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AGAIN 살수대첩 [ 1 ]

鶴山 徐 仁 2009. 1. 30. 17:59

august 의 軍史世界

 

AGAIN 살수대첩 [ 1 ]

 

 

 

당신 전투할 줄 압니까 ?

 

1951년 4월말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 James Alward Van Fleet 1892~1992 ) 장군이 천신만고 끝에 잔여병력을 추슬러 가평에 집결을 겨우 완료한 청성부대를 방문합니다.  밴 플리트는 아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28살의 젊은 한국군 6사단장 장도영 ( 張都暎 1923~ ) 에게 화난 표정으로 큰소리로 묻습니다.  " 당신 전투할 줄 압니까 ? "  이 치욕적인 말에 장도영은 고개를 떨 구고 입술을 깨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 예 "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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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 플리트가 (右) 패전의 치욕을 당한 장도영을 찾아와 질책하였습니다 ]

 

장도영의 이글대는 눈빛을 유심히 바라보던 밴 플리트는 뒤로 돌아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미 8군에 원대 복귀하여 전임 사령관이자 맥아더 퇴임 후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된 리지웨이 ( Matthew Ridgway 1895~1993 ) 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 한국군 6사단을 해체하지 않고 복구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패전하였는지를 똑똑히 알고 있고 명예를 회복하려는 적개심에 불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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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성부대는 해체 위기에서 벗어나 극적으로 재건되었습니다 ]

 

사단 해체 위기에 몰렸던 청성부대는 이렇게 부대를 실사한 밴 플리트의 결단으로 간신히 살아나게 됩니다.  한국전 초기 빛나는 춘천-홍천전투 ( 관련글 참조 )음성-문경의 지연전 그리고 신녕의 피말리는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려있던 조국을 수호하였던 청성부대가 전쟁 발발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해체위기까지 몰렸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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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전직후부터 낙동강까지 후퇴전에서 청성부대는 놀라운 전과를 보여주었습니다 ]

 

그것은 춘계 1차대공세라고도 불리는 1951년 중공군 4월 공세 당시 겪었던 사창리전투의 비참한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청성부대는 중공군에게 대 포위 당 하면서 병력과 장비의 40% 이상을 손실 보는 참패를 겪고 간신히 가평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결과 전선 중앙부에 중공군의 커다란 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 전선에 걸쳐 아군에게 후퇴를 유도 할 만큼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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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4월 공세 때 부대가 해체 될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

 

40% 의 손실이라면 사실 단기간에 사단을 재편하기 힘들만큼의 피해였습니다.  또한 간신히 회복한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내주어야 할지도 모를 만큼 중공군의 엄청난 대공세가 연일 계속되는 당시의 급박한 전황을 고려하면 차라리 사단을 해체시켜 잔여 병력과 장비를 인근 부대로 이전 배속한 후 전투를 치르도록 조치하는 것이 우선 선택할 만한 전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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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중공군의 거센 공세가 지속되어 전선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

 

하지만 밴 플리트는 복수심에 불타는 장도영의 눈빛과 시찰한 패잔병들의 전투의지가 예상보다 높은 모습을 보고 청성부대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후에 있었던 현리전투에서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여 갈팡질팡하던 유재흥 3군단장의 태도와 한심한 패전에 분노하여 국군 3군단을 즉시 해체하였던 ( 관련글 참조 ) 그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청성부대는 재건하면 충분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Feel 받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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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에 대한 청성부대의 의지는 컸습니다 ]

 

1951년 4월 청성부대의 사창리 참패와 연이어 5월에 발생한 현리전투에서 3군단의 한심함으로 인하여 한국군 전체에 대한 UN군의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무렵, 밴 플리트의 믿음대로 청성부대는 부대를 단시간 내 재건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 사상 단일부대가 단일전투에서 이룬 최대의 승전인 용문산-화천호 전투의 주역이 되어 전체 한국군의 명예를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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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또한 1950년 10월 전격적인 중공군의 참전이후 이상하리만큼 중공군에 대해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 왔던 국군의 악몽 같던 저주를 푸는 시발점이자 이후 중공군에 대해 당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맞설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청성부대 아닌 국군 전체의 참전사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웠던 파란만장한 역사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