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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백제 궁중비사] 7. 海東曾子의 變貌

鶴山 徐 仁 2007. 2. 15. 09:58
금동미륵반가사유상무왕의 뒤를 이은 이는 제三十대 의자왕(義慈王)이니 이는 곧 백제 최후의 임금이다.
 
의자왕은 무왕의 원자로서 뜻이 웅대하고 성품이 대담할 뿐 아니라,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그러기에 즉위 초에는 외교(外交)·내치(內治)에 힘을 기울인 흔적이 많다.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는 사신을 당에 파견해서 외교적인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二월에는 주군(州郡)을 순무하고 억울하게 형을 받은 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그 해 七월에는 선왕 때부터의 숙망인 신라 침공을 시작했으니 이 때 미후성 등 四十여 성을 함락시키는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 달인 八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파견해서 군사 一만으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陜川)을 공격하고 성주 품석(品釋) 등의 목을 잘라 신라 서울로 보내는 한편 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五년경부터는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백제군의 예봉이 차츰 꺾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밖으로는 숙적인 신라가 김춘추와 같은 명신의 외교적 활동으로 당에 원조를 청하고 김유신 같은 명장이 군사력의 강화를 꾀하여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성장한 데 비하여 안으로 는 거듭된 승전에 자만한 왕이 사치를 일삼게 된 때문이다.
 
이 무렵 양국간의 교전 상태를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하는 것만 보아도 그런 전세의 추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五년 五월 왕은 당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당이 고구려를 치게 된다면 신라를 도울 여력은 없을 것이다. 이 틈을 타서 한숨에 신라를 뭉개버릴 생각을 한 왕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칠성(七城)을 공취하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라군은 강력히 항전했다. 특히 장군 김유신의 뛰어난 용병술은 오히려 백제의 대군을 어지럽힐 지경이었다. 
 
七년 十월에는 장군 의직(義直)을 시켜 군사 三천으로 신라의 무산성(茂山城)으로 진격케하고 다시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 동금성(桐芩城) 등을 공격케 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김유신은 결사적으로 싸워 역습하므로 의직은 필마로 겨우 도망해 올 정도였다.
 
그 이듬해인 三월, 의직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 변경 요차성(腰車城)등 十여 성을 공취하고 四월에는 옥문곡(玉門谷)으로 진격했으나 역시 김유신의 역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왕은 신라 침공을 단념하지 않았다.
 
九년 八월, 좌장 은상(左將殷相)에게 정병 七천을 주어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취케 했는데 이 때 역시 김유신 등의 역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백제가 신라와 싸울 때 항상 교전의 상대가 된 장수는 김유신이었다.
 
그러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이 백제 측에 전해진 것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