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혁신의
중개역활을 한 인상주의의 개척자"
작 가 명 : 에두와르 마네 [Edouard
Manet] 연 도 : 1832-1883 화 풍 : 인상주의.
프랑스 파리 출생의 화가로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불린다. 유복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엔 아버지의 반대로 견습선원으로 있다가 1850년 겨우 퀴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갈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교습에 반발하고 루브르
박물관의 고전회화를 모사하면서 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 화가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후 살롱에 여러번 출품했으나 그의 작품은 이미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한 후여서 그시대에 비해 대단히 이색적이며 혁신적인 작품으로 여러차례 낙선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의 등의 작품이
살롱에서 비난을 받으며 오히려 세간의 주목을 끌어 그의 표현기법이 오히려 신선하고, 참신한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피사로, 모네
, 시슬레 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후에 인상주의의 길을 여는데 기둥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미즘의 공인을 기다리며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만년에는 류마티즘으로 고생하며 신체적 피로가 적은 파스텔화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세련된 도회적 감각의 소유자로 이전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과 활기 있는 현실성을 예민하게 포착함으로서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 역할을 훌륭히한 전래 없는 화가였다.

피리 부는 소년 1867년~8, 캔버스에 유채 , 146.3/
114cm 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에밀 졸라의 초상
36세가 된 마네가 28세의 에밀 졸라를 그린 초상화인데, 당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고민하는 마네를 백방으로 옹호해 준 졸라에의 보은과 우정의 표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지적인 정열과 불퇴전의 의지이며,
이러한 졸라의 인상 속에 고마움과 사심 없는 우정, 즉 정성을 쏟은 점이 이 초상화의 포인트다.
1867~8, 캔버스에 유채 , 146.3/114cm , 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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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과일
과일, 나이프, 컵 등 여러 마티에르의 상호간의 밸런스, 이런 사물들의 구성에
견고한 토대를 부여하는 테이블의 수평선과 배경의 절단 방법 등이 마네의 스승인 샤르당(Chardin)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샤르댕은 면밀하고 무게있는 필치로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주로 그렸고, 그의 정물화는 '완벽'하기로 유명하다. 마네는 수많은 풍경화와 인물을 그렸으나, 이에 비해 정물화는 극히 적은 편이다.
1846년에서 66년 사이에 그린 10여 점의 정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집토끼>는 샤르댕의 <죽은 토끼와 몰이
도구>를 모사한 것처럼 닮았다.
마네는 인물화에도 레몬, 컵, 포도 등을 장식물로 등장시켜 때로는 주제인 인물
이상으로 집요하게 묘사, 화면 전체를 대위법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데, 이 그림에서는 '견고한 구성'을 직감할 수 있다.
1864, 캔버스에 유채 , 45/ 73.5cm , 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인사하는 투우사
1865년 스페인을 여행했던 마네는 귀국 후 수 점의 '투우' 시리즈를 발표했다.
<피리 부는 소년>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인물이 '배경이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구성'이다. 마네는 투우사의 모험적인 성격 보다도, 화려한 의상 등 엑조틱(exotic)한 요소에 이끌려 이 시리즈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친구인 테오도르 뒤러에게 1천2백 프랑에 팔았는데, 30년 후인1894년의 경매에서 뒤랑 뤼엘 화랑이 10배 인
1만5백 프랑에 낙찰시켰다.
모자를 벗어 들고 열광하는 관중에게 인사하는 투우사의 영웅적인 표정, 이 표정을
살아있는눈망울과 균형 잡힌 몸매,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게 강조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에 대해 이설이 있었으나, 1866년에 그린
대작임이 확인되었다.
1866년, 캔버스에 유채 , 171.1/ 113cm ,뉴욕메크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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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찌의 少年
초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27세 때 그린 이 그림 속에는
지금까지의 회화 수업 역정(繪畵修業歷程)을 규지(窺知)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고, 반면 '마네 초기의 경신작'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델인 알렉산드르 소년은 마네의 작업장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붓도 빨아주는
사동이었는데 어느 날 이 소년이 마네의 작업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감수성이 강하고 예쁘장한 미소년의 사체를 보고 마네는 겁에 질려 작업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그 작업장 기둥에 굵은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여기서 목을
매었느냐?'고 무심결에 묻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대답하여 마네는 대경실색, 다른 아틀리에로 옮겼다는 일화도
있다.
1859, 캔버스에 유채 , 65.5/ 54.5cm
, 포루투칼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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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소년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수평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
1866년, 캔버스에 유채 ,161/97cm ,
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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