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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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들여다 보기] 윤석화

鶴山 徐 仁 2006. 7. 9. 09:22
2005년 5월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는 한국 연극의 메카다. 가난한 연극쟁이와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이 어깨를 부딪히며 서로의 숨소리를 확인하는 거리다. 방송통신대학을 중심으로 어느 골목에 들어서든지 소극장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설치극장 ‘정미소’ 건물에 앙코르 공연을 알리는 ‘위트’의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극장 정미소(精美所)는 쌀 방앗간 정미소(精米所)와 가운데 ‘미’자의 한자(漢字)가 다르다. 방앗간 정미소가 육신의 양식인 쌀을 도정하는 곳이라면, 정미(美)소는 정신의 양식인 예술을 창조하는 공간이다.
 
작명자 윤석화(尹石花·49)의 해석이 그럴 듯하지만 척박한 연극계와 사양길에 들어선 시골 정미소가 오버랩 되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지금 농촌에 가도 발동기가 통통거리는 정미소는 찾아보기 어렵다.
 
봄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 속의 윤석화는 삭발이다. 난소암에 걸린 대학교수 역을 하느라 머리를 잘랐다. 17세기 영시를 전공한 영문학자 비비안 베어링 교수는 연극 공연 2시간 동안 죽어간다. 두 시간짜리 모래시계다.
 
정미소 건물 4층에 공연전문 월간지 ‘객석’의 사무실이 있다. ‘객석’은 창간 20년을 넘기는 동안 주인이 몇 차례 바뀌었다. 우리나라 유일의 이 공연전문지는 ‘가난한 예술’을 다루는 ‘활자매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정미소(精美所)’의 여주인
 
‘객석’ 도서실에서 만난 윤석화는 피곤해 보였다. 윤씨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1805∼75) 탄생 200주년 홍보대사로 덴마크에 갔다가 전날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여독이 덜 풀려 어젯밤 1분도 못 잤어요”라고 했다.
 
그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가발을 벗은 무대 위의 모습이 더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앙코르 공연 때는 다시 가발을 벗어던지고 열정 어린 목소리로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의 시를 낭송할 것이다.
 
덴마크가 임명한 안데르센 홍보대사는 500명 가량. 중국 출신 농구 스타 야오밍, 칠레 작가 이사벨 아옌데, 영국 배우 로저 무어, 덴마크의 라우렌티엔 공주 같은 세계 각국의 명사들이다. 한국에서는 윤씨와 이명박 서울시장이 영예를 안았다.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 전야제 퍼포먼스 ‘당나귀와 캐비지 숲’은 음악, 무대장치, 의상, 발레가 총동원된 종합예술이었죠. 코펜하겐 로열 시어터에서 공연이 끝난 뒤엔 왕궁에서 새벽 1시30분까지 만찬이 있었습니다.
 
4월1일 아침에는 덴마크 국립교향악단과 동화 읽기 리허설을 했어요. 6월3일 그들이 우리나라에 옵니다. 안데르센이 태어난 4월2일에는 작가의 고향인 오덴세에서 각 부문에 상을 주는 행사가 있었죠. 시상식 뒤에는 생가와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안데르센의 표기는 ‘앤더슨’으로 정정해야 합니다. 덴마크 발음이 앤더슨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안데르센으로 쓰고 있어요. 일본 글자로 앤더슨 발음을 못 적으니까 안데르센으로 적기 시작한 것 같아요. 식민지 잔재죠.
 
전야제 공연에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영국 배우 로저 무어가 나와 안데르센 이야기를 했습니다. 팝 가수 티나 터너, 올리비아 뉴튼 존이 노래를 했죠. 중국 선양(瀋陽) 서커스 공연도 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의 초기 작품 ‘나이팅게일’의 무대가 중국이거든요.”
 
서울 강남의 우림 청담 씨어터에서 공연한 ‘위트’는 PMC프로덕션이 기획한 여배우 시리즈물이다. 여배우 시리즈는 윤석화를 첫 주자로 내세워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6주 동안 2억8000여 만원의 티켓 판매고를 올렸다. 그만하면 소극장(280석) 공연으론 성공이다.
 
-언론에선 윤석화의 브랜드 파워라고 분석하던데요.
 
“브랜드 파워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마케팅으로 생기는 허상의 브랜드 파워도 있으니까요. ‘연극배우 윤석화의 힘’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작품을 고르는 데도 1년 이상 고민했습니다.
 
