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화양연화라는 시간이 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견뎌 순백의 꽃망울을 툭 터트린,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목련의 한 때처럼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시기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인생에서 한 사람을 만나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게 되고, 사랑이 싹트고, 그 결실을
맺는 순간순간들이 바로 인생의 화양연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시절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오랫동안 추억할 수 있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여행이다.
도시의 분주함과 소음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한적한 숲속을 걷고, 서로
도와가며 힘든 바위를 오르고, 바닷가에 앉아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이번 달부터 새 연재로 인생의 화양연화를 향해
가고 있거나,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연인과 부부들이 오래토록 나눌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줄 산과 여행지를 묶어 소개한다.
황운중씨(30)와 박은선씨(28)는 신혼부부다. 6년간의 긴 연애 끝에
올해 4월23일 결혼에 골인했다. 은선씨는 운중씨 동생과 대학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 오빠의
친구를 처음 보게 되었고,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곧 둘 사이에 편지가 오고 갔고, 운중씨 제대 후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6년의 연애 기간동안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 후 3년간 운중씨는 고향인
춘천에서 학교를 다녔고, 은선씨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해서 사소한 오해가 큰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그 위기의
순간들을 넘기게 해준 가장 큰 힘이 바로 둘이 떠난 여행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물으니 안면도라 했다. 2001년
은선씨의 여름휴가에 맞춰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에 왔다가 은선씨가 조개껍질에 발바닥에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 피가 나는 발을 티셔츠를 벗어 꽁꽁
싸매고 은선씨를 업고 병원을 찾아 뛰어다니는 운중씨의 모습을 보고 이 남자라면 평생 믿고 의지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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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봉산 입구에 있는 모닝빌펜션. |
두 사람은 7월이 되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빨라야
4년 후에나 들어오는 긴 여정이다. 유학준비 때문에 제대로 된 신혼여행도 다녀오지 못한 부부는 유학생활의 고단함을 씻어줄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여덟 봉우리 모두 탁 트인 서해 조망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서산 시내에 닿으니 오후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산행하려면 아무래도 속이 든든해야 하니 서산 토속음식인 게국지찌개를 먹기 위해 시청 앞 광장 근처의 진국집을 찾아갔다.
게장을 담갔던 국물에 묵은 김치를 넣어 끓인 게국지찌개는 구수하고 짭짤한 옛 맛을 맛깔스럽게 재현해내고 있다.
1인분 5,000원에 게국지찌개뿐 아니라 4가지 찌개류와 감태김, 게장, 어리굴젓 등 15가지 반찬이 차려진다. 고급 한정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허기질 정도로 배가 고플 때 찾아가면 한 끼 잘 먹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한 집이다.
팔봉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서해안고속도로에서 운산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서산 방면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 방면으로 가다가 어송리 삼거리 검문소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605번
지방도로를 타면 된다. 처음 나오는 팔봉산 이정표는 어송리 기점인데, 대부분 산행은 바로 서해가 조망되고 정상과 거리가 가까운 양길리 기점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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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봉산 초입소나무 숲을 걷고 있는 황운중씨 부부. |
어송리 이정표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봉을 이룬 팔봉산 정상을 바라보며 한적한 시골길을 조금 더 달려 주유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좁은
시멘트포장길을 달리면 산행기점인 주차장이 나온다.
아침에 약한 비를 뿌리기도 했던 궂은 날씨가 주차장에 도착하니 화창하게 갰다.
팔봉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시원스레 뻗은 암봉에서 서해를 조망할 수 있어 유명해진 산이다. 이 정도 날씨면 기가 막힌 서해 조망을 볼 수 있다
말하니 부부는 그 기대감에 행여 다시 구름이 몰려올 새라 산행을 재촉한다.
화기물통제소를 지나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뻗은 송림이 펼쳐졌다. 태안, 안면도 일대는 예전부터 좋은 소나무가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팔봉산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종 40~50년
되는 잘 생긴 소나무가 산 초입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사이를 걸으니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가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송림 속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돌거북이 입에서 시원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짧은 거리를 걸었지만 조금 마른 입을
적실 수 있겠거니 기대했는데 식수불가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실 수 없으니 거북분수인 셈이다. 산이 깊지 않아 계곡물을 마시기에는 무리가
있기는 있어 보였다.
공원처럼 조성한 거북분수 일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약간 가파른 오르막을 10분 정도 오르니
사거리 안부가 나왔다. 이정표를 보니 왼쪽은 제1봉, 오른쪽은 정상인 제3봉이다. 그냥 정상을 향해 갈까 하다가 제1봉에서 내려온 중년 부부가
안 보고 지나치면 후회할 거란 말을 듣고 들러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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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심사에서 정성스레 돌탑을 쌓고 있는 두사람의 소망은 아마같은 것이었으리라 |
생각보다 길이 거칠었다. 오르막을 조금 오르니 5m 가량 되는 침니 아래로 밧줄이 매어져 있다.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힘들게 제1봉에
올랐다. 오르기는 힘들었지만 침니에 올라서니 시원하게 펼쳐진 가로림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부부는 서로 저기 좀 보라며 그 멋진 광경을 공유하기
위해 분주하다.
