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권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 허수아비 임금을 세우고 국사를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는 것이 상례인데 최충헌 형제만은 처음엔 달랐다. 명종을 그대로 왕위에 눌러 두었다. 물론 그 것이 갑작스러운 변동으로 민심의 이탈을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지도 일년쯤 지나고 보니 왕을 쫓아내도 큰 소동이 없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래도 충헌 형제는 마음에 꺼리는바가 있었던지 단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왕의 폐립을 고했다.
그랬더니 그날밤 크게 천둥이 울리고 우박이 쏟아지고 모친 광풍이 일어났다. 그로 말미암아 흥국사(興國寺) 남쪽 길에 서 있던 큰 고목이 뿌리째 뽑아지고 그 바람이 다시 옥중(獄中)으로 몰아닥쳐 담과 벽을 모두 무너Em렸다고 한다. 이러한 천변을 보자 최충헌은 약간 겁이 난 모양이었다.
'하늘이 아직 상감을 폐립할 뜻이 없으신 모양인걸.'
이렇게 말하고 더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나 성미가 표독한 충수는 천변 같은 것은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상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왕위에 오른지 이십칠 년이나 되고, 또 몹시 연로해서 국정에 싫증이 난 모양일 뿐 아니라, 여러 소군(小君)들이 항상 싸고 돌며 나라의 정사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이대로 두었다간 나라꼴도 말이 아니고 우리의 신변까지 위태롭게 될 염려가 없지 않소?"
충수가 이렇게 말하자 생질(甥姪)이 되는 박진재도 충수의 말을 거들어 폐립을 주장한다. 두 사람이 하도 주장하니 충헌도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일을 일으켰다. 즉 군사를 풀어 시가 요소에 배치한 다음 정문을 닫고 왕의 측근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그런 다음 추밀부사 유득의(柳得義) 장군, 고안우(高安祐) 대장군, 백부공(白富公) 등 이십 명과 십여 명의 중을 영남으로 귀양 보냈으며 홍기(洪機) 등 소군 십여 명을 외딴섬으로 유배시켰다.
그런 다음 왕을 창낙궁(昌樂宮)에 유폐시키고 태자 도는 강화도로 추방했다. 뒤이어 그들은 평량공 민(平凉公 旼)을 맞아 왕위에 올려놓았다. 이 왕이 바로 제二十대 신종(神宗)이니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명종의 아우이다.
때는 명종 이십칠년 구월이었다.
창낙궁 안에 유페된 왕은 그 후 오년간을 실의와 분통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신종 오년 구월, 이질을 앓아눕게 되었는데 신종은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의원을 보내 약을 올리고자 하는데 누가 좋겠습니까?"
그러나 명종은 "내게 의약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임금노릇도 이십칠 년 동안이나 했고, 나이도 이제 일흔두 살이나 되었는데 더 살아서 무얼 하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일체 의약을 입에 대지 않은 채 신음하다가 그 해 십일월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언동으로 미루어 볼 때 명종이 얼마나 최충헌 일당과 새 임금 신종을 원망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돼서 최충헌 형제는 명실공히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왕의 폐립조차도 마음대로 할 처지에 이르렀지만 아우 충수는 그것만으로는 흡족하지 않았다. 일을 꾸미고 실천에 옮긴 것은 주로 자기 자신이었는데 단지 형이 된다는 점만으로 충헌의 밑에 드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형을 누르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까 곰곰 생각한 끝에 그렇게 하자면 왕실과 결탁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왕실과 결탁하자면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이미는 것이 첩경이다. 그러나 왕은 이미 나이 오십이 훨씬 넘었으니 언제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다.
'그 보다도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의 비로 들이미는 편이 앞 일을 위해서 더 든든하겠구먼.'
충수는 성미 급한 사나이였다. 생각이 나자 참지 못하고 즉시 딸 하나를 불렀다.
"너도 이제 과년했으니 시집을 가야지."