30년 동안 연극을 하면서도 늘 ‘이번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이름을 얻고 사랑을 받은 만큼 무대를 떠날 때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객이 더는 원치 않을 때 저는 스타답게 떠나야 해요. 그래서 매번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위트’ 앙코르 공연이 4월22일부터 정미소에서 6주 동안 열린다. 위트의 주인공 비비안 베어링과 윤씨는 공교롭게도 같은 나이.
 
-결혼도 안 하고 존 던의 시에 몰두하다 난소암에 걸려 죽는 비비안 베어링이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비비안 베어링은 ‘난 두뇌만 명석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따뜻함이라곤 없고 공부만 하는 여자였죠. 그러나 정직했습니다. 죽음을 맞아 삶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이러니는 대단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극과 극을 메타포(은유)로 연결하니까요.
 
한 개인의 죽음은 슬플 수밖에 없지만 베어링 교수의 죽음은 일종의 부활이라 생각합니다. 치열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그녀가 남긴 말은 ‘죽음도 나를 죽일 수 없다’였습니다.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은 죽음도 결코 죽일 수 없다는 거죠. 서재로 들어가는 마지막 신(scene)을 저는 일종의 부활이라고 해석했어요.”
 
-홈페이지 머리에 ‘연극은 그녀의 이데올로기이고 친구이며 생(生)이고…전부다’라는 글이 떠 있더군요.
 
“연극은 제 삶에 있어 구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연극에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좋은 모습은 없었을 것 같아요. 연극을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행복했죠. 저는 사는 법을 연극에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죠.”
 
‘신(神)의 아그네스’는 윤석화라는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 작품이다. 총 532회 공연에 10만 관객이 몰려 한국 연극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그가 직접 번역을 하고 타이틀 롤을 맡았다. 뉴욕대에서 드라마를 공부할 때 이 작품을 보고 감동받아 여름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 무대에 올렸다. ‘객석’ 대표 사무실에는 27세 때의 윤씨 모습이 담긴 ‘신의 아그네스’ 공연 포스터가 걸려 있다. 여성으로서 전성기를 맞은 윤석화가 수녀복을 입은 모습이 매혹적이다.
 
30년 동안 매번 최선 다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좋은 번역극을 골라내는 것도 학교 공부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죠. 우연히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이 작품이야말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 판단했습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죠. 나는 누구일까. 신은 무엇일까.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런 의문을 누구나 갖고 있죠. 제가 생각하는 연극이란 좋은 질문거리를 찾아 관객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대답은 관객이 스스로 찾아야죠.
 
‘신의 아그네스’는 여자 셋만 나오는 연극입니다. 무대를 장악하는 메시지, 구성 그리고 희곡의 힘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어요. 대본도 천신만고 우여곡절 끝에 거의 기적적으로 구했어요. 저자하고 협의가 안 이뤄져 대본이 그때까지 출판되지 않고 있었죠. 어느 날 공연 끝나고 그냥 무작정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어요. 제가 극장의 구조를 잘 아니까요. 드레스 룸으로 가서 연출자를 만났습니다. 연출자가 자기들만 볼 수 있는 대본을 하나 구해 저한테 줬습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번역을 시작해 귀국하자 마자 이틀밤을 꼬박 새우며 대본을 완성했습니다.
 
여러 극단에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실험극단 윤호진씨와 손잡고 작품을 했죠. 처음 연습할 땐 참 서러웠어요. 연습장소가 없어 아파트 부녀회관을 빌렸죠. 그런데 제가 애 낳는 장면에서 하도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쫓겨났어요. 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작품이 될 거라고 믿었어요.
 
‘닭 모가지에 새 다리’로 뉴욕 맨해튼을 거닐며 가난, 서러움, 외로움, 배고픔을 연극이란 꿈 하나로 이겨냈습니다. 순간순간이 연극을 향한 기도였습니다. 이 작품을 고르고 나서 남들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노력했습니다. 기도가 헛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잘될 줄은 몰랐죠. 대한민국 연극계에 이변이 일어났죠.”
 
-‘닭 모가지에 새 다리’는 무슨 뜻입니까.
 
“제가 닭 모가지에 새 다리거든요. 다리가 가늘고 목도 가늘어요.”
 
윤석화는 가슴이 살짝 드러나는 네크라인의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카디건을 걸쳤다. 카디건은 윗단추 하나만 잠가놓아 가슴 위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그녀는 손으로 카디건 앞자락을 여미다가 제스처를 할 때는 놓아버렸다. 그때마다 가슴이 노출됐다. 아무나 흉내내기 어려운 과감한 옷차림이다.
 