제1봉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부부는 멋진 낙조를 기대하며 서둘러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왔던 길을 되짚어 사거리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접어들면 정상인 제3봉이다. 해발고도가 360m 남짓이라 하여 산책길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산길을 걸어보니 그리 쉽지만은 않다.
급경사 지역에서는 서로 부축하며 올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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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랑의 도움을 받아 험한 바위를 오르고 있는 박은선씨. |
안부에서 제2봉 오르는 길은
급경사다. 운중씨가 은선씨의 손을 잡아주며 급경사를 오르니 그 뒤에는 철계단이 놓여있어 한결 오르기 쉽다. 철계단을 올라 조금은 완만해진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연꽃 모양을 이룬 제3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제2봉이다. 제2봉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의 조망 또한 일품이라 부부는 언제 바다를
봤냐는 듯 연신 탄성이다.
제2봉부터는 팔봉산의 여덟 봉우리를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봉우리가 팔봉산을 이루는 여덟 봉우리냐를 놓고
부부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직 정상에 가려 여덟 봉우리를 뚜렷이 구분할 수 없지만, 부부는 서로 자기가 센 봉우리들이 팔봉산의
여덟 봉우리라 주장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 정겹고 사랑스러워 기자는 잠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실랑이의 결론은 은선씨가 “이 고집쟁이!”
하고 토라지고 운중씨가 보듬어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어차피 제3봉에 오르면 쉽게 판가름이 날테니 부부를 재촉해 제3봉을 향한다.
제2봉을 뒤로하면 40여 평 크기인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을 지나 급경사 바위에 걸쳐진 두 개의 철계단을 오르면 길이 2~3m의
덮개바위 아래를 통과한다. 덮개바위를 빠져나오면 길 오른쪽으로 ‘용굴 길이 12m, 정상까지 61m’라고 쓰인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을
지나면 곧이어 팔봉산 산행의 묘미를 더해주는 통천굴(용굴)이 기다리고 있다. ‘ㄴ’자형으로 경사진 굴속으로 들어가면 배낭을 벗고 수직 높이
4~5m의 비좁은 굴을 바위를 잡거나 설치된 밧줄을 잡고 올라간다. 운중씨가 먼저 올라가서 은선씨의 배낭을 받아준다. 워낙 좁고 경사가 심해
은선씨가 많이 힘들어했지만, 남편의 든든한 손 덕분에 거뜬히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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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를 위해 쭈꾸미를 자르고 있는 은선씨. 어린나이지만 살림솜씨가 야무지다는게 신랑의
설명이다. |
통천굴을 빠져나와 제3봉 왼쪽 바윗길을 돌아내려선 다음, 오른쪽 철계단을 올라가면 더
오를 곳이 없는 팔봉산 최고봉인 정상이다. 정상에서 터지는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우선 북으로는 광활한 들판을 보는 듯한 가로림만이 태안반도와
멀리 대산읍과 함께 시원하게 펼쳐진다. 가로림만 오른쪽으로는 연화산(284m) 아래로 넉넉한 분지를 이룬 양길리 들판이 평화롭게 내려다보인다.
동으로는 팔봉산과 맥락을 같이 하는 금강산(316m)이 부드러운 자태로 시야에 들어온다. 남동쪽으로는 제2봉에서 이 신혼부부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제4봉부터 제6봉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가야산과 덕숭산이 아련하게 시야에 와 닿는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은 많이 했지만, 산 정상에 함께 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했다. 그들은 서해와 길게 펼쳐진 산자락을 보며 오랫동안 밀어(密語)를
나누었다. 아마 힘든 산을 함께 오른 오늘의 기억을 오래 가슴에 새겨두고 앞으로의 힘든 유학생활과 인생의 어려운 날들을 서로 보듬어 가며
살아가자는 내용이었으리라!
서해를 배경으로 험하게 선 암봉 위에 다정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글 홍순우
사진 김영훈 차장
교통
서해안 고속도로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서산나들목으로 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서산 시내를 지나 태안반도 이정표를 보고 따라가면
중간에 팔봉산 이정표가 나온다. 팔봉산 산행을 마치고 태안반도 여행을 하려면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까지 가서 지방도를 이용해 원하는 목적지까지
가면 된다.
대중교통은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태안행 직행버스가 06:40분부터 20:00까지 하루 22회 운행한다. 요금 7,200원.
운행시간 2시간 20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07:10, 10:10, 13:10, 16:10, 18:40, 20:10 에 태안가는
고속버스가 있다. 운임 10,600원, 운행시간 2시간 10분.
숙박
태안반도 일대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펜션이나 민박이라 할 정도로 숙박시설이 잘 조성되어 있다. 요금도 거의 일정하다. 지역별 숙박업소를
확인하려면 태안군청 문화관광과(041-670-2544) 나 태안군 홈페이지 www.taean-gun.chungnam.kr로 하면 된다.
바닷가답게 사시사철 제철
해산물이 넘쳐난다. 그래도 바닷가에 왔으면 포구에 가서 갓 들어온 생선이나 해산물을 맛보는 것이 제격이리라.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검포, 몽대포구, 신진항, 안흥항, 신진항 등이 해산물을 살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