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젊고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한 일이야.'
이렇게 생각한 세자는 여러 사람을 놓아 수소문하자 충렬왕이 총애하던 여성들이 독살한 것이라고 고해 바치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고 날뛰던 무비(無比) 등 몇몇 사람을 혹은 죽이기도 하고 혹은 귀양을 보냈다. 별로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 가혹한 처사에는 비난이 자자했다.
특히 그 처사가 충렬왕에게 준 충격은 심했다. 믿고 의지하던 왕비가 죽은 것만도 늙은 왕에겐 큰 타격이었는데 총애하던 여자까지 잃고 나니 만사가 귀찮았다. 충렬왕 이십사년, 왕은 마침내 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나라에 그 일을 보고하는 한편 세자가 즉위하였으니 바로 二十六대 충선왕(忠宣王)이다.
충선왕은 부왕이 어지럽혀 놓은 조정을 바로 잡고 정국을 쇄신한 열의를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관제(官制)를 개편하려 하자 구습에 젖은 권신들은 젊은 왕의 처사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그의 혁신정책에 큰 방해가 된 것은 정비(正妃) 계국공주(界國公主)와 조씨(趙氏)와의 암투였다. 충선왕은 일찍이 서원후 영의 딸, 홍문계(洪文系)의 딸, 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로 맞아 들였는데 충렬왕 이십이년 원나라의 명령으로 원나라 황실 진왕 감마라(晋王甘麻剌)의 딸을 맞아 정비로 삼았다. 이 여인이 바로 계국공주이다.
계국공주 역시 친정인 원나라 조정의 힘을 믿고 안하무인(眼下無人)격으로 굴었다.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물론 만조백관(滿朝百官)과 모든 궁인들은 계국공주를 극진히 받들었으며 그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공주가 하고자 하는 일치고 아니 되는 일이 없을 정도였지만 공주에게는 한 가지 큰 불만이 있었다. 그것은 왕의 사랑을 독점(獨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왕은 원나라에 인질로 가기 전에 맞이한 세 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비들은 거의 다 자기 뜻이 움직여 맞아들인 여인들이었으며 젊은 정을 쏟은 애인들이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계국공주는 원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을 때 강제로 맞아들인 비였으므로 정이 들리가 없었다. 왕은 환국하자 자연히 공주와 멀어지는 한편 다른 비들, 특히 조비를 총애하게 되었다.
조비는 역대공신 조인규의 딸로서 예의범절(禮儀凡節)이 바를 뿐만 아니라 여성다운 점이 충만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친정의 위세를 빌어 왕의 위세를 누르려는 계국공주와는 딴판이었다. 왕은 계국공주로 말미암아 불쾌한 일을 당하면 곧장 조비의 처소로 들어갔다.
"상감, 또 용안이 어두우시군요?"
조비는 이내 왕의 심정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위로했다.
"이 세상에 분하고 원통한 일도 많기는 하지만 큰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처럼 서러운 일은 없구료."
왕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모두 다 소국에 태어난 설움이지요. 너무 심려 마시어요."
"나도 여러 가지로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은 해보았소. 그리고 내 몸에도 원나라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으므로 굳이 원나라를 적대시하고는 싶지 않소. 그러나 공주의 처사를 보면 그만 분통이 터지는 구료."
"사람이 살아가자면 되도록 불쾌한 일은 잊어버리고 즐거운 일만 생각하는 것이 영리한 줄로 아옵니다. 상감께서도 그런 불쾌한 일 잊으시고 즐거운 일을 찾으시어요."
조비는 이렇게 말하며 살며시 왕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 말이 옳소. 친정의 위세를 믿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구는 오랑캐 계집은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왕도 겨우 마음을 돌리고 조비를 가까이 했다.
계국공주는 자기가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자기 자신의 태도에 달렸다고 반성할 줄 몰랐다.
"그래, 내가 가문이 부족한가? 인물이 못났나? 어째서 상감은 나를 멀리하시는 건가?"
공주가 이렇게 투덜거리며 성깔을 부리니까 공주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은 "이를 말씀이옵니까. 상감께서 멀어지시는 것은 공주마마의 허물이 아니오라 모두 조비의 농간인 줄로 아옵니다." 이렇게 충동을 했다.
"참! 상감께선 그년의 처소에만 묻혀 사신다지?"
"글쎄 낮이나 밤이나 틈만 있으시면 조비 처소에 계시지요."
"그년의 어디가 좋아서 상감이 그렇듯 침혹되시었을까?" "뭐, 좋은 데가 있어서 그러하옵니까? 다른 분들의 험담을 잘하니까 상감께서 조비만 옳은 줄로 아시옵죠."
"그년이 험담을 한다? 소국의 벼슬아치 딸이 감히 대국의 공주를 헐어 말한다?"
