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건 발생후 두 차례에 걸친 탐문항행을 실시하였고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위하여 조선원정
계획을 두 차례 세웠다가 그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1871년(고종 8년) 조선을 개항하기 위하여 아시아 함대사령관인 로저스가 함대를 이끌고 1230명
의 병력으로 일본의 나가사기를 출발 조선원정길에 나섰다.이때 로저스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와 함께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로 협상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아래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광성돈대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 숙종5년(1679년)에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한 곳이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자 미군에 의하여 초지진 덕진진(지금의 강화도에 있슴)이 점령당하고 이어서
광성보 전투가 이어졌다. 한 시간에 걸친 전투로 광성보는 함락되었고 조선군 전사 350명 부상 20명
미군 전사 3명 부상 10명이 발생하였다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광성보의 방어임무를 띤 중군 어재연장군이 요세를 더욱 공고히 하자 미군은 광성보를 초토화
시키는 작전을 폈으며 여기에 끝까지 항전한 어재연장군은 이곳에서수 많은 병사와 더불어
전사하였다.
신미순의총
이곳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리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
군관 사졸 51인의 전사자를 7기의 분묘에 합장하였다.
손돌목 돈대와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한 광성 포대
용두돈대
이 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요새로서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되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
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다.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을 이기지 못하고 조선 개항을 단념 함대를 철수시킨다.
그러나 대원군은 미국함대의 철수가 미국이 패하여 돌아간 것으로 간주하고 더욱 문을 굳게 닫게된다.
점령당한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체들
신미양요 기간중 조선군과 미해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은 광성보였다. 특히 손돌목돈대는
조선군이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손돌목 돈대의 외부 모습
미해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무너진 성벽과 파게된 포자. 힘 없이 내려진 깃발 즐비한 조선군 전사자의
모습
용두돈대의 원경
1871년 6월 1일 미군 탐측선을 향해 최초로 포격을 시작한 돈대.
그당시의 사진과 복원된 용두돈대의 지금 모습과 비교해 보았다.
洋夷 侵犯 非戰측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을 새기고 척화비를 전국 곳곳에 세웠던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흔히 통상수교거부정책이라 하는바 한 마디로 서양과의 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이다.
이로서 조선의 자주성은 들어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로인해 근대화의 지연으로 일제강점기를 맞는 등
우리민족이 그 후에 겪은 그 많은 크고 작은 고난과 비극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 것인지?
흐르는 물은 우리나라의 지난 날과 앞날을 알 것만 같겄만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이 없다.
다만 오늘도 유유히 흐를 뿐이다.
그리고 또 작금의 우리 정치 지도자의 반미는 대원군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닥칠 그 후유증을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지? 옛날의 격전지를 돌아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한 없이 무겁기만하다.
DIVANO /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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