치마도 무릎 밑으로 다리가 들여다보이는 소재였다. 그녀는 블라우스를 여민 손을 풀고 가끔 치마를 끌어내렸다. 카디건을 놓고 무릎을 가리면 가슴이 보이고, 가슴을 가리기 위해 카디건을 여미면 무릎이 비쳤다.
 
그가 마치 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인터뷰’라는 모노드라마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연극 대사처럼 톤의 높낮이를 조절하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닭 모가지에 새 다리’
 
윤석화는 서울 금란여고 재학 시절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해 인기 ‘짱’이었다. 자전거도 타고 탁구도 치고 노래도 불렀다. 성적도 꽤 좋은 편이었다.
 
가수 조영남은 30여 년 전 금란여고 채플시간에 초대돼 성가를 부른 적이 있다. 초록색 교복의 여학생들이 가득 찬 강당에서 똘망똘망한 여학생이 사회를 보고 있었다. 재담이 뛰어났다. 조영남은 행사가 끝난 뒤 그 여학생을 따로 불러내 “나중에 너는 뭐가 돼도 크게 될 애야” 하고 예언했다. 그 여학생 MC가 바로 윤석화다.
 
“조 선생님은 원래 성가를 한 곡만 부르기로 돼 있었죠. 제가 MC를 맡아 분위기를 띄워 여러 곡 부르게 했어요. 조 선생님이 ‘너 같은 MC는 처음 만났다. 네가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구나’라고 하더군요.”
 
이화여대 생활미술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다들 미팅하고 땡땡이 칠 궁리만 하고 공부를 소홀히 했다.
 
“대학이 재미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오로지 유학만 생각했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했다. 초등학교 때도 교단에 불려나가 노래를 부른 적이 많았다. 중·고교 때는 음악선생님이 새 노래를 가르쳐주고 나서 가장 먼저 그에게 부르게 했다. 선생님들이 지루한 수업시간에 “누가 나와 노래 한 곡 해봐라”고 하면 여기저기서 “윤석화요, 윤석화요!” 하고 소리질렀다.
 
대학 1학년 때부터 CM송을 불렀다. 첫 작품은 ‘맛좋은 다시다.’ 1977년에 부른 ‘오란씨’는 ‘국민가요’처럼 애창됐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필자는 오란씨 CM송 가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CM송을 거의 혼자 싹쓸이했다. 방송을 탄 CM송이 약 300곡, 녹음만 하고 끝난 것까지 합하면 1000곡쯤 된다. 한 곡 부를 때마다 5만원씩 받았다. 보통 직장인 한 달 봉급에 가까운 돈이었다. 그때 번 돈은 연극할 때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
 
CM송 녹음을 하는 사무실 옆에 ‘민중극단’이 있었다. 극단 사람들이 기막히게 노래 잘하는 윤석화에게 연극도 해보라고 권유했다. 추억거리를 만드는 기분으로 워크숍 작품 ‘미운 오리새끼’에 조연으로 참여했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각색해 올린 아마추어들의 무대였다. 연극과의 첫 만남을 안데르센으로 시작해 그의 탄생 200주년 홍보대사까지 했으니 묘한 인연이다.
 
연극 출연은 재미있었지만 CM송처럼 돈벌이는 되지는 않았다. 다시 CM송을 부르며 유학자금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출가 정진수씨가 찾아와 작품을 하자고 했다. 정씨는 안 하겠다고 버티는 그에게 세 번씩이나 찾아와 “대본이나 한번 읽어보고 얘기하자”며 셸라 딜래니의 ‘꿀맛’을 던져줬다. 정씨는 원래 주연을 당시 최고의 인기 탤런트이던 김영애에게 주려던 참이었다고 넌지시 흘렸다. 그 시절 김영애는 지금의 이영애보다 더 유명했다. 김영애에게 갈 것을 내게 준다? 치기어린 도전의식이 생겨났다.
 
윤석화는 중학교 2학년 때 단테의 ‘신곡’을 읽었을 정도로 책벌레였다. 그때까지 읽은 문학작품이 안개 같은 거라면 ‘꿀맛’은 소낙비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CM송과 연극에 빠져 있는 동안 대학에는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는 언니들이 있는 미국에서 유학 하고 싶었지만, 언니들이 “한국에서 언더(학부)를 마치고 오라”고 말렸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를 졸업한 아버지의 동기동창이 일본 메이지(明治)대 이사장으로 있었다. 그는 메이지대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일본 비자를 받고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즈음 신문에 일부 부유층 자제들이 외국유학을 하며 호화사치 생활을 한다는 기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두꺼비’ 만화가 롤스로이스를 탄 유학생을 그렸다. 얼마 안 가 외국유학 전면 금지령이 내려졌다. 일본 비자를 세 번 연장하며 기다렸지만 유학금지 조치는 풀리지 않았다.
 