공주는 분을 못 이겨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디 두고 보자! 내 단단히 본때를 보여 주겠다."
공주가 이렇게 벼르고 있는데 어느날 아침 공주를 모시는 한 시녀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서 "공주마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사와요?"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무슨 일이기에 아침부터 이리 수선을 떠는고?"
공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니까 그 시녀는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지껼였다."
"글쎄 이런 걸 보고도 어찌 가만히 있겠사와요?"
공주가 그 종이를 받아 보니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조인규의 처는 무당을 시켜 끔찍한 짓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공주를 저주하고 왕의 총애가 자기 딸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일이외다. 마땅히 처단함이 가할 줄로 아오.]
공주는 그 글을 보자 새파랗게 질렸다.
"이런 것이 어디 있더냐?"
"바로 궁문에 붙어 있었사와요. 아마 조씨 모녀가 하는 짓을 보다 못해서 어떤 뜻있는 사람이 이런 것을 써 붙인 것으로 아옵니다."
"상감이 조비를 총애하시는 데엔 반드시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바로 이런 짓을 하고 있었구나?"
공주는 분에 못 이겨 바들바들 떨다가 마침내 조인규와 그의 처와 세 아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한편 그 방을 붙인 사람을 수소문해 보았다.
그랬더니 방을 붙인 사람은 바로 사재주부(司宰注簿)로 있는 윤언주(尹彦周)란 자였다. 사재주부란 어산물(魚産物)의 조달과 하천의 교통을 맡아보는 관청의 종칠품되는 하급 관리다. 윤언주는 일찍이 조인규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일이 있어서 그것을 늘 원망해 오다가 공주가 조비를 시기하는 것을 알고 연극을 꾸민 것이다.
즉 그렇게 해서 조씨 일문을 멸망시키면 자기 앙갚음이 될 뿐만 아니라 일이 잘되면 공주의 총애를 받아 단단히 한몫 볼 수도 있다. 이런 계산에서 꾸민 일이었다.
공주는 즉시 윤언주를 불러 추궁해 보았다.
"조비 모녀가 나를 저주했다는 일이 사실인가?"
"예, 사실이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고?"
"저의 집안 사람이 최충소(崔沖紹)의 아내에게서 들은 일이오니 확실하옵니다."
최충소는 바로 조인규의 사위였는데 이때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있었다.
"그렇다면 조인규의 처와 그 딸들이 모두 부동해서 그런 짓을 한 모양이구나. 죽일 년놈들 같으니…"
공주는 마침내 이 일을 원나라 조정에 고하려 했다. 원나라의 힘을 빌어 조씨 일문을 씨도 없이 멸망시키려는 생각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고려 조정은 발끈 뒤집혔다. 이 일이 원나라에 알려지면 바로 왕과 중신들이 공주를 푸대접한 셈이니 어떤 정치적인 말썽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방경을 비롯한 여러 재상들이 원나라에 보고하는 것만은 참아 달라고 공주에게 간청했지만 공주는 듣지 않았다.
"공주마마의 노여움이 풀리시지 않으니 상감께서 만류하시는 길밖에 없을 줄로 아옵니다."
재상들은 충선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거만한 공주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왕으로선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앞일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조씨의 화를 덜어주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다.
왕은 오래간만에 공주의 처소로 찾아갔다.
"공주, 노여움을 푸시오. 그 사람들이 설마 공주를 저주하기기까지야 하겠소."
억지로 고개를 숙이며 청해 보았다. 그러나 한 번 토라진 공주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람! 나를 푸대접한 앙갚음을 단단히 받아야지.'
이렇게 생각한 공주는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원나라 태후에게 그 일을 자기 마음대로 과장해서 보고했다. 태후는 공주를 극진히 총애하던 터였다. 공주의 글을 받아보자 크게 노하여 즉시 사신을 고려로 보냈다.
원나라 사신은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며 조인규와 그의 처와 조비와 최충소 등을 원나라로 끌고 가서 국문케 했다. 아무리 대국의 위세로도 한나라의 왕비와 중신들을 다스리는데 죄상이 분명치 않은 것을 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인규의 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조인규의 처는 늙고 병든 몸이었다. 혹독한 고문을 이겨낼 길 없어 마침내 없는 죄를 자백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원나라 조정에서는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충선왕과 공주까지도 원나라로 불러들인 다음 왕위를 다시 충렬왕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때는 왔다고 날뛰는 무리들이 있었다. 전부터 정국을 쇄신하려는 충선왕의 처사를 못마땅히 여기고 충렬왕에게 붙어서 부자간을 이간해 오던 간신들이 바로 그러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동이 되어 날뛴 것은 오잠(吳潛), 왕유소(王維紹), 송방영(宋邦英) 등이었다.
