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일단 일이 작정되고 나자 손녀딸의 혼사에 무심할 수도 없어서 마침 큰아들 집에서 찾아오기는 했지만 혼사 준비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형의 충고를 듣고 일단 혼사를 중단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다시 마음이 변해서 부당한 일을 강행하려고 하니 그만 격분하게 된 것이다.
모친은 충수를 불렀다.
"얘, 내 말 좀 들어라."
"무슨 말씀이세요? 한창 바빠서 눈 코 뜰 새 없는데."
충수는 모친이 부르는데도 가까이 가지 않고 먼 발치에서 퉁명스럽게 핀잔만 준다.
"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런다.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라."
모친은 몸소 충수 곁으로 다가가더니 "너는 어째서 그렇게 큰 일을 함부로 하는 거냐?"하고 나무랐다. 그 말을 듣자 불끈하기 쉬운 충수는 당장 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함부로 한다는 거야요?"
"그렇지 뭐냐? 네가 이번 혼사를 서두르다가 형의 말을 듣고 중단하기에 그래도 사람의 도리는 차릴 줄 아는가 싶어 기뻐했는데, 형이 돌아가자마자 다시 이렇게 야단을 떠니 첫째로는 사람의 도리에 어긋난 짓을 어디까지나 밀고 나가려는 그 심보가 괘씸하고 둘째로는 아우로서 형의 옳은 말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단 말이다."
"뭐라구요?"
충수는 씨근거리며 모친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모르시면 가만히 계세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지 않아요?"
"뭐라구? 너는 에미의 말을 고작 암탉이 우는 것에 비유하기냐?" 모친은 치를 떨며 아들에게 다가가더니 삿대질을 하며 다시 뭐라고 꾸짖으려 한다. 그것을 보자 성미 급한 충수는 그만 울화통이 터졌다.
"이 늙은이가 왜 이렇게 극성을 떠는 거야! 저리 가지 못해요?"하더니 모친의 가슴을 와락 떠밀었다.
그 서슬에 노부인은 저만치 나가떨어지더니 뒷통수를 깨고 말았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선 붉은 피가 흐른다.
"아니 네 놈이… 인젠 에미까지 치기냐?"
피를 뿌리며 발악하는 모친을 버려두고 충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사건은 즉시 충헌의 귀에 들어갔다.
"아니, 그 놈이 어머님께 손찌검을 해서 피까지 흘리게 했다구?"
충헌은 발을 구르며 호통을 했다.
"원래, 부모께 불효한 짓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거늘, 그 놈이 감히 어머님께 손찌검을 하는 걸 보니 장차 형에게야 오죽하겠느냐 말이야."
충헌은 분에 못 이겨 한참 씨근거리다가 "오냐! 그 놈은 말로 타일러서 알아들을 놈이 못된다. 그 놈이 끝내 혼사를 강행한다면 내 무리를 끌고 광화문(光化門)에 지켜섰다가 그 놈의 딸이 입궐하지 못하도록 막고야 말겠다."
충헌의 부하중에 간사한 자가 하나 있었다. 그 부하는 충헌의 앞에서는 충헌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충수의 앞에 가서는 충수가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충헌이 광화문에서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말을 듣자 즉시 충수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대로 고해 바쳤다.
그 말을 듣자 충수는 길길이 뛰며 야단이다.
"뭐라구? 형님이 그래 조카딸 혼사에 도움은 못 줄망정 입궐하는 걸 힘으로 막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지."
충수는 곧 자기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너희들, 내 말 똑똑히 듣거라. 세상 천지에 내 행동거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자가 없는 터인데, 다만 형님만이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는 것은 뭐 형님이 잘나서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이다. 결국 부하들의 힘을 믿고 그러는 게지."
그런 다음 부하들에게 술잔을 돌리며 "그러니 말이다. 내 그 형님의 부하놈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작정이다. 너희들은 나를 위해서 힘을 쓰도록 해."
이 말을 듣자 간사한 충헌의 부하는 다시 충헌의 집으로 돌아가서 충수가 하는 말을 고해 바쳤다. "이런 기가 막힐 데가 있나?"
충헌은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까지 흘린다.
