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양 일당을 소탕하고 대량원군을 새 임금으로 세우려는 목적은 왕이나 강조나 매한가지였지만, 왕의 진의를 모르는 강조는 오직 왕의 존재가 국권을 좌우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이 같은 처사를 취하게 된 것이다.
강조가 좀 더 침착한 인물이었다면 왕의 뜻을 확인한 후에 일을 처리했겠지만 워낙 우락부락한 성미에다 살기에 찬 부하들의 선동도 있고 해서 과격한 행동을 취하기에 이른 것이다. 때는 목종 십이년 이월 무자(戊子), 강조는 먼저 궁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청했다. "일을 처리하자면 전하께서 우선 용흥 귀법사(龍興 歸法寺)로 나오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강조의 청을 받은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불러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마 그 자가 딴 뜻을 품은 게 아닐지 모르겠사옵니다."
곁에 있던 최항이 말했다.
"딴 뜻을 품었다? 그렇다면 강조를 불러들인 것이 큰 잘못이었군."
왕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고? 강조의 말대로 귀법사로 가야 할 것인가?"
"좀 더 기다리며 사태가 돌아가는 걸 관망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지금 궁궐을 나가면 살기등등한 장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사옵니다."
그래서 왕은 불안한 가슴을 안고 궁궐 안에 머물러 있었다. 왕이 궁궐을 나오지 않으니 성미 급한 강조는 더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대군을 거느리고 궁궐로 진격했다.
때마침 하늘빛은 붉은 말을 친 것 같아 불길한 징조가 완연한 속에 강조가 거느리는 군사들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더니 겁이 많은 왕은 안절부절 못했다. "전하! 일이 아무래도 그른 모양이옵니다. 속히 이곳을 피하도록 하십시오."
곁에 모시고 있던 최항이 마침내 이렇게 권했다.
"이곳을 피한다고 갈 곳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요?"
"우선 법왕사로 피신하셨다가 대책을 강구하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 피해서 되겠소? 모후께서도 아직 궁중에 계신데 같이 피신해야 될 게 아니요?"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왕은 어머니를 염려하였다.
"태후께서도 피신하시도록 조처하겠사오니 어서 폐하께서 먼저 이곳을 뜨십시오."
"아니요. 모후께서 무사히 피신하시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아야 하겠소."
최항과 채충순 등은 급히 궁녀를 보내어 태후를 모셔오게 했다. 그제야 왕은 태후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선인문(宣仁門)을 지나 궁궐을 빠져 나갔다. 궁궐 밖에는 마침 말 몇 필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선 왕과 태후가 먼저 타고, 최항, 채충순 그밖의 시신들이 뒤를 따랐다.
왕과 태후의 일행은 다행이도 강조의 군사들에게 들키는 일도 없이 무사히 법왕사에 당도하여 숨을 돌렸다.
정병 오천이 입경하니 김치양 일당은 적수가 아니었다. 이권(利權)을 탐내어 모여든 무리라 대군을 대하자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뿔뿔이 도망쳐 버렸다.
이에 강조는 김치양 유행간 등 중심 인물 일곱명을 잡어 죽이고 나머지 무리 삼십여 명은 먼 섬으로 귀향을 보냈다. 그리고 대량원군이 입경하기만 기다리며 궁궐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동안 강조가 거느리고 들어온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궁녀들을 범하는 등 갖은 만행을 다 저질렀다.
뜻있는 신하들이 이것을 못마땅히 여기어 누차 충고도 해보았지만 장졸들의 지지로 국권을 좌우해야 할 강조로서는 그들의 반감을 살 아무런 조처도 취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저 보면서 못 보는 체할 뿐이었다.
한편 왕의 밀지를 받고 대량원군을 모시러 간 황보유의와 문연 등이 신혈사에 당도하자 처음에 그 절 노승은 딱 잡아 떼었다.
"그런 분은 이 절에 계시지 않습니다."
김치양 일파가 또 대량원군을 해치려고 자객을 보낸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의심 마시오. 상감께서 보내신 사람이외다. 자, 이걸 보시오."
황보유의는 이렇게 말하면서 왕의 밀서를 내보였다.
그제야 노승도 의심을 풀고 지하실에 숨어 있는 대량원군을 모시고 나왔다. 바로 이때였다. 산문이 떠들썩하더니 일대의 군마가 달려 들어왔다.
"큰일났구나! 김치양이 눈치를 채고 저렇게 사람을 보낸 모양이다."
대량원군은 겁에 질렸고, 문연 등은 군교를 모아 창검을 뽑아들고 대량원군을 호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새로 달려온 장졸들은 말할 것도 없이 강조의 명을 받고 대량원군을 모시러 온 김응인 일행이었다.
"모두들 그 자리에 멈추오! 이분이 누구시라고 이렇게 무엄하게 가까이 오는 거요?"
황보유의가 이렇게 호통을 쳐보았다.
그러니까 김응인이 말에서 뛰어내려 대량원군 앞에 부복하더니 말했다. "강조 장군의 명을 받들어 이렇게 모시러 왔사옵니다. 서경부사 감찰 김응인이옵니다."
황보유의도 왕이 강조에게 밀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므로 강조가 보낸 사람이라면 자기네와 목적이 같을 것이다. 두패는 마침내 합세하여 대량원군을 모시고 서울로 갔다.
왕이 법왕사로 피신하자 황보유의 김응인등은 대량원군을 모시고 궁궐로 들어갔다. 강조는 곧 대량원군을 영접하여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케 하였으니 그가 곧 제八대 현종(顯宗)이다.
