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김유신의 신라군은 승승장구하여 백제왕성을 향해 진군하다가 작성(鵲城) 근처에서 잠시 군사를 머물게 하고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서쪽으로부터 큰 까치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진영 위를 돌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아니 이게 웬일일까? 까치가 울면 불길하다는데…”
신라의 여러 장수들은 불길(?)한 예감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있던 김유신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에 찼던 장검을 뽑아 그 까치를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여봐라! 네가 어떠한 요물이기에 감히 우리 진영에 날아와서 이렇듯 수선을 피우는고?”
유신이 말을 마치기 바쁘게 그 까치는 거꾸로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달려가서 잡으려 하니까 한 번 재주를 넘더니 그 까치는 허물을 벗고 한 미인으로 변했다.
여러 장수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었으나 김유신만이 홀로 태연자약했다.
“너는 어떠한 곡절이 있기에 젊은 여자의 몸으로 이렇듯 내 진중에 날아왔는고?”점잖게 물으니까, 그 미녀는 한 번 간드러지게 웃고 나서“신라 장군 김유신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비록 적국이긴 하지만 그 나라의 공주가 몸소 찾아왔거늘 자리도 베풀어줄 줄 모르는고?”하고 나무랐다. 그 미녀는 바로 백제 의자왕의 딸 계선공주(桂仙公主)였던 것이다.
계선공주는 그 당시 절세의 가인으로 백제, 신라, 고구려에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병법에 통달한 점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특히 공주는 신기한 병기를 발명해 내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용병기라는 것은 지금의 전차(戰車)와 같이 아무리 강한 적군 속이라도 마음대로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기에 의자왕은 어느 장군보다도 공주의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자, 왕은 누구보다도 먼저 공주에게 그 대책을 문의 했다.
“그런 일이라면 조금도 염려할 것은 없을 것으로 아옵니다.”
공주는 애련한 외모와는 딴판으로 대담한 소리를 한다.
“아니 염려할 게 없다니? 신하에서 으뜸가는 용장 김유신이 쳐들어온다는데 어찌 염려하지 않겠는고?”
“김유신이 제아무리 날래더라도 저에게는 자용병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적진에 잠입해서 적의 군세를 살핀 다음 자용병기로 섬멸해 버릴 것이오니 조금도 염려 마시어요.” 이렇게 호언장담한 다음 역시 발명품의 하나인 인조 까치를 타고(굳이 현대적인 해석을 한다면 일종의 글라이더를 타고) 신라 진중에 날아온 것이었다. 계선공주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엄청난 자기의 재주를 과시하면 제아무리 용감한 김유신이라도 크게 놀라고 두려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공주의 얘기를 듣자 김유신은 껄껄 웃었다.
“그런 것을 바로 여자의 좁은 소견이라 하는 것이요. 나라의 운명을 거는 큰 전투가 그런 조그만 재주로 좌우된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일 줄 아오. 자, 공주의 소원대로 우리 진영을 샅샅이 보여 드릴 것이니 마음대로 구경하시고 공주가 자랑하는 자용병기라는 것으로 격파할 수 있다면 격파해 보시오.“
김유신은 공주를 데리고 진중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숨김 없이 모두 구경시켰다. 그런 다음 공손히 진영 밖으로 전송했다. 신라 진영밖에 나온 공주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었다.
예로부터 기병(奇兵)은 정병(正兵)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때까지는 자기가 발명한 신무기로 기습을 가하면 어떠한 대적이라도 능히 무찌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정도(正道)로써 훈련되고 당당한 진세를 베푼 신라군의 진법을 보니 자용병기쯤으로 도저히 격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주를 낙담시킨 것은 신라군의 진세만은 아니었다. 신라군을 거느리는 김유신의 태도에도 심한 패배감을 느꼈다. 얼마나 자신이 만만하면 적의 첩자에게 그렇듯 군사기밀을 낱낱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놀랄 뿐이었다. 백제 조정에 설치는 사나이치고 그렇듯 늠름하고 당당한 대장부는 없었다.
공주는 역시 연약한 여인이었다. 신라군세의 힘과 김유신의 장략(將略)에 위압된 때문이라면 그렇듯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주가 절망에 빠진 것은 어느덧 자기 마음에 싹튼 김유신에 대한 사모의 정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자기는 백제의 공주, 상대편은 숙적의 장군 이런 절망에 부닥쳤을 때 직선적인 여자의 마음이 취할 길은 단 한 길뿐이다. 공주는 다시 인조 까치를 몸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백제 왕성을 향해 날아가다가 오봉산(五峯山) 기슭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거꾸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것을 바라본 백제 사람들은 신라군을 격파하는데 절망해서 힘을 잃었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라고 수근거렸지만 실은 이룰 수 없는 모정(慕情)을 달랠 길 없어 스스로 추락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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