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13. 竹杖의 密書

鶴山 徐 仁 2007. 3. 2. 19:57
팔만대장경강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누구보다도 당황한 것은 김치양이었다.
 
그래서 그를 막을 대책을 강구하느라고 마음을 조리고 있는데  자청해서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선 자가 있었다. 내사주서 위종정(內史主書 魏從正)과 안북도호장서기 최창회(安北都護掌書記 崔昌會)였다.
 
이 두 사람은 원래 부정한 짓을 하다가 탄로되어 좌천된 탓으로  왕을 몹시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왕에 대한 앙심도 풀고 일이 성사된 후엔 김치양에게서 상도 받을 생각으로 이렇게 나선 것이었다.
 
두 사람은 즉시 서울을 떠나 북행하다가 동주 용천역(洞州 龍川驛)에서 강조의 일행과 만났다. 
 
"장군께 여쭐 말씀 있소이다."
 
위, 최 두 사람이 비장에게 청하니 강조는 곧 두 사람을 만나보았다.
 
"장군, 서울로 올라가시는 것은 중지하심이 가할 줄 압니다."
 
위종정이 이렇게 말하자 강조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하지?"
 
"장군의 신변이 심히 위태하실 것 같아서 알려 드리는 것이외다."
 
"내 신변이 위태하다고?"
 
고지식한 강조는 두 사람의 혀 끝에 이내 농락이 되고 말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오."
 
"상감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단 것은 알고 계시겠죠?"
 
"그건 알고 있소."
 
"그런데 상감이 마침내 승하하시고 그 틈을 타서 김치양이 자기의 소생을 왕위에 올려 앉히려고 획책하고 있소이다."
 
"그게 정말이오?"
 
강조는 눈이 휘둥그래 진다.
 
"그러니 장군의 신변이 위험하단 말이올시다."
 
"그건 또 어째서?"
 
우둔한 강조는 입을 딱 벌리고서 고개짓만 한다.
 
"야심만만한 김치양에게 가장 두려운 분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정병을 거느리고 계신 장군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거사를 했다가 장군이 복종하지 않으면 큰일이기에 상감의 밀지를 위조해서 장군을 불러올린 것이외다."
 
그제야 강조는 눈을 꿈벅꿈벅하며 말했다.
 
"이제 알겠군. 내가 무심코 입경하는 도중에 자객을 매복시켰다가 나를 없애버리려는 계책이로군."
 
그러자 간교한 위종정은 손을 휘두르면서 떠들었다.
 
"자객 정도가 아니옵니다. 서울로 들어가는 요소요소에 수만대군이 집결해 장군을 기다리고 있으니 장군께서 아무리 용력이 과인하시더라도 일천여명 장졸로는 도저히 당하지 못하실 것임니다."
 
무서운 계교였다. 단순한 강조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거 참 잘 알려 주었소. 그렇지 않으면 큰일날 뻔했구료.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다?"
 
그러니까 위종정은 다시 말했다.
 
"장군, 이렇게 하시지요. 일단 본영으로 돌아가셔서 생명이나 보존하시고 때를 기다리시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군."
 
이리하여 강조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되돌아갔다.
 
강조가 되돌아갔다는 기별을 듣자 치양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일이 걱정되었다.
 
"만일 그놈이 군사를 더 모아 가지고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하지?"
 
"그때엔 실력으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강조는 세상이 아주 바뀐 줄 알고 주춤하고 있으니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을 굳게 경비해서 사람의 내왕을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놈에게 서울 소식이 못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한 심복이 이렇게 진언하자 치양은 곧 그렇게 조처를 했다. 조정이 한참 어지럽게 되자 서울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 틈을 타서 김치양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시켰다.
 
"상감이 승하하셨다!"
 
"다음 임금은 김치양 어른의 아드님이 되신다나?"
 
"그렇다면 김씨 세상이 되는 셈이군."
 
"그렇고 말고. 왕씨는 이제 다 망해 버렸으니 김씨에게 곱게 보여야지."
 
