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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思派의 활동에 통전부가 얼마나 의의를 부여했는지는 그들의 조직 확산을 지원하기 위해 대학생들에 대한 의식화·세뇌교육 목적으로 金正日이 「101연락소」라는 것을 만들도록 지시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
월간조선 |
*아래 기사는 북한노동당의 對南공작부서 통일전선부 소속 간부가 월간조선에 투고했던 글이다. 2005년1월호에 실렸다.
--------------------------------------------------- 오늘날에는 386이 金大中도 감히 더 이상 넘어설 수 없었던 체제의 한계선까지 개혁하겠다고 팔 걷고 나섰다. 아직도 전향하지 않은 그들의 낯익은 모습을 TV 화면으로 볼 때마다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 극도의 체제 자만으로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까지 對北기능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북한 통전부에는 對南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잔뼈가 굵은 수천 명의 요원들이 오늘도 이 직업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들의 최고 성공작은 바로 386이다. 이날을 보자고 통전부가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재단하며 그에 알맞은 자기 조직을 부단히 확장해 왔고, 마침내는 그 효력을 보는 것이다. 主思派 工作 공로자 비밀 표창 朴正熙의 유신독재정권 시기 한국內 민주세력에 대한 통전부의 對南공작 주제 침투는 反독재, 자주화, 연방제 통일방안이었다. 4·19 혁명에 자극받은 북한은 민주주의 혁명을 反체제 폭력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한 것은 광범한 군중 속에 뿌리박을 수 있는 혁명정당과 함께 북한 주도의 지도이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한국內에 하루빨리 「主思派」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金日成의 연방제를 지지할 수 있으며, 미군을 몰아내고 체제전복도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대상을 진취성이 강하고 지성욕구로 몸이 달아 있는 대학생들로 지목했다. 그 실현을 위해 통전부는 조총련을 앞세워 일본에 나와 있는 유학생 사냥에 나섰다. 납치·회유·기만·협박의 방법으로 적색화한 그들의 임무는 한국內에 주체사상을 전파시키고 동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조국평화통일 서기국과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참사실에는 그 工作성과로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은 사람들이 활동 중에 있다. 북한 공작금을 뿌려 가며 대학가에 침투하여 主思派를 결성한 초기 창시자들에 대한 조국통일상 내신문건에 金正日은 1996년 2월15일 비준했으며, 그 수훈식을 다음날 2월16일 통전부 본부 회의실에서 몇몇 주요 간부들 참석下에 익명 발표식으로 진행했다. 主思派의 활동에 통전부가 얼마나 의의를 부여했는지는 그들의 조직 확산을 지원하기 위해 대학생들에 대한 의식화·세뇌교육 목적으로 金正日이 「101연락소」라는 것을 만들도록 지시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1동 평양의학대학 앞에 건물을 두고 200여 명의 필진들로 구성된 이 연락소의 사명은 한국 작가 명의로 反독재·反美·金日成의 고려연방제식 통일을 주제로 한 소설·詩를 창작하여 한국에 침투 및 보급시키는 것이다. 책의 내용으로 보나, 책 제작으로 보나 어느 면에서도 북한産이라고 의심이 안 되게 철저히 위장 창작된 시집과 소설책들은 젊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反정부 행위와 주체사상 신봉이 더는 非합법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평범한 대학생에서 민주투사로 성장한 책 속의 주인공을 닮고 싶다며 북한으로 밀입북해 노동당에 가입한 386 출신 한 성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386들은 아직도 그때의 대표적인 작품들인 「반항」, 「돌아보는 얼굴」, 「열흘 낮 열흘 밤」, 「통일은 언제 됩니까?」 등을 자자구구 외우고 있을 것이다』 통전부는 이렇게 소설과 詩까지 對南심리전用으로 만들어 대학생들을 사상무장 시키는 데 이용했으며, 主思派는 反정부 전선을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확대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비밀 訪北해 노동당 가입하고 「혈서 서약」 통전부는 한국內에 「反美결사대」, 「자주군인회」, 「통일결사대」, 「민족해방애국전선」, 「민주운동연합」 같은 비밀조직들을 구축하고 對南공작의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 통일전선의 목표는 야당을 지지하여 金大中이 집권하면 국가보안법 철폐, 안기부 해체, 미군철수 등 북한의 적화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애를 우선 제거하고 정치적 혼란, 親北여론 확산으로 합법·非합법 시민운동단체들을 규합하여 연공 정부의 기반을 확보한 다음 분열 50돌이 되는 1995년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 50돌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金正日은 한국內 지하당 성원들에게 투쟁의욕과 통일의욕을 자극시키기 위해 「누구는 서울시위원장, 누구는 충청도위원장」 하는 식으로 직위 분담을 하게 하고, 金日成에게 자기의 對南공작 지도 성과를 과시할 목적으로 그들이 노동당 입당 청원서, 충성의 맹세문, 칭송 글, 서약서 등을 작성하여 북한으로 들여보내도록 지시했다. 2002년 4월15일 평양 만수대 金日成 동상 뒤 조선혁명박물관에 새로 개관된 「동지관」 이라는 곳에는 그때 입수한 자료들과(이름은 삭제) 지하조직들이 사용했던 노동당 깃발, 金日成과 金正日 초상화가 전시되어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 국민들이 金正日을 흠모한다는 선전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어 통전부는 지하조직만이 아닌 합법적인 운동단체들도 親北, 좌경화하기 위하여 主思派가 「全大協」을 장악할 수 있도록 많은 공작금과 인적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원한 것은 북한이 이전에 흡수했던 金大中과 같은 「민주투사」들이었다. 全大協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한 「主思派」는 해외에 유학생 지부를 만들어 놓고 체계적으로 통전부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고,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노동당에 가입하면서 金正日에게 충성의 선서까지 다졌다. 그렇게 평양까지 찾아와서 번호를 받은 붉은 당증과 혈서 서약서는 모두 15개였다. 對南담당 비서 김용순은 『金正日 탄생 60돌이 되는 2002년 2월16일까지는 통전부가 선물로 60명의 혈서 서약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간부들 앞에서 지시했다. 통전부는 그 후 한국內 지하조직들을 종합적으로 통제관리하고 적화통일로 유도할 수 있는 유일적인 지령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평양시 대성구역 용흥동에 숨겨져 있는 소위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방송」 운영을 더욱 강화했다. 150여 명으로 꾸려진 이 26연락소는 한국에 실존하는 방송국으로 위장한 연락소로서 아나운서의 방송언어와 한국식으로 현지화한 억양을 사용해 한국 주민들과 해외동포,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정부의 정책과 사회상을 왜곡하거나 허위날조 보도함으로써 소요 유발을 부추기고 민주화 운동이 통전부의 對南전략대로 심화되도록 심리전을 폈고, 때로는 지령을 내렸다. 방송의 다양화를 위해 26연락소는 한국대중가요를 전담하는 전자악단도 가지고 있다. 「칠보산」 명칭을 1998년에 「북극성」으로 바꾼 이 악단에서는 한국의 대중가요들을 통전부의 입맛에 맞게 가사들을 바꾸거나 운동권 노래들을 직접 창작하여 방송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운동권 대학생들의 反정부 감정을 더욱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통전부가 왜곡한 노래 중의 하나인 「사랑의 미로」를 실례로 든다. <그토록 다짐을 했건만/사랑은 알 수 없어요/민주 위해 목숨을 바친/그대를 나는 못 잊어/나의 작은 가슴에 심어준 사랑의 별/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그대의 원한 씻으려/투쟁에 나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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