“유학을 잊고 연극을 열심히 했는데, 제가 연극영화과를 나오지 않았잖아요. 제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이해시키기가 힘든 거예요. 다른 배우들이 ‘윤석화 네가 연극에 대해 뭘 알아’ 하면 저는 속으로 ‘너네들 공부 못했으니까 드라마센터 갔지. 나는 그래도 이대 출신이야’ 했지만 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죠.”
 
유학자금 벌려고 CM송 싹쓸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온 연출자가 그에게 유학을 권유했다.
 
“너는 공부를 더 하면 좋겠다. 나는 가끔 너한테 진짜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너는 작품에서 집어내더라. 그런데 우리 사회는 디그리(degree·학위)가 없으면 아무리 옳고 바른 소리를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너 같은 사람에겐 꼭 디그리가 필요해.”
 
“연극계에서 제가 알려질 만큼 알려졌을 때였어요. ‘주간여성’ 표지에도 나가고 언론 인터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학부를 4, 5년 다니고 나면 잊혀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연극을 평생 업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하다 미래를 위해 4년이든 5년이든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과감하게 미국으로 떠났죠.”
 
윤석화는 마침내 뉴욕대 공연학 학사 ‘디그리’를 안고 귀국했다.
 
그는 1992년에 ‘별 바람 하늘 꽃’, 2002년에는 ‘꽃밭에서’라는 음반을 냈다.
 
‘별 바람 하늘 꽃’은 나오자마자 신촌 대학가에서 ‘톱 10’에 올랐어요. 노영심이 찾아와 제 음반이 신촌에서 어떤 땐 넘버 3, 어떤 땐 넘버 5라고 알려줬어요. 음반을 그 정도 띄우려면 매니저가 붙어 난리를 쳐야 하잖아요. 토월극장에서 한 달 동안 ‘별 바람 하늘 꽃’이란 공연을 해 그 효과도 톡톡히 봤죠. ‘꽃밭에서’는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어요.”
 
-인터넷으로 몇 곡 들어봤는데 노래가 참 좋더군요.
 
“아유, 감사합니다. 작가 이제하씨가 ‘윤석화처럼 노래 잘 부르는 여자를 못 봤다’고 그런대요. 왜 이 여자가 가수를 안 하냐고.”
 
필자는 “인터뷰에 앞서 사전 취재를 하느라 이곳저곳에 물어봤는데, ‘연기보다 노래가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전해줬다. 노래 쪽으로 보면 최상의 칭찬이지만 연극인 입장에서는 다소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의 반응이 보고 싶어 가감 없이 전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윤석화의 연기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닐 것이다. 최고의 슈퍼스타도 30% 정도 ‘안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 취향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죠. 그건 저한테 최고의 칭찬이죠. 글쎄요. 그러나 연기보다 노래를 더 잘할 리는 없어요. 제가 아주 더미(dummy·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평생 노력한 게 낫겠지요.
 
사실 제가 노래를 잘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두 번 다 바쁠 때 판을 냈어요. 6시간 동안 10곡을 불러 제친 거죠. 음반으로 나온 뒤에 몇 군데 아쉬움이 남았어요.”
 
문화교류 통해 일본 잘못 깨닫게 해야
 
윤석화는 1남6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내리 딸 다섯을 낳고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아들 하나 더 얻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출산한 게 또 딸이었다. 부모가 돌 잔치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던지 그는 지금도 돌 사진이 없는 것이 못내 서운하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부족함이 없이 잘살았다. 외가도 부자였다. 4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의 친정은 그 시대에 개성에서 닷지(Dodge) 자가용을 굴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윤씨가 중학교 3학년이던 때 의사를 하던 둘째언니가 미국으로 이민갔다. 둘째언니가 미국에 자리잡고 나서 친정 식구들을 하나둘 불러들여 윤석화만 남겨두고 모두 미국으로 갔다. 아버지, 어머니도 미국에서 살다 세상을 떠 묘소가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도시 카멜에 있다.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한때 시장을 지낸 작은 도시다.
 