이러한 유언비어를 믿는 사람 중에 강조의 부친도 있었다. 그러나 강노인은 충직한 인물이었다. 김씨 세상이 되었다고 김치양에게 아첨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태조께서 창업하신 사직을 추잡한 정을 통해서 낳은 김가 놈에게 뺏기다니… 말도 안돼"
 
강노인은 주먹을 휘두르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다가 밀서 한통을 썼다. 
 
- 상감이 승하하신 틈을 타서 간신 김치양이 왕권을 노리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간신들을 소탕하고 사직을 공고히 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그것을 아들에게 보내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서울에 들어오는 관문을 굳게 지키고  사람들의 왕래를 금하고 있으니 무슨 방법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밀서를 아들에게 전할 것인가. 곰곰 생각한 끝에 자기가 항상 집고 다니는 죽장(竹杖)속에 밀서를 돌돌 말아 넣고 진흙으로 봉했다. 
 
그리고는 가장 신임하는 하인 하나를 불렀다.
 
"너는 나를 위해서, 아니 나라를 위해서, 어려운 일을 해야겠다."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마는, 나으리댁에서 잔뼈가 굵고 극진한 은총을 입은 몸이오니 나으리의 분부시라면 못할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강노인은 하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조금도 꾸밈없이 지성이 가득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하인은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 앉아라."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강노인은 갑자기 품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새로 갈아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였다. 강노인은 그 비수를 하인의 목줄기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으냐?"
 
"나으리께서 하시는 일이신데 어찌 두렵겠습니까?"
 
"그만하면 됐다!"
 
강노인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네 머리를 깎겠다. 괜찮으냐?"
 
"처분대로 하십시오."
 
그 당시의 사람에겐 머리털은 남녀를 막론하고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은 선선히 고개를 내밀었다.
 
"고맙다."
 
한마디 하고 강노인은 하인의 머리를 그 비수로 빡빡 깎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하인의 사명을 일러 주었다.
 
"너는 이제부터 중의 행색을 하고 서울을 빠져나가 이 밀서를 내 아들에게 전해 다오. 그리고 누가 묻거든 묘향산 중이라고 말해라."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하인은 즉시 중의 행색을 하고 곧 집을 나섰다.
 
서울을 빠져 나가는 관문에 이르러, 과연 듣던바와 같이 행인의 감시가 심했다. 관문을 지키던 한 병졸이 강씨네 하인을 보더니 "어디로 가는 길이요?" 하고 막아선다.
 
"소승은 묘향산 중인데 잠시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외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하인은 제법 중의 태를 내며 태연히 말했다. 
 
"어떠한 사람을 막론하고 서울을 빠져 나가려면 몸 수색을 단단히 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스님 언짢아 마오다."
 
병졸은 하인을 진짜 중으로 알았던지 말만은 공손했지만 그 태도는 조금도 녹록치 않았다.
 
"나라에서 하시는 일인데 어찌 마다 하겠소이까? 자 법대로 하시오."
 
병졸은 하인의 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바랑이나 옷 속은 말할 것도 없고, 신까지 벗겨서 뒤져볼 판이었다.
 
'만일에 죽장 속에 넣은 밀서가 탄로된다면?'
 
자기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상전인 강씨 부자에게도 어떤  화가 미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뒤지고 난 병졸은 이번에는 죽장을 잡아 보았다. 하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병졸은 죽장을 손에 들고 무게를 달아본다. 그 속에 이상한 것이 들어 있으면 무게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겠지만 종이 한 장쯤으로는 무게가 다를 리 없었다.
 
마침내 병졸은 하인에게 죽장을 도로 내주었다.
 
"좋소이다. 어서 가시오."

그제야 하인이 마음을 놓고 보니 어느새 등골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러한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는 겨우 강조가 있는 진영에 당도했다. 강조는 낯익은 하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네가 여길 어쩐 일이냐?"
 
하인은 잠자코 밀서를 내보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피를 토했다. 먼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때문에 기진맥진한 모양이었다. 
 
밀서를 읽고 나자 강조의 두 눈은 무섭게 빛났다.
 
"간신을 소탕하고 사직을 공고히 한다? 상감이 이미 승하하셨으니 치양 일파만 소탕 한다면?"
 
그렇게 되면 나라의 일은 자기 마음대로 좌우 될 것이라 여겨졌다.
 