오잠은 동북현(東北縣) 사람으로 충렬왕 때 등제하여 관직이 승지에 있었다. 충렬왕은 원래 아첨하는 무리들을 가까이 하고 주연과 음률을 즐기는 임금이었다. 오잠은 음률과 여색으로 충렬왕의 비위를 맞추는 한편 충신들을 모해하고 옳은 정치를 해보려는 충선왕을 이간질하는데 온갖 술책을 다 썼다. 그러므로 뜻있는 사람들은 이를 갈고 그를 미워했지만 워낙 충렬왕의 총애가 두터우므로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왕유소 또한 오잠에 못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가 낭장으로 있을 때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왕유소의 처는 홀로 있게 되자 본래 용모가 남달리 어여쁜 여자였으므로 전부터 그것을 탐내고 있던 김려(金呂)라는 환관이 유소가 없는 틈을 타서 그 처와 밀통을 했다.
그러나 충렬왕이 원에서 돌아오자 자기 죄가 드러날 것을 염려한 김려는 재빨리 왕유소의 처를 색을 좋아하는 충렬왕에게 받쳤는데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왕유소는 김려를 불러 단단히 따졌다.
"아니 그래, 남의 처를 겁탈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상감께 바치기까지 한단 말이요?"
그러나 김려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여보, 왕낭장. 그렇게 화를 낼 게 아니라 아마 치사해야 할 거요."
히죽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뭐? 간부에게 치사를 하라? 이 무슨 개뼈다귀 굴러가는 소린가."
"내, 왕낭장이 탁트인 사람으로 알았더니 옹졸하기 이를데 없구료. 잘 생각해 보시오. 상감께서 당신 부인을 가까이 하셨으니 약게만 굴면 당신은 상감의 총애를 받는 권신이 될 수도 있지 않소? 그러니 내게 감사하란 말이 어째 잘못이오?"
왕유소는 계산이 빠른 인간이었다. 김려의 허물을 들어 떠든다면 같은 허물을 저지른 왕까지 함께 공박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왕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입을 뿐이지 소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까짓 헌 계집 하나 가지고 떠들 건 없지. 발판으로 왕의 총애를 받는 게 상책이야.'
이렇게 생각한 그는 껄껄 웃으며 "내가 뭐 정말로 화를 낸 줄 아오? 김공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한 번 던져본 말이지. 좌우간 김공만 믿을 테니 잘 부탁하오."
김려는 왕을 가까이 모시는 환관이었으므로 왕의 총애를 받으려면 그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왕유소는 여러 가지로 김려를 이용하여 왕에게 접근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벼슬이 밀직부사 좌상시(密直副使 左常侍)에 이르고 충렬왕의 총애르 극진히 받게 되었다.
그 후 왕유소는 자기 처남인 송방영과, 그리고 뜻이 같은 오잠과 배짱이 맞아 무엇보다도 방해가 되는 충선왕을 실각시키려고 갖은 술책을 다하고 있었다.
그 후 충선왕은 계국공주의 일로 원나라에 불려갔지만 충렬왕이 워낙 나이가 많으므로 유고시에는 복위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게 되면 오잠 등의 운명은 말이 아닐 것이다.
"그 자를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할 방책은 없을까?"
세 사람은 이마를 마주대고 꾀를 내어 보았다.
"그렇게 하자면 상감(忠烈王)께서 그 사람을 아주 폐하고 다른 사람을 후사로 삼으시도록 하는 수밖에 없지."
"내 생각엔 서흥후 제일 좋을 것 같애. 그사람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거든."
서흥후 전(瑞興候 琠)은 제 이십대 신종의 둘째 아들인 양양공의 현손(玄孫)인데 별로 경륜이 대단할 것은 없지만 용모가 뛰어나게 준수하고 또 일찍이 원나라에 가 있어서 원나라 조정에도 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저 사람이 좋을 뿐 별로 줏대가 없는데다 주색을 좋아하므로 간신들이 이용하기엔 알맞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적자를 젖혀놓고 다른 왕족을 후사로 삼는다면 원나라 조정에서 말썽이 많을 거 아니요?"
"그러니 한 가지 묘책이 있단 말이오."
"어떤 계책이오?"
"공주는 원나라에 가신 후에도 전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모양이니 공주를 서흥후에게 개가시키도록 운동을 한다면 공주를 사랑하는 태후께서 서흥후를 후사로 삼는데 발벗고 나설게 아니오?"
"그렇지만 공주가 말을 들을까?"
"서흥후는 원래 얼굴이 번들하니까 여자들이 잘 따른단 말이요. 공주는 독수공방 적적한 몸인데, 신수 잘나고 다음 왕이 될 수도 있고, 또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에게 재가 시키겠다면 어째서 마다고 하겠소."
이리하여 그들은 곧 계국공주에게 연락해서 그 마음을 떠보니 조비 사건이 있은 후, 더욱 공주는 개가해도 좋다는 뜻을 넌지시 전해왔다. 그러나 간신들의 밀계는 뜻있는 신하들에게 누설되어 격분을 샀다.
