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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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들여다 보기] 박태준

鶴山 徐 仁 2006. 7. 9. 09:33
2006년 6월
 
우연한 기회에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현암사?004년)을 접한 최홍 랜드마크 자산운용 사장은 묵직한 감동에 빠져 들었다. 막연하게만 생각해 오던 ‘포항제철의 성공신화’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면서, 신화의 주역인 박태준 리더십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지적 성장기인 20대를 이념의 세례를 받으면서 보낸 386세대 최 사장으로서는 오늘의 발전을 이룬 산업화 세대의 성취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중앙일보 곽재원 경영기획실장의 주선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신라호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면서 나눈 대화로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바쁘게 일할 때가 행복했어. 여러분도 젊었을 때 후회 없이 일하시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앉으면서 박 회장은 말했다. 말이란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다. 평범하게 들릴 수 있었던 이 말도 박 회장에게서 듣는 것은 무게감이 있다. 그는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몇 안 되는 우리나라 원로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두철미한 성격대로 약속 시간에 꼭 맞게 도착한 박 회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혈색도 좋았고 정정했다. 예전 언론에서 보던 눈썹 짙은 강한 이미지와는 달리 목소리도 크지 않게 천천히 이어갔다. 자연스레 나이로 화제가 옮겨졌다.

“올해로 80세가 되니 지난해와는 또 마음이 달라진다. 10년 전, 내가 70에 들어설 때, 어떤 선배가 ‘박 회장, 80이 되면 마음이 달라져, 당신이 일생에 꼭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계획을 세워 70대에 해야 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즘 그 선배 말씀이 많이 생각난다. 지난해만 해도 포스코가 인도에서 사업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인도에 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나보다는 젊은 사람들이 잘하겠지 한다.”

그러면서도 “2006 독일 월드컵을 보러 갈 예정이다. 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이 응원하는 열기로 재충전해야겠다”는 대목에서는 아직도 의욕이 넘치는 박 회장의 참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최 사장이 물었다.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해방 후 귀국해 군인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다 기업으로 방향을 바꾸셨는데, 계기가 궁금합니다.”

박 회장의 회고는 길었다.

“군인으로서 꿈은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군대생활을 했다. 육군대학 성적 이 좋아야 장군이 되는 시절에 수석 졸업까지 했다. 그러나 5?6혁명 후 상공위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나는 경제에는 문외한임을 절감했다. 그래서 넓은 세상에서 공부를 더 하러 미국 유학 준비를 끝내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1964년 새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불러서 청와대로 가서 만나 뵈니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가 보낸 편지를 읽어 보라고 했다. 내용은 ‘한국은 경제발전이 과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국제신용으로는 자금을 마련할 수가 없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청구권 자금을 마련해서, 경제개발에 사용한다면 상호이익이 될 것이다. 협의를 위해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 통역 없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인물, 가능하면 일본에서 학교에 다녔던 인물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 건을 들어 사양했지만 박 대통령은 미국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로 일본에 10개월간 머물면서 나중에 포항제철 설립기반을 만들었다. 기술도입의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64년 정초, 대통령과의 저녁식사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포철 탄생의 출발점이고, 국가적으로도 의미 있는 날이었다.”

850쪽이 넘는 박 회장의 자서전을 여러 번 탐독한 최 사장답게 구체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저 역시 작지만 일개 기업의 CEO로서 새로운 도전과 과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흔히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세웠다고 표현합니다. 67년 창업 당시 창업요원 39명은 기술과 경험은 고사하고 용광로 구경도 못해 본 사람들이었고, 건설 자금도 절대부족한 극한상황이었습니다. 총책임자로서 고민이 많았을 텐데 롬멜하우스란 애칭으로 불리던 전투사령부 격인 임시건물에서 심정은 어떠했나요.”

“사람이 하는 일은 사람의 정신에 달려 있다”라는 박 회장의 첫 마디에서 절대빈곤을 타파해 온 산업화 세대 주역의 강단이 느껴졌다. 포철 신화의 상징이 돼버린 롬멜하우스란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는 과거를 회고하는 원로가 아니라 현장에서 뛰고 있는 현역으로 돌아갔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준비했었고 자신도 있었다. 청구권 협상으로 일본에 갔을 때부터 틈만 나면 제철소를 보러 다녔는데, 당시 2차대전 후 건설한 최신 제철소는 일본에만 있었다. 박 대통령께 제철소 건설 임무를 부여받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공정의 배열, 수송 이 두 가지가 핵심적인 성공요소라고 판단했다. 돈만 있다면 지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다. 정신력이 부족하면 기술, 돈이 있어도 결과는 뻔하다. 롬멜하우스에서 우리는 정규군이라기보다는 게릴라에 가까웠다. 그 게릴라들은 포철정신으로 무장했었다.”

최 사장이 반문했다. “영일만의 우향 우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까.”

박 회장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포철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지었다. 바로 우리 조상의 혈세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한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 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는다. 제철 보국, 이것은 우리 포철인들의 신념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64년에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결식아동이 50%가 넘었고 굶는 것은 아예 생활이었다. 나는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5,000년 절대빈곤의 사슬을 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나 자신도 공기 단축을 위해 하루 3시간 자면서 공사를 독려한 적도 부지기수다. 이러니 부실공사를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77년 8월, 내가 직접 찾아낸 부실공사 현장은 공정률 80%였지만,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폭파식까지 가지며 다이너마이트로 날려 버렸다. 고마운 것은 이 신념을 우리 직원들이 이해하고 따라와 주었다는 점이다.”

