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40. 繼母를 劫奪한 悖倫

鶴山 徐 仁 2007. 3. 31. 00:01
팔만대장경 충선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이는 곧 제二十七대 충숙왕(忠肅王)이다.
 
충숙왕은 충선왕의 둘째 아들로 모후는 몽고여자로 야속진(也速眞)이라 했다.
 
충숙왕은 원래 총명하고 글을 좋아하며 정치적인 수완도 있는 편이었지만 주색을 지나치게 즐기는 나머지 여러 가지 실수를 많이 범했다.
 
이렇게 되자 원나라 조정에 운동해서 충숙왕을 내쫓고 심양왕 고(瀋陽王 暠)를 세우려는 일파가 생기게 되었다.
 
고는 충선왕의 장질(長姪)인데 충선왕은 그를 친아들처럼 사랑했다. 일찍이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공을 세워 심양왕으로 책봉된 일이 있었는데 고려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자 고를 심양왕의 세자로 삼았다가 그 왕위마저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는 충선왕을 배경으로 원나라 조정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충숙왕에게 불평을 품는 고려의 신하들은 모두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권한공(權漢功), 유청신(柳淸臣) 등이었다. 그들은 충숙왕 구년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보내어 충숙왕이 여색에 빠진 나머지 원나라에서 보낸 복국공주(卜國公主)까지 때려 죽인 일이 있다고 참소했다.
 
충숙왕은 복국공주와 사소한 일로 언쟁을 하다가 손찌검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공주는 우연히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은 원나라 조정의 여러 가지 복잡한 분쟁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유청신 등은 다시 원제에 상서해서, 차라리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만들기를 원한다는 매국적인 망동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도 이제현(李齊賢) 등의 반대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심양왕을 옹립하고 암약하는 무리들의 압력은 충숙왕에게 적지 않은 불쾌와 울분을 주었다. 그래서 가장 총애하는 신하 한종유(韓宗愈)를 향해서 "심양왕이 그렇듯 내 자리를 원하다면 차라리 대국에 표를 올려 왕위를 내놓을까 하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한종유는 펄쩍 뛰며 "국가의 왕통은 태조대왕 때부터 큰 허물이 없는 한 적손에게 물려오던 터이온데 어찌 까닭없이 선위하신단 말씀이옵니까?"
 
그리고는 마침내 왕의 뜻을 돌리었다. 그 후부터 왕은 정사에 뜻을 두지 않고 유흥과 사냥만을 일삼다가 이미 세자를 삼은 장자 정(禎)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으니 충숙왕 십육년의 일이었으며 새 왕은 제二十八대 충혜왕(忠惠王)이다.
 
충혜왕은 충숙왕이 가장 사랑하던 왕비 홍씨의 소생인데 홍씨는 바로 지난날 딸을 공녀로 보내는데 반대하고 머리를 깎아 준 일이 있는 홍규의 딸이다. 충혜왕은 부친 충숙왕보다고 더 여색을 좋아하는 음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는 나이 겨우 십육세밖에 아니 되었으므로 정사에는 전혀 뜻이 없고 사냥, 뱃놀이, 격구(擊球) 같은 유희와 여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소식이 원나라 조정에 전해지자 새 임금은 왕위를 계승한지 이년도 못되어 폐출되고 전왕 충숙이 다시 임금 자리에 앉았다(AD 1331).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왕위의 계승이 오직 상전 원나라 조정의 독단과 임금 부자의 알력과 그들을 둘러싼 도당들의 암약으로 이루어지는 슬픈 시대였다. 그러므로 국내 질서는 자연히 문란해지고 인심은 각박해졌으며 도의는 땅에 떨어져 고려의 국운도 바야흐로 몰락 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와같은 쇠운(衰運)은 고려 뿐만이 아니었다. 상전이었던 원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원나라 국정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외정(外征)과 내란으로 민심은 동요되고 국가 재정은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다. 또 제위(帝位)를 계승할 때에는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항상 분쟁을 일으켜 그 틈을 타고 권신들은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고 암약했다.
 
원나라 무종(武宗) 때에는 탈탈(脫脫)이란 권신이 득세하였고 다음 인종(仁宗), 영종(英宗) 때에는 철목질아(鐵木迭兒)가 권세를 잡아 학정으로 백성을 괴롭혔다. 그리고 철목질아의 의자(義子), 철실(鐵失)은 영종을 암살하고 세조(世祖)의 증손인 태정제(泰定帝)를 제위에 올려 앉혔으나, 얼마 후 피살되었으며 제十二대 문종(文宗) 때에는 연첩목아(燕帖木兒)가 황제를 책립할 때 세운 공으로 우승상(右丞相)이 되어 국정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제十五대 순제(順帝) 때에는 백안(伯顔)이 승상이 되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렇게 황제와 권신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암투를 벌이고 국운을 멸망의 길로 몰아 넣은 것은 고려나 원이나 서로 비슷했다.
 
