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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15. 契丹族의 侵掠과 뚝심의 康兆

鶴山 徐 仁 2007. 3. 2. 19:59
팔만대장경새로 등극한 현종은, 자기가 대통을 계승하는데 가장 공이 큰 강조를 중대사(中臺使)로 삼았다.
 
중대사는 중대성의 최고 책임자로서 왕명의 전달, 궁궐의 호위, 군사에 관한 모든 일을 장악하는 직책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정을 좌우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직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은 이름뿐이고 나라 일은 모두 강조의 손을 거쳐 요리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전왕을 죽이고도 새 임금 앞에서는 자살이라 가장했으며, 능호(陵號)를 공릉(恭陵), 시호를 선령(宣靈), 묘호를 민종(愍宗)이라 칭하게 한 것도 강조가 다 제멋대로 처리한 일이었다. 
 
그러하여 뜻있는 신하들은 강조의 독재를 은근히 미워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일로 그는 집권한 바로 그 이듬해에 몰락하게 되고 말았다.
 
현종 원년(AD 1010), 상서좌사랑중 하공진(尙書左司郞中 河拱辰)과 화주방어랑중 유종(和州防禦郞中 柳宗) 등이 왕명도 없이 공을 서둘러 군사를 일으키어 동여진(東女眞)을 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공진 등은 오히려 여진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여진 사람에게 잔뜩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여진 사람 구십오명이 내속하러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렀다. 
 
이 것을 보자 하공진과 유종은 이를 갈았다. 
 
특히 성미 급한 유종은 "네놈들 때문에 저번에는 내 부하들이 많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니 네놈들을 죽여 부하들의 원수를 갚아야 하겠다."하고는 여진 사람 구십오명을 모조리 참살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여진족들은 펄펄 뛰었다. 당장에라도 군사를 몰아 고려땅을 치고 원수를 갚고 싶었으나 여진의 군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북방대륙을 호령하고 있던 글안주[契丹族]를 찾아가서 호소했다.
 
"고려의 강조는 임금을 죽이고 국권을 함부로 행사할  뿐 아니라 이웃나라까지 괴롭히니 징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안주 성종은 그러지 않아도 핑계만 있으면 고려를 쳐서 굴복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진족이 호소하는 말을 듣자 좋은 기회라고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함부로 군사를 낼 수도 없고 해서 급사중 양병(給事中 梁炳)과 대장군 나율윤(那律允)을 파견하여 전왕을 쫓아내게 된 경위를 따졌다.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즉시 내사시랑평장사 진유(內史侍郞平長事 陳有)와 직중대상서우승 윤여(直中臺尙書右丞 尹餘)를 보내어 폐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트집을 잡아 고려를 침공하고자 하는 글안주는 그러한 변명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이에 고려측에서도 글안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때 이미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있던 강조의 강경한 주장으로 글안과의 군사적 충돌을 맞게 되었다.
 
즉 강조는 스스로 행영도통사검교상서가 되어 안소광(安紹光), 최현민(崔賢敏), 이방(李昉), 박충숙(朴忠淑), 최사위(崔士威)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삼십만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지금의 宣川)로 가서 적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해 겨울 십일월, 글안주 성종은 친히 정병 사십만을 거느리고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했다.
 
한편 강조는 휘하 장졸을 거느리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강을 격하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 서쪽에 진을 쳤는데 그 곳은 세 줄기 강물이 합치는 곳이었으며 강조 자신은 바로 이 부대를 지휘했다. 다른 한 부대는 통주 근처 산중에 매복시키고, 또 한 부대는 성을 지키게 했다.
 
이때 강조는 검차(劍車)라는 진기한 무기를 만들어 냈는데 글안군이 공격해 오면 칼날이 수레처럼 돌아서 한 걸음도 적을 접근시키지 않으므로 적병은 여러 차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안의 오랑캐들, 제법 강한 줄 알았더니 허수아비 같은 것들이구먼."
 
강조는 마침내 자만하여 적을 몹시 깔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중에서 주연을 베풀고 음률을 탄주하며 질탕하게 놀기만 했다. 
 
이 정보를 접하자 글안주 성종은 선봉 야율분노(耶律盆奴)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케하여 으슥한 밤에 통주성을 기습시켜 마침내 점거했다.
 
통주성을 수비하고 있던 장수는 대경실색하여 강조의 진중으로 달려와서 글아군의 침공을 보고했다.
 
그러나 잔뜩 거만해진 강조는 그 말을 곧이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장군은 그만 일에 그토록 놀라서야 어찌 대군을 거느린단 말이오?"
 
오히려 꾸짖고는 술상에 놓인 고기 한점을 집어 입에 넣더니 말했다.
 
"싸움터의 적병이란 것은 마치 입 속에 든 음식과 같은 거요. 적으면 못쓰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단 말이오."
 
취기가 몽롱한 강조는 이렇게 큰소리만 치며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데 이번에는 그 진중에 있던 한 장수가 급히 달려 들어와서 보고한다.
 
"장군 큰일났습니다. 적병이 바로 우리 진영까지 돌파했습니다."
 
그 장수가 보고를 하기 바쁘게 적군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그 소리를 듣자 강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나 칼을 뽑아들고 장졸을 독려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칼을 떨구고 와들와들 떨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취기로 몽롱한 그의 눈에 자기가 죽인 목종의 환상이 떠오른 것이었다.
 
"대역무도한 강조야! 너도 이제 죽을 날이 왔다. 어찌 천벌을 면할소냐?"
 
목종의 환상은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강조는 비록 목종을 죽이게 했으나 항상 거기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움을 받아오던 중에 취기와 놀라움이 한데 겹쳐서 그런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강조는 투구를 벗어 던지더니 목종 환상 앞에 꿇어 엎드렸다.
 
"전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는데 마침 장막 안으로 글안의 병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실성한 사람처럼 엎드려 외치고 있는 강조를 보자 즉시 달려들어 그를 결박해 가지고 성종에게로 끌고 갔다. 
 
성종은 비록 강조의 죄를 들어 고려를 침공하기는 했으나 강조 그 사람을 미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 호방한 인품과 뛰어난 무술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의 결박을 풀어 주고 좋은 말로 달래보았다.
 
"여봐라. 대국의 군주는 소국과는 달라서 도량이 넓은 법이다. 내 너의 재주를 아끼어 차마 죽일 수 없으니 오늘부터는 나의 휘하에 들어 충성을 다할 생각은 없느냐?"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고, 산 짐승은 산에서 살아야 하오. 내 이미 고려 땅에 태어났으니 고려 땅에서 살다 죽을 것이지 어찌 남의 나라에 가서 남의 임금을 섬기겠소?"하고는 끝끝내 항복하기를 거부했으므로 성종은 마침내 그를 죽여 버렸다.
 
고려사에는 강조를 역적으로 몰고 있다. 
 
사실 그가 목종에게 행한 태도에는 도의적인 지탄을 받을 만한 점도 없지 않지만 김치양의 난을 평정하고 외적의 침공에 꿋꿋이 대항한 점만은 사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