"형의 수하들을 없애버리겠다고 하니 그 놈이 결국 형을 없애버리는 거나 마찬가지구나… 부모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놈을 내 아우로 두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충헌은 혼자 한탄하다가 생질되는 박진재를 불러서 의논해 보았다.
"두 분이 다 저에게는 외숙이 되는 분이니 어느 분이 가깝고 어느 분이 멀다고 할 수야 없겠지요. 그렇지만 작은 외숙의 처사를 보면 나라를 망치려는 처사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작은 외숙을 도와서 역적이 되느니보다 큰 외숙을 도와 나라를 구하는 일을 어찌 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같이 있던 김약진(金躍珍), 노석숭 등도 적극적인 협조를 다짐했다. 충헌이 크게 기뻐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은 한시를 다투게 되었다. 충헌은 곧 박진재 등을 시켜 무리를 모아보았다. 장졸 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충헌은 곧 그들을 거느리고 광화문으로 가서 문을 지키던 수문장을 향하여 외쳤다.
"내 아우 충수가 전부터 역적모의를 하더니 내일 아침 난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므로 내 형제의 정의를 끊고 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달려 왔으니 이 뜻을 즉시 상감께 전하도록 하라."
그 말을 듣자 수문장은 대경실색하고 침전으로 달려가서 임금께 고했다. "그렇다면 어서 문을 열고 충헌 장군을 모셔 들이도록 해라."
이리하여 충헌은 군사들을 끌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서 구정(毬庭)에 주둔시켰다. 구정이란 격구(擊毬)를 하는 넓은 마당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사람을 놓아 각처의 장졸들을 소집하니 여러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뒤를 이어 모여들었다.
이튿날 새벽, 미리 군사 천여 명을 모아놓고 충헌의 집을 습격하려고 나선 충수는 충헌이 이미 장졸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충수는 새파랗게 질렸다.
"이젠 다 글렀구나! 형이 선수를 써서 궁중에 대군을 모아 놓았다니 섣불리 일을 일으켰다간 뼈다귀도 못 추리겠다."
충수는 원래 격하기 쉬운 대신 뒤가 무른 성격이라 사태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되자 이내 겁을 먹었다.
"마침 우리 집에 어머님이 계시니 어머님을 앞장 세우고 형님께 항복해서 목숨이나 건져야 겠다."
이런 뻔뻔스런 소리까지 한다. 이 말을 듣자 충수의 심복으로 있던 오숙비(吳叔庇)란 장수가 낯을 붉히며 대들었다.
"사내대장부 한 번 마음을 정했으면 끝까지 관철해야지, 이만일로 굴복해서야 무슨 일을 하시겠소? 그리고 장군께선 노부인을 앞세우고 항복을 하시겠다 하시지만 어젯일을 생각해 보시오? 노부인께 손을 대서 피까지 흘리게 하셨는데 그 분을 앞장세운다고 형님이 용서 하실 줄 아십니까?"
뿐만 아니라 딸까지 오숙비의 말꼬리를 이어 한마디 한다.
"오장군의 말씀이 옳아요. 아버님은 어째서 그렇게 마음이 잘 변하시어요? 한 번 정하신 일이면 죽든 살든 해보실 거지 계집애처럼 이랬다 저랬다 줏대가 없으시면 되겠어요?"
그 말에 불끈하기 쉬운 충수는 그 말에 또 격분한다.
"뭐라구? 내가 계집애처럼 줏대가 없다? 오냐! 내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진격이다! 광화문으로 가는 거야."
충수는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이리하여 충수가 거느리는 장졸들은 광화문을 향해서 진군했지만 그 도중에 장졸들은 흘금흘금 서로 돌아보며 수군거린다.
"이거 안 되겠는걸."
"그러게 말이야. 저편은 벌써 여러 장군들이 군사를 끌고 모여들어서 수만 대군이라는데 그걸 어떻게 당해 내나?"
"괜히 개죽음만 할 뿐이지."
"그리구 후세엔 역적이란 욕을 먹을 거구." "일찌감치 속이나 차리세."
이렇게 장졸들은 수군거리며 하나 둘 꽁무니를 뺀다. 그러자 충수의 군대는 광화문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흥국사(興國寺) 남쪽에 당도했을 때에는 불과 몇 백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판이라, 더욱 전전긍긍하며 전군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현(泥峴)으로부터 일대의 인마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내려온다. 박진재가 거느린 장졸들이었다.