-30년 연극배우 생활에서 대표작은 역시 ‘신의 아그네스’입니까.
 
“‘신의 아그네스’는 잊을 수 없는 작품이지만, 아직도 그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는다면 제가 게으른 배우죠. 작품도 좋고 흥행에서 성공을 해야 대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좋았는데 흥행이 안 된 경우는 어쩌면 마스터베이션(자위)일지 모릅니다. 작품이 좋다면 궁극적으로 관객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 만큼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예술은 생산성과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술에도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지만 절대로 비굴해져서는 안 되는 거죠. 맑아지기 위한 헝그리 정신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모노드라마였던 ‘목소리’(1990)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겠죠.
 
세미 뮤지컬 ‘딸에게 보내는 편지’(1992)는 뜨거운 사랑을 받았죠. 영국의 아놀드 웨스커가 쓴 작품을 제가 세계에서 초연했어요. 이번에 코펜하겐에서 만난 영국 저널리스트에게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서울에서 월드 프리미어(premiere·초연)했다고 하니까 너무 놀라더라고요.
 
‘덕혜옹주’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죠. 저는 한국 역사에서 작품 소재를 끌어내 창작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숙제를 나름대로 안고 오래 고민했어요. 그 산물이 ‘덕혜옹주’였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고종이 후궁 양귀인에게서 얻은 고명딸. 조선왕조 몰락과 함께 비극적 인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는 정혼한 상대가 있었는데도 열세 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대마도(쓰시마) 번주(藩主) 소 다케시와 강제 결혼한다.
 
그는 어머니와 모국을 그리워하며 조발성 치매 증세에 시달리다 결국 결혼 3년 만에 이혼한다. 정신병원에서 광복을 맞았지만 조선왕족의 귀국을 반기지 않던 정부 입장 때문에 50세 되던 1962년에야 조국 땅을 밟았다.
 
“정복근 선생님의 집요한 작가정신, 연출자 한택수 선생님의 끈질긴 작품 추구가 합쳐져 좋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일본을 지탄하는 작품을 들고 일본에 가서 공연을 했거든요. 일본 젊은이들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런 잘못을 했는지 정말 몰랐다, 우리의 사죄를 받아다오’라고 말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이 ‘덕혜옹주를 보라’는 제목으로 통쾌한 사설을 썼죠. 한 시골 할머니는 덕혜옹주가 자기 동네에 살았다면서 제 손을 붙잡고 울었어요.
 
그는 정신 나간 여자가 아니었어요. 말을 하면 미쳐버리니까 침묵으로 자기를 지켜낸 거예요. 침묵으로 승리한 거예요.”
 
-일본이 덕혜옹주에게도 얼마나 몹쓸 짓을 한 겁니까.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서 악독한 짓을 무수히 저질러놓고도 제대로 사죄하지 않아요.
 
“한일관계에서도 문화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덕혜옹주’ 같은 공연을 정부가 후원해 일본 전역을 돌면서 공연해보세요. 정치가들이 얘기를 하면 뭐합니까. 말싸움만 되지요. 문화의 힘으로 일본 국민이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잠을 한숨도 못 자 피곤하다”며 잠시 쉬었다 하자고 했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나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기자가 이래라저래라 포즈를 지시할 필요가 없었다. 셔터 누르는 소리가 나면 척척 포즈를 바꿨다. 연기하듯.
 
-대부분의 삶을 극장에 바쳤는데요. 극장이 갖는 사회문화적 기능에 대해 짧게 강의해주세요.
 
“도저히 짧게 말할 수는 없는데…. 자신의 또 다른 모습 혹은 자신이 동경하는 그 어떤 것, 자신이 아직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아직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 무한한 꿈을 꿀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극장이라는 공간은.”
 
-대사 외우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일부러 외우려고 해본 적이 없어요. 작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인물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연구하다보면 대사는 자연스럽게 외워집니다. 대사 외우기보다 연기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힘들죠. 배우층이 두텁지 못해 솔직히 저하고 어린 배우들하고 갭이 크거든요. 앙상블을 이루기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제가 어린 배우들한테 똑같은 대사를 2시간씩 맞춰줄 때가 있어요.”
 
연극으로 돈 벌 수 있음을 보여줬다
 
‘신의 아그네스’로 일약 스타가 됐지만 연극쟁이의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차비가 없어 외출하지 못한 적도 있고, 단칸방의 가스비가 3개월 연체돼 라면조차 끓이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는 연극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7.5평짜리 월셋집에서 13평 전셋집으로, 나중에 15평형 아파트를 갖게 됐을 때 세상이 자기 것 같았다.
 
