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만적(萬積) 등의 노예반란(奴隸叛亂)이 있었으나 그것 역시 무사히 탄압해서 그 무리 백여명을 강물에 던졌다.
그러나 이때부터 충헌의 독재에 대해서 상하의 원성이 자자하게 되자, 충헌은 불의의 습격을 염려하여 문무관, 한량, 군졸들 중에서 용력 있는 자들을 모조리 모아들여 여섯패로 나누고 교대로 자기 집을 지키게 하는데 그 무리들을 도방(都房)이라고 불렀다.
최충헌이 밖에 나갈 때에는 도방의 무리들이 물샐틈없이 호위했는데 그 광경은 마치 싸움터에 나가는 군열(軍列)과 같았다고 한다. 최충헌의 독재정치는 날로 심해졌다. 왕은 이름만이 왕이지 완전한 허수아비였으며 국사는 크고 작고간에 충헌의 뜻대로 좌우되었다.
신종은 원래 충헌의 힘을 입어 왕위에 올랐으나 충헌의 권세가 자기를 누를 지경에 이르자 마음 속으로는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충헌과 맞설 실력은 없었다.
그리고 나이 벌써 육십이 넘은데다 병으로 신음하게까지 되었다.
'허수아비 임금 노릇을 하느니보다 차라리 다 내놓고 마음 편히 물러앉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게끔 되었다. 그래서 신종 칠년 정월, 최충헌이 문병하러 입궐하자 왕은 충헌의 아래 위를 주우욱 훑어보더니 "내 공에게 의논할 말이 있소." 한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내가 이렇게 왕위에 오른 것은 오직 공의 힘이 아니겠소? 그러니 거기 보답하기 위해서도 나라 일을 힘껏 보살펴야 할 텐데 워낙 무능한데다가 늙고 병들었으니 태자에게 전위할까 하오."
듣기에 따라서는 네가 마음대로 정사를 농락하니 나는 있으나마나 마찬가지다, 차리리 깨끗이 물러갈 테니 네 맘대로 해봐라, 이렇게 비꼬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능란한 충헌은 그 뜻을 알아들으면서도 시침 뚝 떼고 말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부디 옥체보중하시길 바랄 뿐이오며 선위하신다는 분부 도저히 따를 수 없사옵니다."
이렇게 그 자리에서는 말해 두었으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 곧바로 최선(崔詵), 기홍수(奇洪壽) 등을 불러 선위에 관한 일을 은밀히 의논했다. 허수아비 같은 임금이 불평을 품기 시작한다면 그대로 두니니보다 차리리 갈아치우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최충헌이 다시 입궐하여 문병을 하자 왕은 선위할 뜻을 밝히므로 충헌은 그제야 못이긴 체 물러나와 태자를 만나고 의향을 떠보았다. 그러나 태자는 울면서 굳이 사양한다. 충헌은 하는 수 없이 왕의 힘을 빌어 태자를 설복하기로 했다. 왕은 마침내 태자를 불렀다.
"짐은 원래 부덕한 몸으로 보위를 잘못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이미 늙고 병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었는데 생각해 보니 태자는 학업을 높이 닦고 인망이 두터우므로 대보를 그대에게 양위하려 하노라."
이 말에 태자가 다시 사양할 뜻을 표하려 하지 충헌은 재빠르게 그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군부(君父)의 분부를 끝까지 사양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억지로 태자를 강안전(康安殿)으로 끌고 가 임금의 옷을 입히고 절을 한 다음 대관전(大觀殿)으로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게 했다. 이렇게 해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 바로 제二十一대 희종(熙宗)이다.
충헌이 이렇게 태자에게 왕위를 넘겨 주는데 힘을 쓴 것은 그럴 만한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늙고 병든 왕이 멀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은 확실한 일이었지만 왕이 죽은 다음에 태자가 대통을 계승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새 왕이 충헌에게 고마워 할 이유가 못된다. 그렇지만 억지로 미리 왕위를 계승하게 한다면 그만치 충헌의 후의를 고맙게 알고 보답하려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희종도 처음에는 충헌의 덕을 고맙게 안 모양이었다. 그러기에 그 후 충헌이 새로 집을 짓고 왕을 초청하자 왕은 몸소 그 초청에 응했으니 예로부터 신하의 집을 왕이 찾아간 일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충헌의 생활은 날로 호사스럽고 방자해 갔다. 입궐할 때에도 예복을 갖추지 않고 평복으로 드나들 정도였으며 자기 집을 지을 적마다 백성의 집을 수백 채씩이나 함부로 헐어버리고 수많은 백성들을 그 부역에 동원했다.