땋은 낯을 붉히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최충수의 딸인데 아무데나 갈 수 있나, 장차 왕후가 될 태자비쯤으로 들어가야지. 어떠냐?"
그 소리에 딸은 펄쩍 뛴다. "태자께서는 벌써 비가 계신데. 첩은 싫어요."
"허허… 그까짓 게 무슨 걱정이냐? 당장 내쫓고 대신 들어앉는 거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아버님?"
"아따! 네 아비가 이 세상에 못하는 일이 있다더냐?"
그 말을 듣자 충수의 딸은 입이 금방 함지박만 해졌다. 태자비가 되는 것이 대단히 기쁜 모양이었다.
딸의 눈치를 살피자 최충수는 즉시 궁궐로 들어갔다.
"폐하, 신이 간청할 일이 있사옵니다."
최충수는 왕을 대하자 우선 이렇게 말을 꺼냈다. 왕도 최충수 앞에서는 맥을 쓰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건방을 떠는 언사에도 불쾌한 빛을 보이지 않고, "무슨 청이요, 최장군?" 부드럽게 물어본다. "다름 아니오라 신에게 과년한 딸이 하나 있사옵니다. 아비의 입으로 말하기는 무엇합니다만 용모도 남에게 떨어지지 않겠고, 마음씨도 나물랄 데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 그러니 짐에게 중매를 들라는 거요?" "아, 아니옵니다."
충수는 당황히 손을 가로저었다.
"쉽게 말하자면 폐하께서 신의 딸을 며느리로 삼아 주십소사 하는 겁니다."
"경의 딸을 며느리로 삼는다?"
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아 주십소사 하는 말씀이옵니다."
그 말에 왕은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묵묵히 충수의 얼굴만 건너다보다가 "태자에게는 이미 비가 있거늘 어찌 또 비를 맞는단 말이요?"했다.
"조금도 어려워하실 것 없사옵니다. 지금의 태자비를 내보내면 되지 않사옵니까?" "태자비를 내보낸다? 아무 허물도 없는데?"
"허물이야 사람인 이상 들추자면 얼마쯤이라도 들출 수 있는 것이옵죠."
여기까지 말하다가 최충수는 독살스러운 눈초리로 왕을 쏘아보며 "그렇지 않으면 폐하, 폐하께선 모처럼의 신의 소청을 물리치려 하시옵니까?" 분명한 협박이었다.
왕은 기가 눌려 말문이 막혔다.
"폐하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건 누구의 힘이죠? 신의 공을 생각하시더라도 그만한 청을 못 들어 주실 처지는 아닐 텐데요. 만일 폐하께서 끝내 신의 청을 물리치신다면 신도 따로 취할 방도가 있사옵니다." 하고는 눈을 부라리고 주먹을 움켜쥔다.
왕은 불쾌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워낙 사나운자이므로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대단히 두려웠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충수의 청을 들어주마고 약속하고 마침내 아무 죄도 없는 태자비를 내보냈다.
충수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당장 딸을 불러 앉혀놓고는 "기뻐해라. 이제 너는 태자비가 되는 거다. 그리고 상감이 승하하면 왕비가 되는 거고 부디 달덩이 같은 아들 하나만 낳아라. 그 애가 장차 왕위를 계승하면 너는 태후가 되고 나는 왕의 외조부가 되는 거지." 이렇게 떠들어 대고는 천금을 아끼지 않고 혼사준비에 바빴다.
충수가 왕을 협박해서 태자비를 몰아내고 자기 딸을 대신 들여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자 형 충헌은 한편 놀라고 한편 분개했다.
'그 놈이 기어코 권세를 독점하려고 그런 짓을 꾀하는구나. 이대로 두었다간 장차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겠는 걸.'
충헌은 즉시 아우의 집으로 달려갔다.
"네가 태자비를 내쫓고 네 딸을 대신 들여보내려 한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사실이냐?"