-송강호씨가 영화배우가 돼 돈을 많이 벌었지만 연극배우 시절엔 개런티로 숙식도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1980년대에 무대 소품 값도 안 되는 개런티를 받으면서도 그냥 연극이 좋아서 했다는 거죠. 연극은 대중에게 동시에 보여줄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죠. 연극배우의 가난은 숙명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런 고생을 15년 가량 했죠. 윤석화라는 이름 석 자는 유명해졌지만 수입이 없으니 오죽하면 세무서에서 전화가 걸려왔겠어요. ‘유명한 배우가 이렇게 수입이 없냐’고 묻는 거예요. 영화나 TV 같은 대중예술이 돈 벌기는 훨씬 좋죠. 마켓이 크니까.
 
하지만 연극이 반드시 돈을 못 번다곤 생각지 않았어요. 어떤 히어로가 나오느냐, 어떻게 작품을 잘 만드느냐에 따라 연극도 돈을 벌 수 있어요. 송강호는 좋은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저처럼 15년 견뎠으면 결코 영화배우보다 돈을 적게 벌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아요. 연극을 통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제가 보여줬지 않습니까.”
 
-재테크를 하는 편입니까.
 
“재테크는 모르고요, 저축을 해요. 일에 빠져 살기 때문에 돈 쓸 시간이 없어요. 만날 공연만 하는데 어디 가서 무슨 돈을 씁니까.”
 
-옷을 사고 맛있는 밥을 먹자면 돈이 들지 않습니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깍두기 국물에 밥 비벼 먹는 거예요.”
 
자취생 메뉴다. 연습할 때는 김밥 한 줄에 장국으로 끼니를 때우는 적도 많다.
 
“호사를 누린 건 결혼하고 나서였어요. 남편이 저한테 지극정성이거든요. 어떨 땐 비싼 핸드백을 사주기도 하고 결혼할 때도 패물을 많이 받았죠.
 
결혼 전에는 극장하고 집이 전부였어요. 무조건 많이 자고 아무도 안 만나고 공연장에만 가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어요.”
 
-스스로 모았다고 하지만, 절약하고 저축해서 돈 모으는 데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죠. 윤 선생 재산이 불어난 것은 김석기 사장과 결혼하면서부터 아닌가요.
 
“아니죠. 제가 제작을 해 돈을 벌었어요. 도저히 낮은 개런티로는 못 견딜 판이라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한 거예요.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13평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전세금을 빼내 월세로 옮기고 나머지 돈을 투자했죠. 전세금으로 1986년 뮤지컬 ‘송 앤 댄스’를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했습니다. 제가 기획, 연출, 제작, 번역, 주연을 다 했죠. 사흘 만에 표가 매진돼 암표 장수가 돌아다녔어요. 호암아트홀은 1억원을 챙겼고 저는 3000만원을 벌었어요. 제가 벌어서 2800만원 주고 15평 아파트를 산 거예요.
 
1989년엔 ‘하나를 위한 이중주’라는 작품을 제작해 흥행에 성공했죠. 그때부터는 굳이 제가 제작을 안 해요. 거의 매달 공연을 하니까요. 1년이면 열 달은 공연하죠.”
 
신의 위해선 똥바가지 써도 좋다
 
윤석화는 영화를 딱 한 편 찍었다. ‘레테의 연가’(1987)에 신성일과 함께 출연했다. 드라마는 세 편 했다. KBS의 주말연속극 ‘고향’, MBC 미니시리즈 ‘불새’, 베스트셀러극장 ‘샴푸의 요정.’
 
“‘고향’은 솔직히 형편이 어려워서 했어요. 월세방을 구해야 하는데 보증금이 없어서 선배 언니한테 꿨죠. 남한테 단 돈 1원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데 돈 갚을 길이 막막하더라고요.
 
MBC ‘불새’의 연출가 김한영씨는 저하고 민중극단에 잠깐 같이 있었어요. 그 분이 MBC 미니시리즈 1탄 작품을 내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고요. 저는 살면서 이런 게 있어요.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똥바가지를 써도 좋다는 거죠.
 
‘샴푸의 요정’은 장정일씨가 극본을 쓰고 황인뢰씨가 연출했어요. 황 감독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샴푸의 요정’은 채시라의 데뷔 작품입니다. 황 감독한테 이 작품을 왜 만드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 만든다’고 했어요. 제가 코미디를 잘하거든요. 그래서 했어요.”
 
