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몽고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궁궐을 새로 지었다. 고려의 이름을 따 고려궁지라 불리게 되었다.
고려궁지는 강화읍 관청리 송악산 중턱에 위치한다. 사적 제 133호로 지정(1964. 6.10)되어 있으며 현재 관리면적은 2,279평에 이른다. 고려는 고종 19년(1232) 6월,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지세가 험한 강화로 옮겼다. 고종 19년(1232년)부터 원종 11년(1270년)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던 궁궐터로서 여러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비록 천도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당시 궁궐의 풍모는 사뭇 송도의 그것을 방불케 하였다. 이때 불교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을 조성하였고, 금속활자도 발달되어 있었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그후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고려궁지는 그 모양이 많이 변화였다.
고려사절요에는 최우가 이령군을 동원, 각 도의 민정을 징발하여 궁궐과 관청 건물을 세우기 시작해서 고종 21년(1234)에 완성하였다고 되어있다. 본궁인 연경궁을 비롯하여 14개의 작은 궁궐 건물들이 만들어졌다. 충렬왕이 장경도량을 베푼 강안전, 왕실의 사당인 대관전등이 있었고, 대신들과 왕실의 각 의정과 행정 및 의료, 군사를 담당했던 여정궁이 있었다. 또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과 궁의 옆문인 광화문은 왕부의 통로이고 그 안에 어사대, 즉 감찰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원종 11년(1270) 5월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할 때 몽고의 요구로 궁궐과 성의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불타 없어졌다.
그 후 조선시대 1631년(인조 9년)에는 고려 옛 궁터에 행궁(임금이 거둥을 할때 머무는 곳)을 건립하였고, 조선조의 초상화를 모셔두는 봉선전, 장령전과 병영으로 사용하였던 내수사와 지방관리의 관아들이 있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어 치욕을 당하였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고 현재에는 강화 유수부 동헌인 명위헌과 강화 유수부 이방청등이 남아있고, 조선시대의 장녕전과 규장외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고려시대의 흔적은 당시의 기와쪽이 축대에 묻혀 있을 뿐 찾아 볼 수가 없고 게다가 담밖 원래의 고려궁 터 일부로 추정되는 대지에 강화군이 군립도서관을 지었다.
고려궁전과 문루 또는 부속건물은 연경궁(延慶宮 : 북산아래에 있었다), 강안전(康安殿 : 연경궁 동북간 언덕에 있었다.), 경령전(景靈 : 지금의 명위헌자리에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건덕전(乾德殿 : 옥림리 자문고개에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장령전(長齡殿 : 자문고개 동쪽 남향동산에 있었다), 만령전(萬齡殿 : 건덕전 뒤에 있었다), 대관전, 신격전(大觀殿, 神格殿 송악산 북쪽에 있었으며 왕실의 사당이었다), 그 외에 궁전의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옛 장령(長嶺) 별우물 남쪽에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여정궁(麗正宮), 수창궁(壽昌宮), 용암궁(龍巖宮), 궐서궁(厥西宮), 장봉궁(長峯宮), 외원궁요당(外院九曜堂)등이 있었다.
고려궁전성문으로는 승평문, 광화문, 장령문이 있었다.
승평문(昇平門)은 왕궁의 정문이었다. 지금의 선원비각 주위에 있었다 하며 왕이 거둥(임금의 나들이, 임금의 행차)할때에 전용하였고, 환궁할 때에는 조정대신 이하가 문밖에서 말에서 내려 영입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삼문(三門)으로 되어서 가장 광대하였고, 오직 임금만이 출입하며 외국사신도 옆문으로 통용케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하세한 후 다음해 태자 전(傳)이 몽고로부터 환도함에 있어 승려인 대강화상과 함께 승평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전례에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광화문(光化門)은 궁전의 옆문이었는데 동쪽에 위치하며 성마루 고개 동문터로 본다. 왕부의 통로이고 그 안쪽에는 어사대(御史臺 : 감찰기관)가 있었다.
장령문(長寧門)은 왕궁의 동문일 것이니 송악산 동쪽 장령 명방(名坊)으로 본다.