충헌은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해가면서 동생을 다그쳤다.
"예, 일이 그렇게 됐슴다. 형님께도 기별 드리려 하던 참인데 잘 오셨슴다."
충수는 뱃심 좋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큰 잘못을 저질렀는 걸."
"뭐가 잘못했단 말씀입니까?"
충헌은 뻔뻔스러운 아우의 말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좋은 말로 달래본다.
"이것 보아. 우리가 이의민을 주살하고 정권을 잡은 것은 우리 가문의 영화도 영화지만 나라꼴을 바로 잡겠다는 명분 때문이 아닌가? 백성들이 모두 그렇게 믿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거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상감까지 협박하고 태자비까지 내쫓았다는 걸 알면 우리의 위신은 하루 아침에 땅에 떨어질 거야. 뿐만 아니라 뜻있는 자가 궐기해서 우리 신세가 바로 이의민 일당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나?"
형의 말을 듣자 충수도 약간 누그러졌다. 과연 그 말대로 백성의 신망을 잃고 왕실의 미움을 산다면 결국은 자기 지위를 든든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로운 구덩으로 빠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형님 말씀 잘 알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충수는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듣자 충헌은 겨우 마음이 풀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충헌이 돌아가자 충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진정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충헌을 대할 때엔 그 위세와 변설에 말려서 그 말에 순종할 뜻을 비쳤지만 막상 돌아가고 나니 딸을 태자비로 삼을 야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때 내실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뜩이나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 없었던 충수는 그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냐? 요사스럽게 울음소리를 내는 게?"
그러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높아 가기만 한다. 성미 급한 충수는 내실 방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했다. 목놓아 슬피 우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태자비로 삼으려고 하던 딸이었다.
"난 또 누구라고…"
충수는 멋적은 듯이 중얼거리고 외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형의 꾸짖음을 듣고 혼사를 중단 하려고 한 자기 말을 엿듣고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딸이 측은하기만 했다.
"울 것까지는 없어. 시집갈 데가 꼭 태자 뿐이더냐? 내, 이제 더 좋은 자리를 골라 보내주마."
충수가 이렇게 말하자, 딸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곧장 들었다.
그리고 한참 부친을 쏘아 보더니 "아버님, 제 몸이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물건으로 아시어요?" 하고 쏘아부친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지 뭐예요? 태자비로 삼겠다고 온 세상이 다 알게 소문을 내놓고 나서, 백부님이 한 번 꾸짖으시니까 딴 데로 시집 보내겠다고 하시니, 아버님께선 형님만은 소중하게 아셔도 딸은 헌신짝같이 아시는 게 아니고 뭐예요?"
이렇게 말한 다음 딸은 다시 엎드려 목놓아 운다.
최충수가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한 것은 물론 정략적인 이유가 가장 크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무뚝뚝한대로 딸을 귀여워했던만치 딸에게 영화와 호강을 누리게 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러므로 딸이 이렇게 원망하는 말을 들으니 다시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도대체 그게 틀렸단 말야. 만사를 내 맘대로 처결하지 못하고 형님의 말만 들어서 이러쿵 저러쿵 하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지.'
충수는 한참 들먹이는 딸의 어깨를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인제 고만 울어! 내 마음을 정했다."
딸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정하셨다는 거예요?"
"나두 사내 대장부이니 형님 말만 듣지 않겠단 말야. 내 마음대로 하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를 태자비로 삼고야 말겠다."
"정말이겠죠, 아버님? 그렇지 않으면 전 혀를 깨물고 죽으려고 했어요.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겠어요?"
딸은 이렇게 말하고 어느새 눈물이 마른 얼굴에 상글상글 웃음까지 띠웠다.
"자, 일이 바쁘다. 어서 혼사 준비나 해!"
충수는 다시 집안 식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이 꼴을 보고 화를 낸 것은 충수의 모친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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