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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사형수였던 장군 [ 12 ]

鶴山 徐 仁 2009. 8. 10. 10:16

august 의 軍史世界

 

사형수였던 장군 [ 12 ]

 

 

 

흡혈귀의 대리인

 

로코소프스키라는 인물은 광기의 시대에 숙청되어 바닥까지 떨어졌던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역으로 그것도 사형수신분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복귀하여 전설적인 진격의 명장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으며, 이 글의 [ 1 ] 편에 썼던 것처럼 승전기념식의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인으로써 그의 명성과 능력이 상당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승전기념식장의 로코소프스키 (中) ]

 

그렇지만 전쟁이 끝난 후 로코소프스키의 인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종전 후 북부 폴란드 및 독일 점령 소련군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1949년 10월 폴란드에 비에루트 ( Boleslaw Bierut 1892~1956 ) 가 주도하는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신생 폴란드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됩니다.  그가 폴란드인이었고 소련 최강의 부대를 지휘하였던 경력에 비추어본다면 새롭게 탄생한 폴란드의 국방장관으로 어울리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 소련의 괴뢰국으로 재탄생한 폴란드의 수반 비에루트 ]

 

그렇지만 누구나 다 인정하듯 신생 폴란드 정부는 소련의 괴뢰국가였으며 로코소프스키가 폴란드 정계에 데뷔한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고 순전히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였습니다.  스탈린은 폴란드를 확고히 간접지배하기 위해서 정권 핵심 곳곳에 자기수하를 심어 놓았고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로코소프스키였습니다.  이때 로코소프스키와 더불어 수천의 폴란드계 소련군들이 국적을 바꿔 폴란드군에 입대하여 군부를 장악하였습니다.

 

[ 폴란드 국방장관 당시의 로코소프스키 ]

 

그는 국방장관은 물론 내각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 각료회의 부의장 감투와 더불어 폴란드 육군원수의 칭호를 부여 받았을 만큼 폴란드 내에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폴란드 말이 어눌하였을 만큼 단지 핏줄을 제외한다면 심정적으로는 소련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폴란드 정권의 지시가 아닌 스탈린의 명령만 충성스럽게 받들었습니다.

 

[ 1945년 바르샤바 승전퍼레이드에서의 폴란드 임시 각료들의 모습 ( 가운데가 비에루트 ) ]

 

때문에 그는 폴란드 정권 내에서도 소련의 밀사 또는 스탈린의 대리인으로써 총독임무를 수행하는 이방인 또는 간첩으로 처음부터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폴란드인이었음에도 그가 폴란드 정권 내에서 왕따를 당한 이유는 소련의 대리인으로 일하는 현재의 위치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지난 행동이 더욱 고국사람들에게 불신을 사기 충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1945년 폐허 속의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폴란드군의 승전퍼레이드 ]

 

[ 2 ] 편에서 처럼 우선 1922년에 있었던 소련-폴란드전쟁 당시 그는 소련 제27기병연대를 이끌고 그의 조국인 폴란드군과 적극적으로 싸웠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참전 경력과 과감한 진격을 선호하던 지휘능력은 소련군내에서 그의 입지를 넓히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폴란드에서는 당연히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 1922년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의 赤軍기병대 ]

 

비록 그가 소련 내 소수민족으로 배타적인 군부 내에서 출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하였다하더라도 고국 폴란드를 위해 그가 진심으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는 있었습니다.  바로 1944년 8월 바르샤바 민중봉기가 있었을 때 만일 그가 부대를 이끌고 비스툴라강을 넘어 진격하였다면 조국해방의 은인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하는 독일군 ]

 

하지만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독일군의 무자비한 총칼에 짓밟히는 폴란드 인민들의 절규와 신음소리를 그는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당시 폴란드인들은 공산주의 세력이던 서방세력이던 상관없이 당장 그들을 도와줄 친구를 원하였는데 폴란드인 로코소프스키는 이들을 도울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흡혈귀 스탈린의 명령을 받들어 동포들의 절규를 수수방관하였습니다.

 

[ 로코소프스키는 폴란드이면서도 폴란드인이 아니었습니다 ]

 

결국 이러한 전력은 그가 폴란드인이었고 국방부장관이었음에도 정권 내에서 보이지 않게 소외를 당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군인으로써의 그는 작전에 관해서는 스탈린과 언쟁을 벌였지만, 한때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정도의 나락과 공포를 체험하여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에게 절대 굴종하였고 폴란드내에서 소련의 대리인으로 충실히 생활하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