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조선 광해군 10년(1618), 1932년 이건, 1988년 재이건 건평 약 88㎡,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다포계 우진각지붕
흥화문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에 세운 경덕궁(慶德宮) 정문이었다. 1910년 일제(日帝)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에 의해 포살된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일제가 지은 사당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다. 그 후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와 향(向)이 다르게 남향으로 되었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