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백제 궁중비사] 6. 백가의 亂

鶴山 徐 仁 2007. 2. 15. 09:56
금동미륵반가사유상삼근왕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왕자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문주왕의 아우 곤지(昆支)의 아들 모대(牟大)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으니 제二十三대 동성왕(東城王)이다.
 
새 임금은 담력이 크고 활을 잘 쏘는 강한 임금이었다. 문주왕이나 삼근왕과는 달리 군사나 외교나 내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해구를 토벌하는데 크게 공로를 세운 진로를 병관좌평겸 지내외병마사(兵官佐平兼 知內外兵馬事)를 삼아 강력한 보필을 삼는 한편 왕 자신도 국정 전반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그 당시 백제에게 큰 위협이 된 것은 여전히 고구려였으므로 왕은 북으로 대륙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는 한편, 남녘의 강국 신라와도 수교를 하고 남북으로부터 고구려를 협공하는 정책을 취했다.
 
특히 신라와의 국교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어 혼사를 정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략결혼(政略結婚)에도 손을 쓴 것이다.
 
신라의 소지왕은 거기 응하여 이찬 비지(伊湌 比智)의 딸을 왕에게 시집을 보내니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공고히 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국사에 정력을 기울이던 왕도 나라 형편이 차차 안정되어 가자 그 강력한 성격은 자만심으로 변해 갔다.
 
二十一년 여름, 심한 가물로 백성들은 굶주려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었고 가을에는 나쁜 병이 돌아 죽어 쓰러지는 자가 거리에 즐비했지만 왕은 그런 것은 돌보지 않고 유흥과 사치만 일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봄엔 지나해의 흉작으로 백성들은 생계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데 왕은 궁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이라는 거창한 전각을 신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둥의 높이가 다섯길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전각이었으며 정원에는 큰 연못을 파고 전국 각처에서 이상한 새들과 짐승들을 잡아다가 기르게 했다.
 
왕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자 나라의 앞일을 염려하는 충신들이 간혹 간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충신들이 간하면 왕은 아무런 대꾸도 아니 할 뿐 아니라 그 후부터 더 간하는 자가 있을까 해서 궁문을 닫아버리고 웬만한 사람은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동성왕이 이렇게 사치를 일삼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게 되자 나라 안은 자연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흉흉해지더니 二十三년 정월에는 왕성 안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글쎄, 그럴 수가 있나? 이때까지 멀쩡하던 노파가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돼서 도망했다는군."
 
"여보게 그 뿐인가? 어제는 남산에서 큰 호랑이 둘이 하루 종일 싸웠는데 어찌나 사납던지 아무도 감히 잡으려고 하니 못했다는군."
 
"이런 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나면 나라에 큰 변이 생긴다는데 또 난리나 나지 않을는지."
 
"누가 아니래나? 임금이라는 게 저만 호강하려구 백성들 생각은 도무지 않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백제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이웃나라 신라에서는 그 기회를 타서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국경지대에 모으고 있었다.
 
아무리 사치를 좋아하는 왕이지만 이웃나라의 침공을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 해 七월 왕은 탄현(炭峴)에 책(柵)을 설비하고 신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八월에는 다시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0加)에게 그 곳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백가는 왕의 총애를 깊이 받아오던 총신이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가림성 같은 외지고 위험한 곳에 좌천된 것이 불만스러웠다. 백가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가림성으로 부임하지 않고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노했다. 즉시 백가를 불러들여 호되게 꾸짖었다.
 
"너는 오늘날까지 내가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나 거역하는 일 없이 고분고분 순종하기에 남달리 사랑하여 왔는데 이번에 명령한 일은 어찌하여 듣지 않고 꾸물거리느냐?"
 
그러나 백가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외지고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내 아무리 너를 아껴왔지만, 그렇게 내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장차 네 목숨을 참할 줄 알아라."
 
왕으로서는 백가에게 위엄을 보이느라고 한 말이었지만 백가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두려워했다. 자기에게 한 번도 거친 말을 던진 적이 없는 왕이 죽이겠다는 말을 한 것을 보니 필경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나를 사랑해 주어야 왕이지, 나를 미워한다면 원수일 뿐이다. 어디 두고 보자."
 
왕에게 두려움과 앙심을 품은 백가는 왕의 시중을 드는 궁녀를 매수해서 왕을 독살시키고 말았다.
 
동성왕 二十三년 十二월의 일이었다. 동성왕이 갑자기 암살 당하자, 그의 둘째 아들 사마(斯摩)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으니, 제二十四대 무녕왕(武寧王)이다.
 
무녕왕은 키가 후리후리해서 八척이나 되며 용모가 그림과 같고 성품이 인자해서 모든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왕은 어진 반면에, 악한 자는 버려두지 않는 단호한 데도 있었다.
 
동성왕을 암살시킨 백가는 시침 뚝 떼고 새 임금 밑에서 권세를 부리려고 했다. 그러나 왕은 무엇보다도 먼저 선왕의 사인을 규명한 끝에 암살의 장본인이 백가라는 것을 캐내었다.  그래서 즉시 백가를 잡아들이려 하니까 눈치 빠른 백가는 왕성을 탈출하여 가림성으로 도망쳤다. 일찍이 자기가 부인할 것을 거부했던 바로 그 성에 백가는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다.
 
왕은 즉시 병마를 거느리고 백가 토벌의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우두성(牛頭城=春川)에 이르러 해명(解明)이란 장수에게 공격을 명하니, 백가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성밖에 나와 항복했다.
 
"신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마는 특별히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분골쇄신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여생을 바치겠습니다."
 
백가는 이런 뻔뻔스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임금이 아니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해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예로부터 정해진 법이다."
 
이렇게 말하고 백가의 목을 베어 남쪽으로 가지고 가서 백강(白江=白馬江)에 던져 버렸다.
 
이 무렵의 백제 왕들은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진 때문인지 비명횡사를 하지 않으면 단명하여 일찍 세상을 뜨는 일이 많았다.
 
즉, 무녕왕이 재위 二十三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제二十五대 성왕(聖王)이 그 뒤를 이어 十六년에는 서울을 사비(泗沘=扶餘)로 옮겼으나 三十二년 七월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二十六대 위덕왕(威德王)은 四十五년간이나 무난히 왕위를 지켰지만 그 뒤를 이은 二十七대 혜왕(惠王)은 재위 二년 만에 세상을 뜨고, 그 다음 왕인 제二十八대 법왕(法王) 역시 즉위한 지 二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