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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00년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현장은 더욱 그랬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구에게 한양으로 가는 길을 내줄 수 없다며 목숨을 버렸고, 경상좌부사 이각은 그 길을 따라 북으로 도망을 쳤다. 그 길에서 충신과 역신이 갈라섰고 전쟁이 끝난 후 송상현은 불멸의 충신으로 부활했지만 도망친 이각은 비겁자로 추락했다. 동래길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충신과 역신이 갈라선 길
조선시대 부산의 중심지는 동래였다.1592년 임진년 4월13일.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무너뜨린 왜구는 하루 만인 14일 저녁 지금의 동래경찰서 부근인 동래성 남문까지 밀고와 조선군과 대치했다.
앞서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에 와 있던 경상좌도 군사책임자인 이각(경상좌부사)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북문지기를 죽이고 도망쳐 버렸다.
왜구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명나라를 정벌하는 )길을 비켜 달라.’는 목판을 동래성 남문 밖에 세웠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즉각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고 맞서며 결연한 항전의지를 다졌다. 이튿날인 4월15일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와 동래성이 함락됐다.
‘외로운 성은 마치 달무리같이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진은 기척도 없구나.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겁고 아비와 자식의 정은 가벼이 하오리다.’ 송 부사는 한시를 남기고 꼿꼿하게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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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가는 지름길
‘어데 가넝기요’ ‘한양 갑니더.’부산 방언의 물음과 대답의 어미는 ‘∼넝기요.’ ‘∼ㅂ니더.’이다. 혹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자못 시비조로 들리기도 한다. 조선시대 부산의 중심지였던 동래는 휴산과 소산이 교통의 요지였다.
휴산은 지금의 동래역 앞 패총지 주변이며, 여기서 동래읍성을 지나 북으로 20리 떨어진 소산은 지금의 금정구 하정마을이다. 하정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부사 이각이 자신은 이곳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동래성을 빠져나와 도망간 바로 그곳이다.
휴산에서 소산으로 가는 사이(금정구 부곡동)에는 기찰(譏察)이 있었다. 기찰은 특정한 곳에서 검문검색을 하는 요즘의 검문소에 해당하는 곳이다.
당시에는 부산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동래∼양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빠지는 길을 통해야만 했다.
이정형 동래구 문화재 전문위원은 “부산에는 일본과의 통로인 초량왜관이 있어 밀무역이나 적과의 내통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 동래와 김해에 검문소를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곳 마을에는 아직도 기찰목욕탕, 기찰떡방앗간, 기찰식육점, 기찰열쇠 등 옛 지명을 상호로 사용하는 집이 수두룩하다. 경부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고립되다시피 한 하정마을(소산역터)은 아직 4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토박이 안근수(72)씨는 “여행을 떠나는 관리들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큰 돌이 마을 어귀에 있었는데 수년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족욕 바람 동래온천
동래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에 동래온천이 한몫을 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동래온천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31대 신문왕(683년)때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동래를 지칭)의 온정에 목욕을 하고 성으로 돌아갔다.’(삼국유사)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온정을 관리하는 관속인 온정직을 두었고 욕객들을 위해 온정원을 설치하고 역마까지 두었다.1766년(영조 42년) 동래부사 강필리는 아홉칸짜리 집을 지어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온정을 지키는 대문도 세웠다 한다. 이때 세운 온정개건비(부산시기념물 제14호)가 현재 온천동 농심호텔 후문 용각의 뜰안에 자리잡고 있다. 온천장에는 요즘 공짜 족욕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농심호텔 후문과 온정개건비 사이에 지난해 11월 무료 노천족탕이 들어서 하루 1000여명이 찾아온다.
흡사 신라의 포석정을 닮은 노천 족욕탕에는 이른 아침부터 족욕객들이 몰려 빼곡히 둘러앉아 온천수에 발을 담그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한때 온천을 강점했던 일본인 관광객들도 엔화의 위력을 앞세우며 여전히 동래온천을 찾는 큰 고객들이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온천수. 그러나 언젠가 동래 온천수가 뚝 끊어질지도 모른다.
동래온천번영회 정주태 상무는 “고속철도 부산구간인 금정산에 터널을 뚫으면 수맥이 끊겨 혹시나 온천수가 마르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며 동래의 명맥이 사라질까 우려했다.
부산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그래픽 김송원기자 oksong@seoul.co.kr
■ 남대문~동래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한양과 부산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은 남대문을 시작으로 용인~안성~충주~문경~칠곡~대구~청도~밀양~양산~동래에 이르는 950리길이었다. 이른바 영남대로로서 민족생활사의 파노라마와 같았다. 도로의 폭은 넓은 길이 10m, 중간길이 7m, 좁은 길은 3m 정도였다.
30리마다 도로의 기능을 관장하는 국가기관인 역(驛)을 두었고 지역별로 10여개의 역을 한데 묶어 종육품 관직의 찰방(察訪)이 모든 역의 관리책임을 도맡았다.
역은 역토(驛土)를 지급받아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했고 역에는 규모에 따라 5∼30마리의 말이 배치됐다. 역의 기능을 보조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국가관할의 관(館)과 원(院)이 설치됐고 서민들의 주막도 들어섰다.
공문서의 수발, 세금으로 거두는 세미, 조공품 운반, 관리들의 여행 등은 모두 이 도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주공격로로 이용돼 주변지역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조선통신사도 이 길을 따라 부산에 도착,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과거에 나선 경상도 선비들도 이 길을 따라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 죽령길인 영남좌로와 추풍령길인 영남우로가 따로 있었다. 좌로는 서울~양주~광주~여주~충주~단양~죽령~풍기~영천~안동~의성~신령~경주~울산~기장~동래로 연결됐다. 우로는 서울~용인~양지~주산~진천~청주~옥천~청산~황간~추풍령~성주~현풍~창녕~영산~칠원~창원~황사진~양산~동래로 이어졌다.
영남대로는 19세기 말까지 한양과 경상도 지방을 연결하는 공로(公路)로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일제의 철도 건설로 기능이 약화됐으며,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역사속으로 점차 잊혀졌다.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