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흥 화 문 ( 興 化 門 )

鶴山 徐 仁 2006. 12. 22. 10:14
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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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흥화문_1.jpg (80.6 KB)  
그림 #2    흥화문_2.jpg (101.8 KB)  
제 목    흥 화 문 ( 興 化 門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조선 광해군 10년(1618), 1932년 이건, 1988년 재이건
건평 약 88㎡,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다포계 우진각지붕

흥화문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에 세운 경덕궁(慶德宮) 정문이었다.
1910년 일제(日帝)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에 의해 포살된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일제가 지은 사당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다.
그 후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와 향(向)이 다르게 남향으로 되었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흥화문의 초석과 기둥은 원형이며, 가운데 기둥 열 3칸에는 문짝을 달았다.
문틀 위에는 홍살을 달았고,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구성되었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고, 그 놓여진 주심포의 살미첨차는
양봉으로 되어 장식적이지만, 기둥 사이 주간포의 살미는
짧게 끊어 자른 교두형이어서 대조를 이룬다.
첨차 외단 1, 2제공은 앙서, 3제공은 수서를 하였다.
가구는 고주 위에 2개의 보가 전후에 꽂혔고,
종량이 고주 상부에 놓였으며, 종량 위로 파련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연등천장, 좌우 협간은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