충혜왕은 전에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 승상 연첩목아와 매우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연첩목아의 정적인 백안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폐위를 당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에는 연첩목아가 죽고 백안이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에서도 심한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유흥과 여색을 즐기는 충혜왕은 그러한 형편에서도 근신하는 일 없이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 잠겨 있었다. 이렇게  되니 원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고려로 도로 쫓아보냈다.  충숙왕은 복위한지 팔년째 되던 해(AD 1339)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충혜왕은 원나라 대관들에게 뇌물을 보내어 왕위계승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충혜왕과 사이가 좋지 못한 원나라 승상 백안은 충혜왕의 소청을 황제에게 상주하지 아니하고 전에 왕위를 계승하려다가 실패한 심양왕 고를 세우려고 했다. 이렇게 되니 기회만 엿보고 있던 심양왕의 도당들은 때를 만났다고 들고 일어났다.
 
이런 어수선한 속에서도 충혜왕은 음탕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찍이 충숙왕의 비 복국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원나라에서는 다시 몽고 여자를 공주로 들여 보냈는데 그가 바로 경화공주(慶華公主)였다.
 
경화공주가 충숙왕에게 시집올 때엔 아직 젊은 나이였다. 그러므로 충숙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어여쁜 자색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색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는 충혜왕은 홀몸이 된 경화공주에게 눈독을 들였다. 말하자면 계모를 범하려는 패륜적인 욕심을 품은 것이었다.
 
혹서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팔월 어느날, 충혜왕은 송명리(宋明理) 등 몇몇 심복을 거느리고 영안궁(永安宮) 속 깊이 외로움을 홀로 달래고 있는 경화공주를 찾아갔다.
 
"모후,  얼마나 적적하십니까?"
 
충혜왕은 능청스럽게 이런 인사를 하며 미리 장만해 온 술과 음식을 그 자리에 차려 놓았다.
 
"부왕을 대신해서 오늘부터는 제가 공주를 위로해 드리겠소."
 
심중에 엉큼한 야심을 품고 한 말이었지만 경화공주는 그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였다.
 
"고마우신 말씀이요."
 
무심코 이렇게 치하했다.
 
"자, 그런 뜻에서 한잔 받으십시오."
 
충혜왕은 손수 술을 따라 공주에게  바쳤다. 공주도 왕에게 술을 따랐다. 처음에는 점잖은 술잔이었다. 그러나 몇 잔 술이 오고가자 충혜왕은 차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 취한다. 모후, 여기 잠깐 눕겠는 게 괜찮겠소?"
 
충혜왕은 은근한 눈초리를 보내며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어느새 데리고 온 심복들은 옆방으로 물러간 후였다.
 
공주는 대단히 난처했다. 비록 명분으로는 모자간이지만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이다.  더구나 음행으로 소문이 좋지 않은 왕이기도 하다. 한방에  단둘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름다운 일이 못된다. 공주는 슬며시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자 왕은 거슴츠레한 눈을 뜨고 쳐다보며 "모후, 어디로 가시겠다는 거요? 여기서 이야기나 합시다."
 
그래도 공주는 못들은 체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것을 본 충혜왕, 갑자기 뛰쳐 일어나더니 공주의 옷자락을 잡았다.
 
"모후! 외로운 젊음을 위로해 드리겠다는데 왜 그리 피하려고만 하오?"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 잡아당기더니 한쪽 팔로 공주의 목을 휘어감았다. 
 
이젠 계모를 범하려는 뜻이 완연했다.
 
"이게 무슨 망측한 짓이요?"
 
공주는 소리치며 왕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억센 사나이의 품을 빠져 나가기는 어려웠다.
 
"게, 누구 없느냐?"
 
공주는 마침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온 것은 공주를 모시는 시녀가 아니라 바로 옆방에 물러가 있던 왕의 심복 송명리였다.
 
"공주, 조용하시오. 떠들면 더욱 창피하지 않소?"
 
송명리는 유들유들 웃더니 왕의 난행을 말리기는 고사하고 수건으로 공주의 입을 막고 노끈을 꺼내어 두 팔을 꽁꽁 묶었다. 이렇게 되니 공주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굴욕과 분노 속에 패륜아의 능욕을 당하고야 말았다.
 
일이 끝나자 왕과 송명리들은 신바람이 나서 돌아갔다. 그러나 공주는 분노를 달랠 길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앙갚음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나 한사람의  앙갚음만이 아니라 그런 임금 밑에서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도 쫓아내야 한다.'
 
공주는 이 일을 원나라 조정에 고할 생각으로 그 이튿날 이른 새벽 몰래 시녀를 시켜 말 한필을 사오도록 했다. 그 말을 타고 원나라로 도망치려는 것이다. 
 
그러나 충혜왕도 그 방면엔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다. 공주가 반드시 그런 태도로 나올 것은 예상하고 이엄(李儼), 윤계종(尹繼宗) 등 심복을 시켜 말을 파는 시장을 모두 폐쇄해 버렸다. 
 