"천하 고약한 놈들! 이제는 못할 짓이 없구나!"
이렇게 외치며 누구보다고 분개한 것은 원충갑(元沖甲)이었다.
그는 원래 원주(原州) 사람으로 몸집은 남달리 작지만 지극히 날쌔고 또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그 고장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충렬왕 때 외적이 침입하자 부하 수명을 거느리고 전후 십여 차례 분투해서 적병 육십명의 목을 베고 그밖에 무수한 적병을 쏘아 죽였다. 그 공으로 일약 삼사우윤(三司右尹)이란 벼슬로 특진했다. 이런 인물이었던 만큼 오잠 등의 간악한 행동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나라를 좀먹는 버러지 같은 놈들!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면 내가 처치해야겠다."
원충갑은 번개 같은 눈을 빛내며 이렇게 외치고 평소부터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한 동지 오십여명을 불러 모았다.
괘씸한 생각만으로는 당장에 간신들을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가뜩이나 반목하고 있는 임금 부자간의 사이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며, 혼란한 정국을 더욱 어지럽히는 결과가 될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간신들은 원나라 고관들과도 왕래가 있는 터이므로 그 일을 빙자해서 원나라가 또 어떤 압력을 가해 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원충갑 등은 먼저 단사관(斷事官)으로 고려에와 있는 원나라 한림학사 첩목아불화(帖木兒不花)에게 오잠 등의 죄상을 고소했다.
원충갑이 일어나자 이때껏 오잠 등의 죄를 미워하면서도 그 위세에 눌려 망설이고 있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즉 역대공신 홍자번(洪子藩), 윤만비(尹萬庇) 등이 떼를 지어 첩목아불화를 찾아가 간신들의 죄상을 열거하고 단죄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오잠 등이 많은 뇌물을 써서 이면공작을 한 때문인지 첩목아불화는 오잠 등에게 벌을 주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이렇게 될 바에야 그놈들을 우리 손으로 잡아서 원나라로 보내는 길밖에 없소이다."
원충갑이 이렇게 제의하자 홍자번 등도 거기 찬동하고 삼군을 동원하여 갑자기 왕궁을 포위했다.
그러나 함부로 궁중에 쳐들어가는 것도 왕에게 죄송하고 해서 먼저 오잠 등 간신을 궁궐 밖으로 쫓아내 달라고 왕께 간청해 보았다. 그러나 왕은 원충갑 등의 요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과인이 총애하는 신하를 함부로 잡아가려 하다니 그런 무엄할 데가 어디 있는고?"
왕은 오히려 꾸짖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될 바에는 실력으로 간신들을 무찌를 수밖에 없소."
원충갑이 제언하자 홍자번은 호군 오감량(吳監良)을 시켜 왕의 처소로 들어가서 오잠을 끌어내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원나라로 압송하여 원제의 처벌을 간청하니 원제도 오잠의 죄상을 벌하여 안서(安西) 땅으로 귀양보냈다.
한편 왕유소와 송방영 두 간신은 그때 마침 원나라에 가 있었다. 그리고 원나라 요로에 공작하여 계국공주와 서흥군의 혼사를 성공시키려고 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전왕 충선은 원나라 조정에서 무시 못 할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원나라 무제(武齊)가 등극하는데 다른 대신들과 함께 큰 공을 세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충선은 곧 원제의 허락을 받고 왕유소와 송방영과 서흥후를 잡아 죽이게 했다.
이리하여 충렬왕을 싸고 돌던 간신들은 일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렬왕 삼십사년에 왕이 승하하자 충선왕은 다시 복위하여 정사를 친히 보게 되었다. 충선왕은 원래부터 혁신적인 정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비로 그 방법은 소홀하고 과격한데가 없지 않았지만 볼만한 치적도 적지 않았다.
그때 여러 궁원(宮院)과 사사(寺社)와 권신들은 사사로이 염분(鹽盆=소금을 고는 솥)을 설치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므로 국가 재정에 많은 손해를 초래했다. 이러한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은 소금을 나라에서 전매하도록 하고 각 고을에 의염창(義鹽倉)을 두어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또 선왕 때 제정한 균전제도(均田制度)가 이때와서 점점 문란해져서 국가 수입이 감퇴되고 빈부의 차가 점점 심해 가는 경향이 있자 충선왕은 이러한 경향을 개탄하고 각도 농무사(農務使)에게 영을 내려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정신으로 여러 가지 병폐를 개혁하려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왕은 재위 오년 만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그 이듬해 원나라 서울로 들어갔다. 그것은 왕의 혁신정책을 끝내 반대하는 권신들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정사에 염증을 느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원래 정치보다 문학을 즐기는 성품이었으므로 자유롭고 한가한 생활을 원한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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