"이크! 나왔구나!"
충수의 군대들은 벌써 겁부터 집어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사현(沙峴)에서 함성이 오르며 김약진이 거느리는 장졸들이 달려 내려오고 다시 골달 언덕에서도 노석숭이 거느리는 장졸들이 달려 내려와 철통같이 에워싼 다음 활을 쏘아대니 충수 등은 어떻게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큰 소리를 하던 오숙비가 먼저 칼을 거두며 꽁무니를 빼려 한다.
'어떻게 이 자리를 피해서 목숨만이라도 보존 해야지.'
충수도 이렇게 말하며 도망칠 길을 찾는다.
그러나 관병은 뒤를 이어 달려들므로 충수와 오숙비는 마지막 힘을 내어 싸우다가 보정문(保定門)에 이르러 겨우 혈로를 뚫고 파평현 금강사(坡平縣 金剛寺)로 도망쳤다.
충수가 싸움에 패해서 도망쳤다는 기별은 곧 그의 딸 최처녀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최충헌의 심복 노석숭 등이 추적 중이라는 말도 겸해서 전해졌다.
'아버지가 나 때문에…'
충수의 딸은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최처녀에게는 충수가 자기를 태자비로 들이밀려고 한 것이 순전히 정략적이라기보다 딸을 호강시키려는 어버이의 사랑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충수가 거사를 망설일 때 심한 말을 한 것이 새삼스러이 뉘우쳐졌다. '나 때문이야! 모두 나 때문이야!'
최처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집을 뛰쳐나갔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 내가 큰 아버님께 애걸한다면, 모든 일이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사정을 한다면, 큰 아버님도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 중얼거리면 최처녀가 거리로 달려나가자 '아가씨, 저도 가겠어요.' 평소에 귀여워하던 몸종 하나가 뒤를 따랐다.
궁궐 같은 저택에서 갖은 호강을 다하며 자라온 최처녀에게 그 길은 결코 편한 길이 못되었다. 십리도 못 가서 발은 부르트고 파평으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에 이르렀을 때에는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친을 생각하는 충정만은 더욱 치열하게 타오를 뿐이었다. 나룻배에 몸을 싣고도 배가 느린 것만이 조바심이 날 뿐이었다. 나룻배가 겨우 강을 건너 저편 강가에 닿았다. 최처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재촉하려고 하는데 저편에서 노석숭 등이 장졸을 거느리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들어오는 것이 눈에 뛰었다.
'저 사람들이 아버님을 쫓아갔을 텐데 어째서 벌써 돌아올까?'
불길한 예감에 떨면서 최처녀는 몸종을 돌아 본다.
"글쎄요. 어르신네께서 무사히 피신하신 때문에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만 됐다면 얼마나 좋겠냐? 그렇지만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그럼 제가 알아볼까요?"
"그래라. 여기서 기다릴 테니 속히 다녀오너라."
몸종은 곧 장졸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만에 되돌아오는데 두 볼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웬일이냐? 어떻게 됐다는 거냐?"
"저… 어르신네께서…"하다가 몸종은 말을 맺지 못하고 최처녀의 손목을 잡고 오열할 뿐이었다. 그것을 보자 최처녀는 이미 일이 글렀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재쳐 물었다.
"어서 말해 봐라. 울기만 하면 알 수가 있느냐?"
"저… 어르신네께서… 돌아가셨대요." "뭐라구… 아버님께서? 뜬 소문이 아니냐?"
"저 사람들이 지금 어르신네의 목을 베어가지고 서울로 가는 중이래요." 그 말을 듣자 최처녀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도 못하더니 "아버님!" 한마디 외치고는 절벽에서 강물로 뛰어내렸다.
깜짝 놀란 몸종이 근처 뱃사람들을 불러 구해 달라고 발을 굴렀지만 뱃사람들이 강에 들어가 처녀를 건져 냈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한 후였다.
형의 손에 목숨을 잃고 그로 말미암아 죄없는 딸까지 죽게 한 피비린내 나는 결말은 바로 충수의 걷잡지 못하는 권세욕이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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