-연기자로서 드라마와 영화, 연극이 어떻게 다르다고 봅니까.
 
“드라마와 영화는 연출예술, 감독예술입니다. TV 드라마는 바스트 셧, 클로즈 셧, 풀 셧이 대본에 지정돼 있습니다. 클로즈 셧으로 얼굴만 나올 때는 연기의 폭을 줄여야 되죠.
 
반면에 연극은 배우예술이지요. 저는 무대에서 ‘이때는 관객들이 내 눈만 볼 것이다’ ‘이때는 내 얼굴 구도를 볼 것이다’ ‘이때는 전체를 볼 것이다’라고 계산하면서 연기합니다. 심리적 계산인데 적중해요.
 
영화나 드라마를 외도라곤 생각지 않아요. 똑같은 배우입니다. 물론 연극, 영화, 드라마에 따라 잘 어울리는 배우가 있겠죠. 저는 TV와 영화에 어떤 편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연극에서 내 자리를 지키려다 보니까 여력이 없어 못하는 거죠.”
 
-연극도 불황에 민감합니까.
 
“대중예술은 굉장히 트렌디하죠. 그러니와 경기 곡선을 많이 타지요. 순수예술 쪽이 훨씬 덜 타는 편이죠.”
 
책벌레였다는 그에게 감명 깊게 읽은 문학작품을 묻자 “요즘 노안(老眼)이 와 책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요. 눈이 금세 피곤해지니까”라고 했다.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독서편력이 길게 이어졌다.
 
“어렸을 때는 염상섭의 ‘삼대’ ‘표본실의 청개구리’ 같은 작품을 좋아했어요. 친일파니 어쩌니 해도 이광수의 작품을 많이 읽었어요. 심훈의 ‘상록수’,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강은교의 산문집 ‘빈자 일기’,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황동규 시집은 거의 외다시피 했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데미안’,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와 보봐르 작품도 좋아했죠.
 
박경리의 ‘토지’는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읽어야 된다고 해서 읽었고요. 박경리 선생 작품은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해 안 읽은 게 거의 없어요. 박 선생은 단편도 참 좋아요.
 
‘대망’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이란 나라를 우습게 봐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죠. 누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장군이 돼서 많은 부하를 거느릴 수 있느냐’고 묻자 도쿠가와는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고 대답했어요. ‘이렇게 멋있는 장군이 일본에 있구나’ ‘이 사람한테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김훈의 ‘칼의 노래’, 돌아가신 최명희씨의 ‘혼불’도 잘 봤습니다.”
 
-‘혼불’은 조금 지루하지 않습니까.
 
“안 읽을 수 없는 게, 한땀 한땀 손바느질로 만든 작품 같아요. 혼이 들어 있는 글이죠. 지루하긴 하죠. 솔직히 그냥 쉽게 읽히는 책은 절대로 아니에요.”
 
뒤늦은 결혼과 상상임신
 
윤석화는 38세에 금융인 김석기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삼성가(三星家)의 손녀와 이혼하고 스타 연극배우와 결혼하는 바람에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2년 동안 연애하다 1994년 식을 올렸다. 김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창업투자, 한누리투자증권, 중앙종합금융 사장을 지냈다. 전처 이미경씨는 현재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으로 한국 영화제작 및 배급계의 ‘큰손’이다.
 
-사생활에 대해 물어보겠습니다. 결혼은 왜 그렇게 늦게 했습니까.
 
“연극하다 보니까요. 저는 정말 연극밖에 몰랐어요. 남자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요. 후배 배우가 ‘언니는 연애도 안 하냐’고 놀리다가 제 연극을 보고 나서는 ‘언니가 연애를 안 해도 사는 이유를 알겠다. 언니는 진짜 연극과 연애하더라’고 했어요. 한눈팔 여유가 없었죠. 그리고 남자가 저를 좋아해도 제가 좋아하지 않으면 감을 못 잡아요.”
 
-대학교 다닐 때 미팅도 안 했나요.
 
“미팅을 우습게 알았죠. 물론 남자 친구는 있었습니다. 사귀다가 싫증나 차버린 적도 있었고요. 제가 먼저 ‘필’이 꽂혀 ‘어머 쟤랑 사귀어봤으면’ 해서 막상 사귀다가 1년 넘으니까 어휴 ‘쟤는 날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어휴 지겨워’ 하면서 끝낸 거죠.
 
연애를 잘하는 여자가 있잖아요. 저는 ‘연애과’는 절대로 못 됐어요. 그 점에서는 제가 숙맥이었습니다.”
 