그러므로 공주는 말 한필 구하지 못하고 그냥 개경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그래도 끝까지 앙갚음할 뜻을 버리지 않고 은밀히 시녀를 보내어 심양왕파의 안 사람인 조적(曹적)을 영안궁으로 불러들였다.
 
조적은 원래 의흥군(義興郡)의 역리(驛吏)였는데 충렬왕 때 내관을 통해서 조정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차츰 벼슬이 올라 충선왕 때에는 우상시로 승진했으며, 충숙왕 때에는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으며, 충혜왕과 심양왕이 대립하게  되자 심양왕편에 서서 암약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충숙왕이 승하하고 충혜왕이 집권하게 되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병이라 칭학 자기 집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패륜아가 또 어디 있겠소?  그런 자는 한시  바삐 쫓아내고 어진 임금을 세워야 하오."
 
경화공주는 충혜왕에게 능욕당한 일을 낱낱이 이야기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충혜왕을 실각시키고 심양왕을 책립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조적이었다.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영안궁에 백관을 소집한 다음 "그 따위 무도한 사람을 어찌 임금으로 받들겠소?  왕과 그 밑에서 아첨하는 간신들을 몰아내고 나라 일을 바로 잡아야 하오!" 이렇게 외치며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이런 정보에 접하자 충혜왕은 대단히 당황했다. 인승단(印承旦), 전영보(全英甫) 등 이십여기를 거느리고 영안궁으로 향했다. 조적 등을 회유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조적은 궁문을 굳게 닫고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윤계종, 구천우 등을 시켜 조적을  밖으로 불러 내려 했다. 조적은 거기에도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전호군 이안(前護軍李安), 장언(張彦), 오운(吳雲) 등으로 하여금 순군수령관(巡軍首領官)을 삼고 국인(國印)을 거두어 영안궁에 두고, 유연(柳衍), 이달충(李達衷), 김득배(金得培) 등을 시켜 이것을  지키게 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충혜왕은 여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방을 써서 궁문에 붙였다.
 
ㅡ조적 등이 조정에 항거하여 활과 창검을 들고 백성을 두려움 속에 몰아넣고 있으니 그 죄 이보다 더 클수는 없다. 그러나 백관 중에 뉘우치는 자 있어 옳은 길을 택한다면 그 죄를 묻지 않으리라.ㅡ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적일파에 이간책을 쓰기로 했다. 즉 전판서 이조년(李兆年)을 시켜 조적의 편을 든 재상들을 달래 보았다.
 
"조적이 오래 전부터 심양왕의 신복(臣僕)이 되어 은밀히 딴 뜻을 품고 있거늘 제군들은 어찌하여 그 자의 편을 드는 거요?"
 
조적은 그 말을 전해 듣자 즉시 반박했다.
 
"왕의 황음무도한 난행을 보고도 내 정승의 몸으로 못 본 체한다면 바로 크게 죄를 짓는 거요.  왕이 비록 나를 죽이려 한다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겠소."
 
일이 이렇게 되니 두 파의 승패는 무력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조적은 영안궁 문밖에 수레를 늘어놓아 왕당파의 습격에 대비하는  한편 따로 군사 천여명을 소집하여 붉은 헝겊을 옷에 붙여 표적을 삼고 각각 창과 칼을 들게 한 다음 밤 오경에 충혜왕의 궁전을 습격했다.  그러나 충혜왕의 군세는 조적의 군세보다 훨씬 우세했다.  철통같이 대비하고 있다가 반대로 조적의 군사를 에워싸고 무찔렀다.
 
이 전투에 크게 패한 조적은 겨우 몸을 피하여 영안궁 속으로 도망쳤지만 뒤미처 추적한 왕당파의 화살에 맞아 마침내 죽고 말았다.
 
조적의 난을 평정한 충혜왕은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적대관계에 있던 원나라 승상 백안이 실각하게  되니 원나라 조정에서는 심양왕 일파의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이듬해 삼월, 충혜왕을 복위시켰다.
 
두려운 것이 없게 된 왕은 더욱 더 주색과 유흥에 빠졌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치한 생활로 초래되는 국고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으로 백성들을 착취했다.
 
이렇게 되니 강기는 문란할 대로 문란하고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왕을 비난하는 소리는 원나라 조정으로 끊임없이 날아 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왕을 참소한 것은 경화공주였다.
 
이렇게 되니 원나라 조정에서도 더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충혜왕이 복위한지 사년 되던 해(AD 1343) 원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왕을 잡아갔다. 그리고 원나라 황성에서 이만여리나 되는 게양(揭陽)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때까지 그렇듯 호강스런 생활을 하던 왕은 한 사람의 종자도 없이 혼자서 수만리 길을 걸어가게 되었으니 그 괴로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귀양길을 떠난 이듬해 정월,  왕은 악양현(岳陽縣)에 이르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왕이 죽은 까닭은 독한 새를 만나 해를 입은 때문이라고도 하고 귤을 잘못 먹은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짐작컨대 황음과 호강으로 지내던 몸이 갑자기 심한 고생을 한 탓으로 생긴 여독(旅毒)이 그 사인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