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백제 궁중비사] 9. 肉林 속의 忠言

鶴山 徐 仁 2007. 2. 15. 10:01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와 같이 군사력으로도 나날이 신라에 뒤져갈 뿐 아니라 외교상으로도 당을 중심으로 해서 신라와 겨룰 때마다 백제측은 불리한 입장에 빠지기만 했다.
 
의자왕 十一년, 왕은 사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한 일이 있는데 이때 당 고종은 사신을 통해서 의자왕에게 글을 보냈다.
 
<해동의 三국이 건국한 후 땅을 접하고 이웃삼아 온지도 오래이거늘 근자에 와서 틈이 벌어지고 싸움이 잦아 삼한의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무기를 쌓고 평안한 날이 거의 없으니 짐은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땅의 이치를 따져 볼 때 심히 민망할 따름이로다. 지난 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아울러 입조하였을 때 짐은 서로 수원(讐怨)을 풀도록 명하고 다시 화목하도록 말한 일이 있느니라. 그때 신라사신 김법민(金法敏)은 “고구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며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므로 대성(大城)과 중진(重鎭)이 거의 백제에 점거되고 강토는 날로 줄어들어 국력이 자못 쇠퇴하니 부디 백제에 명하시여 공취한 성지를 돌려 주게 하실것이며 만약 소명을 받들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켜 탈환해 주시기 바라오나 이는 오직 옛땅을 찾겠다는 뜻이올 뿐 당장에라도 교화(交和)할 의향은 넉넉히 지니고 있나이다.”이렇게 말하였거니와 짐은 그 말이 이치에 맞으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느니라. 옛적 제환열사제후(齊桓列士諸侯)는 망국(亡國)에도 상존하였거늘 하물며 짐은 만국(萬國)의 주(主)로서 어찌 위태로운 번국(蕃國)을 다스리지 아니 하리오? 그런즉 백제왕은 일찍이 점거한바 있는 신라의 성지를 마땅히 신라에게 돌려줄 것이며 신라는 또한 전투로 포로한 백제의 군민(軍民)을 그 왕에게 돌리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환란과 분쟁은 일소되고 군비의 확충은 그칠 것이며 삼국의 전란이 가라앉아 백성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뫼를 쌓는 것 같은 불행은 옛말이 되리로다. 왕이 만약 이 말을 순종치 않는다면 짐은 이미 신라 김법민이 요청한 바에 의하여 그들의 뜻에 맡겨 정당한 결전을 감행토록 하리라. 또 고구려가 짐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즉시 글단(契丹)과 제번(諸藩)에게 명하여 요수(遼水)를 건너 침공케 할 것인즉 백제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복된 길을 구하는 옳은 계책을 강구하여 뉘우침이 없도록 할지어다.>
 
당 고종의 유시는 삼국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서 한 말 같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지나치게 신라편을 들은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대당 외교에 있어서도 신라에게 쓴 잔을 마신 셈이었다.
 
당이 신라 편을 드는 것이 확실해지자 왕은 그 이상 당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지 十五년 八월, 고구려 말갈과 합세하여 신라의 三十여 성을 공취했다.
 
이렇게 되니 새로 신라왕이 된 김춘추(武烈王)는 즉시 당에 사신을 보내어 여제(麗濟) 양국의 응징을 호소했다. 그러자 당 고종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 소정방(蘇正方)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우선 고구려를 공격케 했다.
 
그리하여 정명진 등은 요수를 건너 고구려 군사 천여 명을 참살하고 돌아갔는데 동맹국이 이러한 난을 당하는데도 의자왕의 생활태도는 유흥과 사치에만 젖어 있었다.
 
十五년 二월에는 태자궁을 수리하였는데 사치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왕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궁녀들과 더불어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다. 왕이 이렇게 나라일을 돌보지 않게 되자 간사한 무리들은 그 비위를 맞추며 감돌았지만 여러 신하들 중에 강직한 충신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十六년 三월, 좌평 벼슬에 있던 성충(成忠)은 왕의 행동을 보다 못해서 심하게 간한 일이 있었다.
 
“대왕, 일찍이 해동증자란 칭송을 받던 대왕께서 오늘 이게 무슨 일이시옵니까? 밖으로는 당과 신라가 우리의 사직을 송두리째 쓰러뜨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사오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오랜 전란과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져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국가존망지추에 군주(君主)되시는 분은 마땅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이셔야 할 것이온 데 간사한 무리를 가까이 하시고 술과 여색에 침혹하시니 어찌 통탄치 않겠습니까?”
 
성충의 말을 듣자 왕은 펄펄 뛰며 노했다.
 
“이놈! 네가 감히 누구에게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자기의 약점을 여지없이 찔린 왕은 스스로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도 성충과 같은 존재는 큰 장애물이었다.
 
그는 즉시 성충이 왕에게 불경한 언동을 농했다는 죄를 씌우고 옥에 가두어 버렸다.
 
성충이 옥에 갇히자 그 후부터는 왕의 난행을 간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한편 옥에 갇힌 성충은 나라의 앞일을 심려한 나머지 울홧병이 되었다. 그래서 날로 몸이 쇠약하여 마침내 죽게 되었는데 숨이 넘어갈 때에도 그는 나라의 일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붓을 들어 왕에게 글을 올렸다.
 
<예로부터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고 죽겠사옵니다. 신이 저으기 내외의 형세를 살펴본 즉 몇 해 가지 않아 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사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당과 신라의 군사가 우리 강토를 침공할 것이옵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유리한 곳에 처해야 하오며 강물을 의지할 때에는 상류에 처하여 적세를 눌러야 가히 승리를 기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우리 강토를 침범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육로(陸路)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오며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錦江下流)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하옵니다. 그리고 그 험난한 곳에서 방어하다가 적세가 누그러진 다음에 치는 것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그러나 충신의 피를 토하는 듯한 마지막 호소도 유흥에 들뜬 왕의 마음에는 한낱 귀찮은 잔소리에 불과했다.
 
“주제넘은 것이 저 혼자 아는 체하는 군.”
 
왕은 입맛을 다시고 그 글발을 던져 버렸다.
 
그 후에도 왕은 유흥과 음락을 일삼고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운이 날로 기울어지자 우선 나라 안에 가지가지 괴상한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