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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7.노르망디 상륙작전-4

鶴山 徐 仁 2008. 9. 13. 10:09
전쟁/제2차세계대전 2008/09/11 20:03




  노르망디 해안을 방어하던 독일 716보병사단에는 2개 동방대대를 포함해 폴란드인,러시아인 등으로 구성된 외국인 부대원들이 많았다.이들은 충성심과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다.독일인 병사들도 신체등급 등에서 처지는 병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독일군은 독-소전에 정예 병사들을 투입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외국인부대 등 2선급 부대를 활용했다.전쟁 기간에 총 100만명의 외국인부대를 운용했을 정도다.1944년 봄 314개 독일군 사단 가운데 66개 사단이 다른 동맹국에서 제공한 부대다.
  이 때 독일군은 총 314개 사단 중 36개 사단을 발칸 반도에,27개는 스칸디나비아에,25개는 이탈리아에 배치했다.프랑스에는 61개 사단이 주둔했다.주로 독일인으로 구성된 나머지 215개 사단은 러시아 전선에서 싸웠다.외국인 부대원들은 점령지에서 자의반타의반 징집된 병사들이기 때문에 전투력이 우수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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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유타 해안포대를 지키던 716사단의 동방대대에는 한국인 병사들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노르망디 해안에서 독일 군복을 입은 코리안이 미군과 싸운 사실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미 역사저술가 스티븐 E.엠브로스다.그는 저서 ‘D-day(1994년)’에서 “유타 해안에서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동양인 4명을 포로로 잡았는데,그들은 나중에 한국인으로 확인됐다.”고 적었다.엠브로스는 당시 미 101공수 소속 소대장으로 참전했다.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네덜란드 아인트호펜의 한 마을을 전차 등과 함께 지나다 목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교가 실존인물 엠브로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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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저서에서 언급한 한 한국인은 1939년 일본군에 징집돼 소-만 국경전투(노모한 전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됐다.자신은 일본인이 아님을 밝히고 병력이 부족한 소련군에 자원입대했다.그러나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에서 이번에는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독일 베를린까지 ‘죽음의 포로 행진’ 속에서도 끈질기게 목숨을 건진 그는 이번에는 독일군 병사로 노르망디 해안에 있었던 것이다.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이처럼 비극적 운명을 살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에는 분명히 한국인 병사들도 있었다는 게 참전 병사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반면 연합군쪽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미국인 2세 김영욱 전 미 육군 대령도 있다.미 육군 최초의 동양인 출신 장교가 된 김 전 대령은 일본인 8000명으로 구성된 독립442연대 100대대 2중대장으로 이탈리아,프랑스 전선에서 싸웠다.그는 미국 은성,동성 훈장,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프랑스 최고훈장 등을 받은 전쟁영웅이다.한국전쟁에도 미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참전해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으로부터 “내가 평생 거느린 500만명의 부하 중 최고의 군인”이라는 극찬을 들었다.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한국인들의 얄궂은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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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망디 해안을 장악한 연합군은 ‘D+6’일까지 병력 32만 6547명과 차량 5만 4186대,보급품 10만 4428t을 상륙시켰다.8월말에는 39개사단 205만명과 차량 43만 8471대를 쏟아냈다.
  영국군이 캉을 거점으로 파리에서 달려오는 전차부대를 막아주는 동안 미군은 남서쪽의 항구 셰르부르를 탈환하고 시골마을 생로로 향했다.생로는 서부로 가는 도로망의 거점이다.이를 잘아는 독일군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미군 4만명이 덧없이 희생됐다.그러자 미군은 공중폭격으로 15세기 대성당을 포함한 이 마을의 95%를 파괴했다.영국군도 캉을 점령할 때 하루에 폭격기 460대가 폭탄 2300t을 쏟아부어 캉 시민 2만명이 몰살했다.연합군은 러시아 전선에서 이동한 독일군이 속속 프랑스 전선에 등장하자 고전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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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전선에 머물고 있던 패튼이 프랑스 전선에 합류했다.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서 맹위를 떨친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배제된 채 ‘위장 부대’의 사령관직을 맡았다.연합군은 그해 7월에 노르망디 북쪽 해안인 파 드 칼레에 30개 사단을 상륙시킬 것처럼 위장하는 작전을 폈다.독일군 사령부는 그 상륙부대의 지휘관이 패튼이라는 점 등에서 깜박 속고 만다.패튼의 가짜 부대는 독일군 17개 사단을 북쪽에 묶어두었고,노르망디에는 11개 사단의 일부만 주둔하도록 만드는 탁월한 성과를 냈다.
  신설된 3군 사령관을 맡은 패튼은 파리를 향해 버릇처럼 쾌속으로 진군한다.그러자 라이벌 몽고메리도 캉의 영국군에게 진격을 독촉했다.패튼 등의 빠른 진군에 힘입어 독일군은 재빨리 철수하지 못하고 팔레즈 협곡에 갇히고 만다.독일군은 이 협곡에서 1만명이 전사하고 5만명이 붙잡히는 참패를 맛본다.

  연합군은 파리 근처에 이르러 고민에 빠진다.쫓기는 독일군이 파리 시내에서 최악의 저항을 펼친다면 다른 도시들처럼 문화재 등이 마구 부서질테고,결국 피를 흘리고도 훗날 욕을 먹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또 미군이 파리를 용케 점령해도 저항하는 독일군 잔적을 소탕하려면 최소 8개 사단을 파리에 주둔시켜야 했다.연합군 진영에서는 아예 파리를 그대로 봉쇄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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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명감독 르네 클레망이 1966년에 만든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Is Paris Burning)’가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흑백영화다.영화에서는 장폴 벨몽드,커크 더글러스,알랭 들롱 등이 열연한다.

  독일군 파리점령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소장은 히틀러로부터 “파리를 완전히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연합군이 파리로 입성하지 않고 지나치려고 하자 파리에서 활동하는 공산계 레지스탕스는 파리 봉기를 계획한다.공산계 레지스탕스 2만 5000명은,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드골파와 달리 파리에 남아 유격전을 펼쳤다.이 레지스탕스의 주류는 ‘롤 대령’이라는 가명을 쓰는 앙리 탕귀가 이끌었다.레지스탕스는 독일군 사령관 콜티츠의 휴전 제안에도 저항을 계속했다.
  연합군과 함께 참전한 자유프랑스군도 처음에는 드골파와 노선을 달리 했다.연합군 지휘부에게 말만 앞세우는 드골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결국 콜티츠는 자신을 포함한 독일군의 안전보장을 파리 도심의 건재와 맞바꾸는 조건으로 온건 성향인 드골파에게 연락을 취했다.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연합군의 진입을 허용한다는 밀약을 한 것이다.“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는 히틀러의 군사담당비서 요들 장군이 콜티츠에게 파리 파괴 명령을 제대로 이행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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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8월 25일 드골의 알선으로 드골파와 자유프랑스군 소속 2기갑사단 2000명이 파리에 진입했다.공산계는 목숨을 건 오랜 투쟁에도 정치적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내 붕괴되고 만다.드골이 파리 시내에서 금의환향의 행진을 할 때 몇 발의 총성이 울렸으나,키가 큰 그는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의연하게 행진한 것으로 알려졌다.어찌보면 드골은 목숨을 건 이 ‘행진 도박’으로 종전후 프랑스를 통채로 낚아채는 기회를 껴안은 셈이다.이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정치상황과 비슷한 측면이 있어 묘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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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경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