는 남북대표전체가 모이는 회의였지만
실제 참석자는 대부분 좌익 계열이었다.
김구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20일 저녁.
김구는 도착하자마자 김일성, 김두봉을 만나는데 이 자리에서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스티코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구가 나에게 이 자리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민족 문제에 외국인이 간섭하는 것을
김구는 용납치 않았던 것이다.
김구가 북행을 결행한 후
남측 대표들도 속속 38선을 넘어왔다.
마지막으로 회담에 참석한 이는 김규식,
줄곧 통일운동과 좌우합작을 추진해온 인물이었다.
연석회의 3일째, 김구는 간단하게 축사를 했다.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단체대표 여러분!~
조국 분열의 위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단 회합하여
민주, 자주의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의 발전이며,
이와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구는 전체 회의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지도자 회의를 제안했다.
23일 막을 내린 연석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정서가 채택된다.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은...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 것이며...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수립..."
- 로동신문, 전조선동표에게 고함.
그런데 이 결정서는 남한의 우익을 매국노라 표현하고 있었다.
"호텔로 가서 김구 선생 만나니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자결할 수도 있는 문제다.
이북에 와서 이남의 민족진영을 욕한다는 것은 얘기가 안된다' 하셨지요.
그 내용은
이승만, 김성수 도당들이 책동해서
미군과 결탁해서 단독정부 수립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회의 끝난 후에 김두봉, 김일성에게 접촉을 했어요.
나는 주영하에게, 엄항섭씨는 김두봉에게 접촉해서,
4김회담을 열어서 그 부분을 삭제하기로 결정했지요."
- 신창군(당시 한국독립당 대표로 방북)
연석회의가 끝난 후
'남북지도자15인회의'와 함께
두차례의 '4김회의'가 개최되었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4김회의'는
남북에서 각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이 만난 가장 실질적인 회담이었다.
"실제 회의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대표자연석회의가 가장 비중있지만,
남북의 허심탄회한 합작의 의미에서 보면 4김회의가 가장 중요합니다.
실질적으로는 4김회의에서 결정을 하고,
이것을 15인 남북대표들에게 확대 전달하고,
발표한 것이 중요한 4월 30일에 발표한 4개 성명서 발표입니다.
- 도진순(창원대 사학과)
4김회담에서 발표한 것은 다음이었다.
이 성명서가 지켜진다면 남한의 단정수립은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첫째, 미소양군 철수,
둘째, 양군 철수후 통일에 반대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허용하지 않을 것,
셋째, 전국 총선에 의한 통일 국가 수립,
넷째, 남한의 단선단정 반대
"48년 남북연석회의의 최대 의의라고 한다면,
4월 30일에 4개항 공동성명이고,
그 내용은 첫번째가 자주,
두번째가 평화,
세번째가 통일,
네번째가 분단 반대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통일 강령으로 이야기하는
7.4 남북공동성명(1972년)의 기본이
바로 48년 4월 30일 4개항 공동성명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도진순
4월 19일부터 시작한 남북연석회의는 4월 30일,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48년 남북회담에서 김구는
단독선거, 단독정부는 만들지 말자는 합의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 합의는 지켜지지 못했고
남과 북에는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렇다면 이 남북연석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은 왜 지켜지지 못했을까요?
그동안 이 남북연석회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구가 북한에 이용당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의견입니다.
과연 48년 남북회담을 실패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이 연석회의가 남긴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48년 5월 5일.
38선엔 수많은 사람들이 김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김구는 민족통일의 희망을 품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환영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추측하기를 내려가면 우리를 체포하리라 생각해서
접경에 와서 방에 들어가서 내의를 입고 왔는데,
와보니까 환영하는 사람이 많고 경찰도 우리를 호위하고 눈물이 났지요."
- 신창균
<여덟> 결국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말았지만...,
김구의 노력은 우리 민족통일로의 자산!~
김구는 돌아왔지만
48년 5.10총선은 진행되었다.
이미 남북한 단정수립은 예정된 길이었고
그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1948년 8월 15일,
해방 3주년이 되던 날,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것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였다.
북한의 단정수립도 형식적인 절차만 남겨놓고 있었다.
8월 25일, 남한의 총선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치뤄졌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내각수상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해방된 지 3년만에
통일의 꿈은 무산되고
남과 북은 둘로 갈리었다.
단정을 막으려던 김구의 노력은
아무런 결실을 보지못했다.
"북한이야 자기들의 전통적인 통일전선,
그 다음에 중국의 국공전쟁이 전개되는 속에서,
북한 나름의 단독정부를 수립할 명분을 찾으려고 했겠죠.
그건 뭐 북한 입장에서 당연하지 싶습니다.
백범이 북에 가서 한 일은
여기 남한의 단정도 막아보려 했지만,
북의 단정도 막아보려고 한 그 노력인데
왜 북한에 이용당한거라고 합니까!
그게 살아야 오늘날의 통일노력도 의미를 갖는 것이고,
역사의 어떤 운동이라는 것은
당장의 눈앞에 전망을 보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아무리 강대국의 힘이 커져서
우리 민족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강대국 정치의 틀에 맞서겠다고 하는 그 결연한 민족적 정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는 큰 민족적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강대국 정치의 틀이 결정되었다고 해서
우리 민족으로부터 어떠한 통일 노력도 없었다고 한다면
지난날 우리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겠습니까?
우리 역사가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준 데에는
백범선생, 그리고 우사선생, 그리고 북행을 결행했던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그 가시밭길 같은 노력이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 김학준 인천대 총장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김구는
통일 이전에 독립은 없다고 했다.
김구가 떠난 지 50여 년이 흘렸다.
이제 한반도는 오랜 반목과 대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백범 김구.
그가 남기고 간 통일정신이 다시금 살아나고 있는 것인가!~
"오늘날 김구의 북행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있습니다.
냉전이라는 세계 정세, 그리고 좌익과 우익이라는 내부 대립과 갈등속에서
그의 시도는 현실적 한계가 너무나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무모한 이상주의자라고도 합니다.
또 그가 북행을 감행한 것은 순수한 민족통일의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38선 이남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자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함으로써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북한 정권에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그런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범 김구선생은 우리 현대사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과 더불어
긍정적인 측면도 가름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준엄함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스티코프의 비밀수첩을 통해서
남북연석회의를 드러다봤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한 것은 한 민족지도자의 통일을 위한 뜨거운 노력입니다.
오늘날 남북이 만나 화해의 노력을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의 노력을 되새겨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 일것입니다.
백범선생은 이런 글을 즐겼다고 합니다.
"눈이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발자욱이 뒷사람의 길이 될지니"
- 서산대사 휴정
김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긴 발자취,
그것은 바로 민족통일을 위한 뜨거운 신념 아닐까요?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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