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를 서체로 완성해낸 원교 이광사를 찾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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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의 본관은 전주이고 조선왕가에 속한 명문집안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과 함께 권력과 부를 누려온 집안의 후예였다. 1724년 영조 즉위와 1728년 이인좌의 난 등 연이은 사건으로 영조의 즉위를 반대해왔던 소론이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노론이 권력을 차지했다. 이후 소론의 핵심이었던 원교의 가문도 권력을 잃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 이진검은 강진으로, 백부 이진유는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원교의 나이 23세이던 1727년 유배가 풀려 강진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병사하였으며, 26세 되던 해에는 백부가 옥사하였다. 그러나 원교의 한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27세 때는 첫 부인 권씨가 쌍둥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는다. 원교는 벼슬길에 나아갈 꿈을 접고 1755년까지 나이 51세가 되도록 백하 윤순에게 서예를 하곡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배우고 연구하며 세상을 유유자적하였다. 원교 이광사가 이와 같은 삶을 지속하였더라면 아마 동국진체의 완성인 “원교서결”이나 “원교 체”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던가 미완성인 상태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 31년(1755)에 일어난 나주 벽서사건은 영조의 즉위 직후처럼 원교의 삶을 다시 한 번 뿌리째 흔들어 버렸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은 원교가 국문을 받는 사이에 원교가 큰 죄를 지어 극형에 처했다는 풍문을 들은 둘째 부인이 처마에 목을 매어 자결했고 원교는 함경도 부령 땅으로 유배되어 이후 7년여의 세월을 변방의 유형지에서 그의 학문과 인품을 찾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게 된다.
신지도는 완도군 신지면을 구성하는 주 섬으로 완도항 바로 앞바다에 길게 자리하고 있다. 본래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드나들던 섬이었으나 2005년 말 신지대교가 완성되어 이제는 차량과 발걸음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섬의 크기는 30.99제곱미터. 해안선의 길이는 77.40km이다. 완도항 남동쪽 바다 입구 쪽에 코끼리를 뜻하는 상산이 324.1m로 솟아있고 멀리 높이 225m의 노학봉이 마주보고 있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섬으로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기암절벽 등 해안선이 아름답다. 섬의 동쪽 월부리와 가인리 마을 소나무 숲에는 해마다 수백 마리의 왜가리가 찾아들어 둥지를 튼다. 신지도는 본래 고려로부터 조선조 후기까지 강진현에 속하였다가 1896년 완도군 설군으로 완도군에 속하게 되었다. 1522년(중종 17년)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고자 신지 송곡 마을에 “신지 만호진”을 설치하여 1895년까지 군사가 주둔하였다. 송곡 마을에는 지금도 동헌 지, 광장 지, 군기고 지 등 만호진터 유적이 남아있다. 신지도는 항일해방 운동의 성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수많은 이광사, 정약전, 이세보, 지석영의 이상과 학문이 이곳 신지도의 땅과 바다에 그냥 무가치하게 버려졌을 리가 있겠는가! 이들의 이야기는 이 땅 신지도와 인근 섬에 사는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임진왜란에는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해방독립운동의 기수로 나서게 했을 것이다. 원교는 이곳 신지도 금곡리 마을에서 죽을 때까지 유배생활을 했다. 금곡리 마을 경로당 옆에 원교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원래 지붕은 초가로 추정되나 현재 기와 형태의 함석지붕으로 바뀌고 약간의 수리흔적이 말고는 예전 집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원교는 이곳에서 둘째아들 영익과 처음 유배지인 함경도 부령에서 얻은 딸인 주애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금곡마을 집에는 원교의 전설은 아직 남아있으나 원교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작은 집이나 집터 마당에 원교의 큰 꿈을 간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보낸 한 많은 세월을 그냥 잊고 싶었기 때문일까 생각해 본다. 원교는 신지도 금곡마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국진체를 연구하여 완성해나간다. 그 틈틈이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글을 써주고 자신의 한과 동국진체의 의미를 담은 글을 써서 호로박에 담아 금곡 마을 앞 명사십리 바닷 물결에 흘려보냈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중기로 들어서면서 중국의 순수 주자성리학이 조선의 고유 사상이 가미된 조선성리학으로 변화 발전하면서 다른 문화 예술분야처럼 중국의 서체와는 다른 조선의 서체, 선비와 학자 자신만의 서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암 김구(1488~1534) 청송 성수침(1493~1564) 하서 김인후(1510~1560) 퇴계 이황(1501~1570) 우계 성혼(1535~1616) 율곡 이이(1536~1584) 월정 윤근수(1537~1616) 등이 이들이다. 이러한 변화 현상을 “동국진풍(東國眞風)”이라고 한다. 이처럼 동국진풍의 유행에 따라 가장 크게 주목을 받고 성취를 이룬 명필이 봉래 양사언(1517~1584)과 석봉 한호(1543~1605)다. 특히 석봉 한호의 “석봉체”는 이후 조선 후기 서법에까지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석봉체가 한때 조선을 울린 서체로 이름을 날림으로서 조선 선비 사회의 고유한 서체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동기로 작용하였다.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양송체(兩宋體)를 완성하였다. 미수 허목(1595~1682)은 미수체(眉.體)를 완성하였다. 미수 허목에게 서예를 배운 옥동 이서(1662~1723)로부터 동국진체는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나 미수 허목의 독특한 서체가 옥동 이서에게 큰 영향을 주어 비로소 동국진체의 시작을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원교는 신지도에서 동국진체의 완성인“원교서결”전후양편을 지어냈다. 이후 원교가 세상을 떠나고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나타나 조선 서화계에 이름을 높였다. 어느 해인가 추사는 제주도로 가는 귀양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평하여 조선의 글씨를 망친 서체라고 맹비난하고 이를 내리고 자신의 글씨로 현판을 써서 달게 하였다. 그러나 9년 세월이 흐른 후 귀양살이에서 풀려 서울로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린 추사 김정희는 9년 전의 일을 자신의 학문이 불완전한 때의 실수로 인정하고 다시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바꾸어 달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원교의 동국진체 탐구정신은 조선의 그림에까지 영향을 주어“동국진경(東國眞景)”으로 나타나게 되며, 정조에 이르러 조선후기 문예부흥으로 이어진다. 원교의 한과 원념이 서체에 녹아들어 동국진체를 완성하였고 조선 선비사회와 조선왕국의 통치이념에 “우리”를 찾아 세워야 한다는 자각을 이끌어내었다. 지금도 신지도 금곡마을 아래 명사십리 바닷가의 지명이 모래가 운다는 뜻을 가진“울 몰” 즉 “우는 모래”이다. 명사십리 백사장 파도 물결에 따라 모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내는 소리를 “울 몰”이라고 한다. 이처럼 물결에 스치는 모래 소리를 모래의 울음소리로 들었을 원교 이광사의 한과 집념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명사십리 백사장에 오늘도 무심한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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