조선조때의 궁전으로는 행궁(行宮), 봉선전(奉先殿 : 1622년에 세웠으나 병자호란때 불에 타서 무너졌으며, 조선 태조임금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 장령전(長寧殿 : 조선 숙종임금의 조상화를 모셨던 곳), 만령전(萬寧殿 : 조선 영조임금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 내수사(內需司 : 별효사청(別驍士廳)이 되었다가 병영으로 사용), 육상궁(毓祥宮), 어의궁(於義宮), 용동궁(龍洞宮), 명례궁(名禮宮) 수진궁(壽進宮)이 있었다. 또 창고로는 내책고(內冊庫 : 임금의 책자보관), 북신고(北新庫 : 금,은 창고), 호남고(戶南庫 : 제용도품 소장처), 사기고(砂器庫 : 접대용기기와 무기류), 별고(別庫 : 각종 물품소장), 감장고(甘醬庫), 포진고(鋪陳庫 : 각종 가구집물 소장처), 사창(司倉), 호조창(戶曹倉), 서창(西倉), 관청고(官廳庫), 보민청(補民廳), 부사고(府司庫), 군기고(軍器庫), 경적고(京籍庫), 부적고(符籍庫), 약방고(藥房庫), 진휼고(賑恤庫), 병방고(兵房庫), 군수고(軍需庫), 부료고(付料庫), 빙고(氷庫), 형옥제고(刑獄諸庫), 포량고(砲糧庫)가 있었다.
위에 나열한 조선조때의 궁전과 창고는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소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명위헌과 이방청 및 종각(鐘閣)이 있어 고려궁지로서 옛터만을 보여줄 뿐이고, 단지 고려궁문 승평문(昇平門)만을 복원 정화하였다.
강화 유수부 동헌건물은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다. 고려 고종때의 궁궐이 있던 곳에 조선시대 유수부의 동헌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시대부터 해방 뒤까지 군청으로 사용하다가 1977년 복원 수리하였다. 1769년 영조 때 명위헌이란 현판을 걸었으며 이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 백하 유순이 쓴 것으로 지금도 걸려있다.
전면 8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의공집으로 이중 장대석으로 조성된 가단 위에 네모골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화반없이 간단한 형태의 초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내무 가구는 2고주 7량으로 되어있다. 바닥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있고 동쪽 한칸에는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정면은 모두 사분합의 세살문을 달았다. 동헌의 서쪽에는 높은 석축으로 단을 조성한 고려궁궐터로 전하는 건물터가 있고 그 앞 낮은 곳에 이방청 건물이 있다. 건평은 52평이며 유형문화재 제25호이다. 강화유수부 이방청건물은 1654년 효종 5년 강화부 유수 정세규가 건립한 관아로서 1783년 정조 때에 유수 김노진이 중수한 ㄷ 자형의 건물로 크기는 67평쯤 되고, 유형문화재 제26호이다.
원래 강화유수부 안에 있던 육방가운데 하나인 이방청으로 ㄷ자형의 한식 목조단층 기와집인데 온돌방이 8칸이고 우물 마루로 된 청마루가 12칸이며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이다. 팔자 지붕에 민도리 홑처마로 된 건물이다. 이방청에서는 법전을 제외한 모든 크고 작은 사무를 담당하였다. 일제시대부터 강화등기소로 사용하다가 1975년 수리복원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화동종이 있다. 강화동종은 조선시대의 종으로 보물 제11호이다. 본래는 옛 강화내성 남문자리(현 선원 심상용선생 비각자리)에 있던 것을 1977년에 고려궁지로 옮겼다.
정상이 반구형이며 그 중앙에 용뉴(龍紐)가 붙었는데 용무늬의 형태는 U자를 엎어 놓은 모양에 용두가 붙은 쌍룡이다. 따라서 용통(甬筒)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종건은 입화식이 퇴화된 전 같은 변죽을 돌리고 있다. 종신의 중앙에는 굵게 도드라진 두 줌의 횡선대가 돌려져서 상하로 양분되었고, 윗부분에는 상대와 분리되어서 4개의 유곽(乳廓)이 배치되었다. 유곽대는 연주문 같은 둘레에 장식이 전혀 없이 보상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주조된 명문에 의하면 주조년대는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종의 양식에서 퇴화하면서 조선시대 종의 특색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탈취해 가려고 갑곶(강화도 해안가의 지명)으로 운반하다가 종이 너무 무겁고, 조선군의 추격에 종을 버려두고 도주하였다. 1955년 부터는 종신에 금이가 더 이상 타종을 못하였고, 1999년 10월에 강화동종과 같은 모양의 종을 만들어 강화부종각에 설치하고, 강화동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져 보관, 전시를 하게 되었다.
규장외각(奎章外閣)은 조선시대의 왕실도서관으로서 1776년(정조) 3월 궐내에 설치되어 역대왕들의 친필서와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1781년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강도외각으로 삼았다. 1866년(고종3)에 프랑스군이 침략하여 규장외각에 소장되어 있던 정부의 국보적인 전적과 보화등을 전부 약탈하여 가고 그 외 도서와 문적은 규장각과 함께 방화하여 소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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