최 사장은 CEO답게 본질적인 문제를 찔렀다.

“사람이란 두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투철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기술적인 준비가 철저하다고 해도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회장님의 입장에서도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약점을 이겨 나온 박 회장다운 회고담이 이어졌다.
“사장도 인간인데 어찌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두려움이 압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장이 두려움에 압도되면 임원, 직원까지 무너지게 돼 있다.”

최 사장은 자서전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인용했다. ‘레닌 동지가 꿈꾸고 추구한 이상향을 저는 포철에 와서 보았습니다. 우리의 꿈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91년 8월 모스크바대 빅토르 사도브니치 총장이 포철과 사원 주택 단지를 둘러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고 남긴 말이다. 인간의 얼굴을 했지만 현실성이 떨어져 실패하고 말았던 사회주의 소련의 좌절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어서 최 사장은 박 회장이 사원 후생복지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물어봤다.

박 회장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로 돌아갔다.

“잘 먹고 잘 자는 병사가 잘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정신력이 중요하지만 정신력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군복을 벗고 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강원도 상동광산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판잣집 같은 사원주택에서 빨래하는 광부 부인에게 사장에게 건의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빈대가 많아서 잠을 못 자겠으니 약 좀 쳐 주세요’였다. 나는 이때 마음속으로 종업원 후생복지를 회사의 가장 중요한 방침으로 결정했다. 최선을 다해서 직원들을 대우해야 직원들도 회사에 최선을 다할 것 아닌가.”
 
부실기업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박태준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는 원칙을 정립했다. 포항에 하수도조차 제대로 없어 파리·모기가 들끓던 시절이었다. 박 회장은 제철소 부지에 말뚝을 박기도 전인 68년 9월 포항시 효자지구에 사원용 주택부지를 매입하고 공사를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말만 많은 국회에서는 제철공장을 지으라고 보냈더니 엉뚱하게 부동산 투기나 하고 있다는 비난이 빗발쳤지만, 그는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사회주의 소련의 최고 엘리트를 감탄하게 만든 포철 사원 주택 단지의 출발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인생의 선배에게 한 수 배우러 나왔다는 최 사장인 만큼, 박 회장 특유의 유명한 목욕론까지 질문은 이어졌다.

“우향 우 정신과 함께 목욕론은 박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다. 목욕론은 어디서 나왔나.”

박 회장의 회고담은 군대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57년 가을 25사단 참모장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 전반에 부정부패가 극심했을 때인데, 가을 김장 때 들어온 군납 고춧가루가 빨간 물감들인 톱밥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쳐서 군납업자를 쫓아내기는 했는데, 막상 고춧가루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정두화란 양심적인 사업가를 만나서 제대로 된 고춧가루로 김장을 담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이분이 운영하는 공장을 가 보았는데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깨끗한 위생복을 입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나는 ‘몸이 청결해야 정신이 청결해지고 그것이 공장의 청결로 이어진다. 공장의 청결은 제품의 완벽성과 안전사고 예방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항상 ‘목욕은 안전이다. 목욕은 품질’이라면서 공장 관리 신조 1호로 강조했더니, 박태준의 목욕론이 됐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께서도 생전에 내 목욕론에 깊이 공감했었다.”

대화가 오가고 분위기가 편해지면서 지금까지 질문만 하던 최 사장으로부터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독자로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84년 10월 3일 개천절이었습니다. 67년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이듬해 포철을 창립하고 25년이 지난 83년 연산 910만t의 제철소를 완공하고 기념식을 10월 2일 치렀습니다. 하루 뒤 회장님은 부인과 박 대통령 유자녀, 몇 명의 동행자와 함께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 한지에 붓글씨로 쓴 보고문을 읽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격과 신념을 완전히 이해해 주었던 사람에게, 지시를 내린 지 26년, 세상을 떠나고도 14년 후에 묘소를 찾아가 업무완수 보고를 하는 대목은 정말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박 회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 사장은 말을 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훌륭한 기업가들도 많았습니다. 이분들은 기업이 커지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인센티브가 있었으니 열심히 일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포철과 박 회장님은 다릅니다. 포철이 아무리 커졌다고 해도 박태준 개인의 기업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그 정신을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후배로서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박 회장은 자서전에서 6?5 직후 빈곤에 시달리던 나라의 앞날을 고민하면서 좌우명을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로 정했다고 회고했다. 사심 없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조국 근대화의 든든한 기초를 다졌던 그의 삶은 좌우명대로 조국에 바친 것이었다. 빈곤타파가 시대정신이었던 박태준 회장과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에 침윤된 청년시절을 보낸 386 CEO 최홍의 대화는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는 세대 간 소통의 자리였다. 최 사장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21세기 벽두의 이 나라가 간절히 기다리는 참된 통합의 리더십은 어디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철강왕 박태준의 대답은 명쾌하고 단호했다.

“독재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고, 빈곤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라.”

 
김경준/딜로이트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