현종이 즉위하자 국권이 강조의 손에서 놀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강조는 곧 전왕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으로 삼았으나 아직도 전왕아게 충성을 바치는 최항, 채충순 등의 세력이 두려웠다.
그러나 두드러진 죄목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함부로 죽일 수도 없고 해서 법왕사로 사람을 보내어 우선 최항을 회유할 공작을 벌였다.
최항은 목종을 모시는 신하들 중에 가장 관직이 높을 뿐만 아니라 가장 유능한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를 자기편에 끌어들인다면 다른 신하들도 저절로 따를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최항을 찾아온 사람은 법당 뒤 으슥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말을 전했다.
"강장군의 말씀이, 지난일은 묻지 말고 함께 일하자고 하십니다."
그 말에 최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 최공께서도 원래 새 임금을 모시자고 일을 꾸미시던 분이고 강장군을 입경하게 하시는데에 도움도 많으셨으니 말하자면 모든 일이 최공의 뜻대로 된 셈인데, 새 임금을 받드시기를 어째서 주저하시느냐 하시더군요."
이제는 강조도 지난 경위를 다 알게 되었음으로 이런 말을 전한 것이었다. 그제야 최항은 겨우 입을 열였다.
"그렇지만 전왕의 신변이 너무나 적적하시니 어찌 떠날 수 있겠소?"
이때였다.
"최원사, 내 염려는 너무 하지 마오."하면서 목종이 불쑥 나타났다.
그 근처를 산책하다가 강조가 보낸 사람의 말을 엿들었던 것이다. "요즈음 모든 재앙과 변란은 오직 내가 부덕하고 소홀했던 탓으로 일어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소? 나는 장차 시골로 내려가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자 하니 경은 이 뜻을 신왕에게 알리고 앞으로는 신왕을 보필하여 사직의 안태를 도모하도록 하오."
비록 조용한 말씨였으나 피를 토하듯 비통한 말이었다. 최항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리다가 마침내 강조가 보낸 사람을 따라 궁중으로 향했다.
이에 강조는 왕에게 상주하여 최항에게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라는 관직을 주게 했다. 좌산기상시는 정삼품의 벼슬로 중추원사보다는 한층 낮은 벼슬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직책도 간관(諫官)이라는 일종의 한직이었다.
결국 강조는 이때까지도 최항의 진의를 알 수가 없어서 요직을 맡기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후 현종은 최항의 사람됨과 능력을 사랑하여 계속 벼슬을 올려 주어 현종 삼년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 및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삼았으며, 칠년에는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 平章事), 십일년에는 충신(忠臣)의 호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한편 시골로 내려가서 여생을 마치겠다는 전왕의 말을 전해 들은 강조는 '그것 마침 잘 됐군. 그러지 않아도 그 분이 서울 가까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시끄럽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즉시 목종과 태후를 충청도 충주(忠州)로 내려가게 했다.
목종 모자의 낙향길은 참으로 비참했다. 곁에서 모시는 시신 하나 없이 겨우 얻은 말 한필에 태후를 태우고, 목종 자신은 그 고삐를 잡고 걷는 형편이었다.
이런 형편에서도 목종의 효성은 지극했으며 태후의 교만한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 전하는 얘기로는 길을 가다가 끼니때가 되면 목종이 친히 주막에 들어가 밥상을 차려가지고 바치면 태후는 말을 탄 채 넙죽넙죽 받아 먹었다고 한다.
목종의 비극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적성현(積城縣)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말을 달려 쫓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단 목종 모자를 앞질러 가다가 돌아서더니 길을 막았다.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남의 길을 막는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느냐?"
목종이 꾸짖자 그중에 한 자가 나서며 "알다 뿐이옵니까? 한분은 얼마 전까지 상감으로 계시던 양국공이시며, 한분은 모후되시는 헌애태후이심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듯 무엄한 짓을 하는고?"
"강장군의 명으로 이렇듯 따라오느라고 죽을 고생을 다 했으니 그 노고나 치사해 주시오. 저는 상약직장 김광보(尙藥直長 金光甫)라 하오."
유들유들 말하는 품이 조롱에 가까웠다. 그러나 목종은 그 말을 노하기에 앞서서 강조의 명령이라는 말에 겁이 더럭 났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강조는 나에게서 더 바랄 것이 있다더냐?"
겨우 이렇게 물었다.
"먼 길을 가시느라고 고생이 되실 터이니 이 약을 잡수시고 옥체를 보중하시랍니다." 하면서 약그릇을 내밀었다.
"강조가 일부러 보약을 보냈다? 믿을 수 없는 소린 걸…"
목종은 약 그릇을 받아들고 냄새를 맡아 보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이것은 보약이 아니라 사약이로구나."
"무슨 약이든지 어서 드시오."
그자들은 이렇게 소리치더니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휘휘 돌렸다. 약을 먹지 않으면 그 칼로 목을 베겠다는 위협이었다.
"오냐, 먹자. 이왕 죽어야 할 목숨이라면 피라도 흘리지 말고 죽어가자."
목종은 태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님, 소자는 스스로 뿌린 씨를 거두기 위해서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하겠습니다만 어머님은 부디 옥체 보중하시어 오래도록 수를 누리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약사발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목종의 나이 삼십, 재위한지 십이년 만이었다.
이때 태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하니 그 가슴 속에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후 황주(黃州) 땅에서 이십일년 동안이나 더 살고 육십육세까지 수를 누렸다고 하니 모든 재앙의 장본인으로서는 지독히 모진 목숨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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