이렇게 되니 원성은 더욱 자자했으나 충헌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는 가차 없이 숙청했으므로 모두들 입을 다물고 그의 허물을 나무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뿐이고 마음 속으로는 그를 원망하고 없애버리려고 벼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왕도 차츰 충헌의 독재와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태도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희종 七년 십이월, 충헌이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가 왕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도 충헌은 물론 여러 종자를 거느리고 들어갔다. 불의의 습격을 경계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충헌이 왕과 만나고 있는 동안 방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종자들에게 한 시신이 나와서 말한다.
"상감께서 특별하신 배려를 하시어 여러분들께 술 한잔 대접하라고 하시니 따라들 오시오."
충헌의 종자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느라고 지루하던 참이라 의심할 여유도 없이 그 시신의 뒤를 따라갔다. 시신은 종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흠뻑 먹였다. 그래서 충헌이 왕의 처소에서 나왔을 때엔 종자들은 술에 흠뻑 취해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중의 복색을 한 괴한 십여 명이 군졸들을 거니리고 나타나더니 말했다.
"역적 최충헌이 이놈! 꼼짝 말고 게 있거라!"
종자들은 크게 놀라 칼을 빼고 응전해 보았지만 워낙 술에 취해서 마음대로 몸을 놀리지들 못하므로 당장에 괴한들의 칼날에 쓰러져 갔다.
충헌은 하는 수 없이 왕이 거처하는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폐하! 신을 구해 주소서. 지금 신의 목숨이 위태롭사옵니다."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충헌을 미워하는 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방문을 안으로 걸어버린다.
이제는 정말 피할 곳이 없다. 충헌은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문득 지주사(知奏事)의 방 장지문 사이가 몸을 감추기에 꼭 알맞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도우심이다!'
충헌은 그 곳에 들어가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충헌이놈! 어디 갔느냐? 역적의 괴수 충헌 이놈, 어디 갔어?"
승복을 한 어느 괴한이 이렇게 외치면서 그 앞을 왔다 갔다 한다.
충헌은 간이 콩알만 했다. 이제는 그만 죽고 마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 괴한은 끝내 충헌을 발견하지 못하고 딴 데로 가버렸다.
그리고 조금 있자 "진강후(晋康候), 어디 계시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진강후란 최충헌의 관작이며 그렇게 외치는 사람은 바로 심복 김약진(金躍珍)이었다. 그제야 충헌이 장지문 사이에서 나오는데 마침 급보를 듣고 신선주(申宣胄), 기윤위(奇允偉) 등 심복이 달려와 승병들과 싸우고, 또 뒤를 이어 도방의 여섯 패들이 몰려들어 괴한들을 물리쳤으므로 충헌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충헌이 위기를 모면하자 충헌의 심복 김약진은 "어르신네께서 이런 화를 당하신 것은 궁중에 고약한 놈들이 많은 때문이니 제가 군사를 끌고 궁중에 들어가 모조리 죽여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날뛴다.
그러나 신중한 충헌은 혈기에 날뛰는 약진을 말리며 말했다. "안 돼. 일이란 그렇게 과격하게 처리해선 못써. 우선 주모자를 색출해서 처단하는 게 상책이지."
그리고는 상장군 정방보(鄭邦輔) 등을 시켜 내시들을 국문하게 했다. 그 결과 주모자는 내시랑중 왕준명(王濬明)이었으며 그밖에 참정 우승경(于承慶), 추밀사 홍적(弘績) 장군 왕후(王珝) 등이 가담했다는 것이 탄로되었다.
충헌은 곧 왕준명을 비롯해서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두 귀양보내는 한편 희종을 폐하고 강화도로 쫓아 보냈다. 그리고 태자는 인천으로 추방했으니 이것은 바로 지난날 위기를 당했을 때 왕이 냉담하게 군 것을 원망한 때문이었다.