'문무백관은 모두 내 앞에 꿇어 엎드릴 것이며 임금도 내 마음대로 세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강조는 서울로 가다가 돌아온 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오천 대군을 모아두었다. 
 
그러므로 치양 일당과 정면으로 충돌하더라도 이제는 승산이 넉넉했다.
 
"때는 왔소. 서울로 곧 진격해야겠소."
 
우선 부사령관격인 도순검부사 이현운(都巡檢副使李鉉雲)에게 자기 뜻을 밝혔다. 
 
이현운은 무인이라기보다 눈치 빠르고 약삭빠른 소인이었다. 그러므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자기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글안주가 사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을 때 이현운은 강조와 더불어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때 재삼 항복하라고 권고하는 글안의 말을 강조는 끝내 물리 쳤지만 이현운만이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우러러 보게 되었으니 어찌 옛 산천을 생각만 하겠습니까?(兩眼己瞻新日月 一心何億舊山川)"라는 말로 적왕(敵王)에게 아첨하는 말을 한 인간이었다.
 
이런 인간이었으므로 이 기회를 타서 단단히 한 몫 보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장군의 말씀, 지당한 줄로 아오. 즉시 입경하여 간신을 몰아내고 공을 세웁시다."
 
이리하여 강조는 이현운 이하 여러 부장들과 정병 오천을 거느리고 위풍당당 서울로 진격했다.
 
강조의 군대가 황해도 평주(平州)땅에 이르렀을 때, 뜻하지 않은 정보를 입수했다. 아무래도 서울의 형세가 궁금해서 미리 보낸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를 한 것이다.
 
"상감께서 승하하셨다는 소문은 헛소문이옵니다. 김치양 일당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상감께서도 아직 궁중에 건재하심이 사실이옵니다."
 
이 보고를 받자 강조는 한편으로는 크게 놀라고, 한편으로는 크게 낙담했다. 우둔하면서도 엉뚱한 야심을 품고 있던 강조는 왕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으니 어찌해야 좋을는지 알 수 없었다.
 
'상감이 승하하셨단 말을 들었기에 치양 일당을 소탕하고 국권을 잡아볼 생각이었는데,  그 상감이 살아 계시다니 치양 일당을 소탕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야. 상감이 살아 계시니 다른 임금을 세울 수도 없고 그렇게  되면 내 마음대로 국권을 좌우할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강조는 좀처럼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왕이 신혈사로 황보유의 등을 보내어 대량원군을 맞아들여 선위하려고 한다는 것을 강조는 미처 몰랐다. 또 왕이 자기를 부른 것은 치양의 역모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왕이 살아 있는 한 자기가 국권을 좌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승산이 넉넉하게 대군을 거느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치양 일당을 소탕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평주서 서울까지는 하룻길도 못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진격한다면 마침내는 왕과 맞서게 되어 역적의 누명을 쓸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진격할 것이냐? 군사를 돌려 물러갈 것이냐?'
 
강조는 머리를 얼싸안고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강조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야심만만한 이현운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장군!  무엇을 망설이시오? 대장부가 한 번 뜻을 정했으면 끝까지 관철할 일이지 일을 당할 때마다 뜻을 굽히면 어찌하겠소?"
 
"그렇지만 상감이 살아 계시다니 치양 일당을 소탕한들 우리 뜻을 펼 수 없지 않겠소?"
 
"그러니 답답하시단 말씀이요. 상감이 방해가 된다면 폐립(廢立)하면 되지 않소? 원래 조정이 어지럽게 된 것도 상감이 너무 나약한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터이외다."
 
"상감을 폐립한다?"
 
강조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새 임금으로 누구를 모실까?"
 
이현운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강조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대량원군이 가장 적합한 분으로 압니다."
 
"대량원군? 음 그분은 태조대왕의 손이 되시는 분이니 대통을 계승하시기에 부족할 게 없지. 그런데 그분이 지금 어디 계시지?"
 
"삼각산 신혈사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 분을 모셔 들이는 것이 급한 일이요. 누구를 보내서 모셔 들이면 될까?"
 
"서경분사감찰(西京分司監察)로 있는 김응인(金應仁)이 가장 믿을 만하니 그를 보내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강조는 김응인에게 군사를 주어 신혈사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