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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사형수였던 장군 [ 끝 ]

鶴山 徐 仁 2009. 8. 11. 11:48

august 의 軍史世界

 

사형수였던 장군 [ 끝 ]

 

 

 

영웅과 역적을 오간 인생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하여 그의 권위를 더욱 높이며 영원히 소련을 지배할 것 같았던 악마 스탈린이 1953년 사망을 합니다.  혹자에 따라서는 암살되었느니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수천만 명을 죽이거나 위해를 가하여 역사에 기록될만한 공포세계를 구현하였던 나쁜 놈은 나름대로 천수를 누리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솔직히 이런 경우를 보면 神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덕분에 로코소프스키도 자연스럽게 사면이 되어 지긋지긋하던 사형수신분에서 공식으로 벗어납니다.

 

[ 스탈린의 사망으로 로코소프스키는 사형수 신분에서 벗어납니다 ]

 

스탈린 사후 소련도 그랬지만 제2차 대전 후 강제로 소련의 위성국가들이 되어 눈치만 보던 동부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인류 최악의 악마가 사라지고 소련 정권 내에서도 많은 변화가 뒤따르자 서서히 눌려왔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고집하는 폴란드도 당연히 그러하였는데 스탈린 격하운동 정도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소련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 스탈린은 사망과 동시에 신의 반열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

 

그런데 이러한 반소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였던 것은 폴란드의 국방장관이자 내각 부의장인 로코소프스키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동원한 방법은 무력에 의한 진압과 더불어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반소, 반공, 반소비에트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색출하여 강제 수용소로 보내 테러를 가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가 스탈린에게 당했던 바로 그 공포의 방법이었습니다.

 

[ 1956년 포즈난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소, 반공 시위 ]

 

특히 1956년 포즈난 ( Poznan ) 에서 소련군에 항거하는 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로코소프스키는 1만의 병력과 300대의 탱크를 파견하여 발포까지 불사하며 시위 군중을 강제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74명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하여 정권 내에서 로코소프스키를 지지하던 친소 폴란드인들도 그를 비난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는 군 병력 ]

 

한 때 나찌로부터의 비극적인 해방과정에서 동족의 죽음을 애써 모른척하며 비스툴라강 동쪽에서 머물며 뒤짐만 져서 비난을 받았던 그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외세를 등에 업고 등장한 폴란드의 새로운 점령세력으로 등장하여 반감을 사게 되었고, 거기에다가 나찌와 똑같은 방법으로 동족을 탄압하는데 앞장을 서서 폴란드에서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 로코소프스키는 폴란드에서 배척 되었습니다  ( 가족과 단란했던 모습 ) ]

 

1956년 반소의식을 가지고 있던 개혁성향의 고물카 ( Wladyslaw Gomulka 1905~1982 ) 가 폴란드의 정권을 잡은 후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폴란드 인민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 되어버린 로코소프스키도 함께 숙청되었습니다.  정권에서 밀려난 그는 모스크바로 도주하여 흐루시초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제압할 것을 주장하였을 정도로 완전히 조국과 등지게 되었습니다.

 

[ 새롭게 폴란드의 정권을 잡은 고물카 ]

 

그렇지만 스탈린시대로 반동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흐루시초프는 고물카와 협상하여 폴란드에서 밀려난 로코소프스키를 소련이 떠안는 대신 소련과 폴란드간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하는 외교적 협상으로 사건을 마무리 짖고 로코소프스키 개인에게는 소련의 계급과 직위를 복원시켜서 달래주었습니다.  폴란드에서 로코소프스키는 공공의 적이었지만 소련에서는 아직도 나찌로부터 소련을 구한 불세출의 명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도망 온 로코소프스키는 소련에서 아직도 영웅이었습니다 ]

 

결국 그는 1957년 흐루시초프가 당시 국방장관이자 군부의 실세였던 주코프를 숙청시킨 후, 국방차관 서리 및 트랜스코카서스 전구군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이후 1958년 국방차관으로 영전하여 1962년 4월에 은퇴 시까지 소련의 군권을 거머쥐는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1968년 8월 사후 크레믈린의 붉은 광장에 매장되었을 정도로 소련 인민과 권력에서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 1968년 장례식 당시의 모습 ]

 

개인적으로 생각 할 때 이 인물을 보면 전선에서 포탄을 두려워하지 않던 세계적인 명장이 시간이 흐를수록 왜 이렇게 추악하게 변해갔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작전에 관해서는 스탈린과 논쟁도 불사할 정도였을 만큼 충실한 군인이었던 그가 어찌하여 정치적인 문제에만 걸리면 나약해지고 조국의 인민들까지 나서서 탄압하는데 앞장서면서까지 권력을 쫓게 되었는지 참으로 이상합니다.

 

[ 1958년 소련 국방차관 당시 폴란드 외교단을 맞이한 로코소프스키 ]

 

핏줄을 주었던 조국 폴란드에서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막상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기도 했었고 죽음직전까지 내쳐지기도 하였던 소련에서는 국가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고 죽어서까지도 길이 칭송되고 있는 그의 인생을 보면 명장 로코소프스키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어려웠고 피곤한 삶을 살았던 인물 같습니다.  그것을 보면 권력이라는 것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마약 같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