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질 리우 카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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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기 위해 일하나, 일하기 위해 노나?’ 이런 자문을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 혹은 밤 늦게까지 업무에 허덕이는 직장인들에게는 일이 인생의 전부처럼 비칠 때가 있다.
브라질에서 가장 큰 문화 차이를 느낀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인생철학은 분명해 보인다. ‘일은 놀기 위해 필요한 만큼 하는 것이다.’
이런 심증은 며칠 전 카니발을 겪으면서 확실히 굳어졌다. 금욕기간인 사순절에 앞서 한바탕 즐기는 ‘카니발’은 브라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남미 국가는 물론 유럽 각국도 나름의 축제를 즐긴다. 하지만 이곳만큼 ‘삶의 중심’이 카니발인 듯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브라질을 두고 ‘카니발의 나라’라 칭한 것은 이 나라 문호 조르제 아마두(Amado·1912~2001)였다. 그 뒤로 이 명칭이 갖는 뉘앙스는 대개 부정적이었다. 그 바닥에 깔린 것은 ‘내일 일은 생각 않고 오늘 즐거움에만 탐닉한다’는 훈계적 시각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하다 보면 울화통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식당이든 은행이든 일처리 속도가 이보다 느릴 수가 없다. 직원은 고객의 안달에도 아랑곳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이 나라 경제성장이 더딘 것은 정부나 제도 이전에 ‘근로 문화의 부재(不在)’ 때문이란 진단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번 카니발의 전후를 지켜보면서 이들 나름의 ‘장점’을 사게 됐다. 무엇보다 브라질의 카니발을 그저 반라(半裸)의 무희가 삼바춤을 추는 ‘광란의 축제’ 정도로 생각한 것은 오해였다. 남녀노소 주민 전체가 합세한 공동의 기획이었고 함께 즐기는 놀이마당이었다. 사실 카니발은 당일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프랑스인들이 1년의 절반을 다음 휴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내고, 나머지 반을 지난 휴가를 추억하며 보낸다’는 말이 있지만, ‘브라질 사람들이 1년 내내 카니발을 위해 산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준비 과정부터가 각 지역 삼바스쿨을 통해 주민의 일상과 밀착돼 있었다. 행사 당일에도 대열 속 참가자 모두가 주인공이 된 듯한 표정이었고 ‘내 존재 이유는 이것’이란 듯한 몸짓이었다. 관객들도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신나 했다.
‘상업화’ 우려는 올해도 어김없이 들렸다. 하지만 카니발의 희열은 값비싼 장내 행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시내 곳곳에서 별도의 축제가 열렸고 동네마다 자신들만의 잔치가 있었다.
‘그렇게 놀 궁리만 하니 일의 능률이 오를 리 없다’는 핀잔도 가능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놀이가 수익을 낳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지상 최대의 쇼’ 리우 카니발은 이미 세계적인 고수익 엔터테인먼트화했다. 빈민촌에서 출발한 삼바스쿨들은 이제 자신들이 ‘꿈의 공장’이라 부르는 작업실들을 한자리에 모아 ‘삼바 시티’를 건립하고선, 연중 관광코스로 개방한다. 그들의 ‘노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올해도 카니발 기간에만 70만 이상이 이 도시를 찾았다.
이제 2007년 리우 축제는 끝났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니 브라질식으로 말하면 이들은 2008년 카니발을 위해 다시 일터로 돌아간 것이다.
‘놀 줄 아는’ 국민과 ‘일할 줄 아는’ 국민,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한때 서구가 아시아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의 오류를 범한 것처럼 우리가 브라질의 ‘노는 문화’에 대해 일면적인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전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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