희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한남공 정(漢南公ㅡ貞)이었으니 곧 二十二대 강종(康宗)이다.
그는 명종의 장자였는데 일찍이 그의 부친 명종이 최충헌에게 쫓겨날 때 강화도로 추방되었던 태자 도( )가 바로 그 이다. 그 후 희종 육년에 서울에 소환되었고 그 다음 해 정월에 한남공으로 책봉되어 정(貞)이라 개명하였다.
그는 실로 십오년 만에 자기 자리를 도로 찾은 셈인데 이런 왕자(王者)의 인사조차도 모두 신하인 충헌의 손에서 농락된 셈이다.
그러나 모처럼 왕위에 오른 강종(康宗)도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년만인 팔월에 병으로 세상을 따나게 되었다. 그때 나이 육십이세였다.
강종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원자 철(澈)이니 곧 二十三대 고종(高宗)이다.
고종 삼년 팔월, 글안군이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공한 적이 있었다. 이때 충헌은 참지정사 정숙섬(鄭叔贍)을 원수로 삼고 추밀부사 조충(趙沖)을 부원수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맞아 싸우게 했다. 그리고 서울에 사는 신민들은 문무(文武)를 가리지 않고, 직업의 유무를 논하지 않고, 또 비록 승려라 할지라도 징집하여 종군케 했다. 이것이 승려들의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승려들로 구성된 군대는 최충헌을 죽일 생각으로 일부러 적국에게 패배한 것처럼 가장하고 선의문(宣義門)으로 돌아와 소리 외쳤다.
"글안군이 추격하오. 어서 문을 여시오."
그러나 수문장은 그 말을 의심하고 한편으로 충헌에게 급히 보고했다.
그 보고를 접한 충헌은 미리부터 자기 신변을 호위하느라고 남겨둔 군사들을 모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승병들은 마침내 선의문을 부수고 성내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충헌은 다시 한편으로 순검군에게 명령해서 자기 집을 호위하던 군사와 호응하여 승병을 협격하게 했다. 이렇게 되니 승병들은 오히려 당황하여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신창관에 이르러 마침내 섬멸 되었는데, 이때 승병으로서 목숨을 잃은 자가 팔백 명이나 되었으며 그 시체는 거리에 산같이 쌓였고 흘린 피는 내를 이루었다고 한다. 승병의 난의 주모자를 추구해 보니 뜻밖에도 글안군을 막으러 출정했던 원수 정숙섬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최충헌은 즉시 정숙섬을 소환하여 하동(河東)으로 귀양 보내는 한편 자기의 심복인 정방보(鄭邦輔)를 대신 원수로 삼아 출정시켰다.
고종 육년 정월, 조충 등은 때마침 원군으로 당도한 몽고의 합진(哈眞), 자연(子淵) 등과 함께 글안군이 집결한 강동성(江東城)을 포위하자 글안군은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리하여 조충 등은 구국의 영웅이 되어 개선했으나 최충헌은 그 공을 시기하여 응당 있어야할 영접의 예조차도 일부러 중지시켰다. 그리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데도 공이 있는 자들을 물리치고 공은 없지만 자기에게 아첨하던 무리들에게만 후한 상을 베풀었다.
그 해 구월, 충헌은 우연히 병을 얻더니 날로 위중해 갔다. 그의 심복과 가족들은 그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깨닫고 모두들 슬퍼했으나 충헌만은 혼자 태연했다.
"아니, 어째서 이리들 홀짝거리고 있는 거냐? 내가 금방이라도 죽을 줄 알고 그러나? 어림도 없는 소리 말어. 나는 죽지 않는다. 내가 죽을 날은 아직 멀었단 말이다!"
이렇게 소리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것을 보자 그의 아들 이(怡)가 당황히 부축하며 "아버님, 병환이 위중하신데 그렇게 움직이시면 어쩌시렵니까?"하고 근심한다. 그러자 충헌은 이윽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너는 내 걱정 말고 네 몸이나 근심해라. 잘못하다간 나보다 네가 먼저 죽겠다." 이렇게 말한다. 최이는 부친의 말이 하도 이상해서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충헌은 좌우를 둘러보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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