정미소가 들어 있는 4층 건물은 김석기씨의 소유다. 윤씨는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다”면서 “우리가 계속 법정 다툼에서 이기고 있어서 이 건물도 곧 풀릴 것 같다”고 말했다.
 
윤석화씨 표현을 빌리면 남편은 ‘말 못할 사연을 안은 채’ 외국으로 떠났다. 윤씨마저 남편을 따라 떠나면 월간 ‘객석’은 당장 문을 닫을 형편이었다. 그때부터 한 달에 두 번씩 비행기를 타고 남편과 일터를 오가는 고단한 이산가족이 됐다. 김씨는 2001∼2004년 일본 히토쓰바시(一橋)대에서 강의를 하다 지금은 홍콩에서 사업을 한다. 윤씨는 공연기간에도 일요일 오후에 홍콩으로 갔다가 가족과 만나고 화요일에 귀국한다.
 
-남편은 국내에 들어올 여건이 안 됩니까.
 
“신랑이 한국사회랑 너무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좋게 말하면 너무 앞서간다고 할까요.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없고…. 억울한 대목이 있었죠. 그로서도 물론 부덕한 것이 있었을 테고 실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상처와 아픔이 너무 컸죠. 그래도 조국인데 언젠가는 오겠죠.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윤석화는 결혼 후 아이를 갖고 싶어 상상임신을 한 적도 있다. 두 번이나 인공수정에 실패하고는 출산을 포기했다. 그는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의 부탁을 받고 미혼모 복지시설인 동방사회복지회에 엄마 없는 아기들의 일일 엄마가 돼주러 갔다가 수민이를 아들로 입양했다. 그는 수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입양과 양육에 관한 이야기를 써 책으로 펴냈다.
 
-인터넷에 ‘입양이 무슨 자랑이냐. 몰래 친자식처럼 키워야지. 그것이 아이를 위하는 것 아니냐’고 올라온 글을 읽고 가슴아파했다면서요.
 
“철없는 사람이 한 이야기겠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몹시 안타깝더라고요. 너무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공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입양 사실을 감추지 않았을 거예요. 왜 거짓말을 합니까.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아이에게 어떤 사랑을 주느냐가 문제인 거죠. 생명은 모두 다 소중합니다. 제가 어떤 불편과 리스크도 감당해냄으로써 국내에서 더 많은 생명이 따뜻한 가정으로 갈 수 있다면 저나 수민이나 좋은 일을 하는 거죠.”
 
-수민이가 성인이 됐을 때 혹시 생모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당연히 만나게 해주지요. 이 다음에 네가 생모를 찾고 싶을 때는 내가 나서서 찾아주겠다고 책에도 썼어요. 그때 수민이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남들에겐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둘이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요. 아이는 찾고 싶은데 아이 엄마가 나설 수 없는 처지일까봐 걱정돼요. 지금이라도 수민이의 생모가 나타나면 따뜻하게 손 잡아주고 싶어요.”
 
4억5000만원 털어 ‘객석’ 인수
 
-좀 결례가 되는 질문인데요. 답변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 첫 키스는 몇 살 때 해봤습니까.
 
“스물세 살 때요. 미국 유학 바로 전이죠.”
 
-상대 남성도 공개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오랫동안 사랑한 사람이에요. 저희 신랑도 물론 알고 있고요. 결혼할 때 그런 거 다 얘기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걸 다 알고도 저를 사랑할 수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짓궂은 질문을 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 나이에 짓궂을 게 뭐 있어요.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좀 그렇잖아요. 저희 시댁이나 신랑이 기분 좋을 거야 없겠죠. 자기만 알고 있으면 괜찮지만 제가 언제 첫 키스를 했다고 공개하면 그걸 좋아할 남편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남편이라도 별로 안 좋을 거 같아.”
 
필자와 윤씨, 그리고 남편 김씨는 비슷한 나이다. 그래서 필자가 “20∼30대에 들었다면 불면의 밤을 보내겠지만 우리 나이 정도 되면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자 그는 “그러면 우리 신랑도 이해하겠죠”라고 대답했다.
 
‘객석’은 1984년 창간한 월간 공연전문지다. 최원영씨가 하던 것을 1999년 4월에 인수했다. 윤석화는 미국 유학 시절 ‘객석’ 뉴욕 통신원을 한 인연이 있다. 영화배우 율 브리너를 만나 인터뷰 기사를 쓴 일도 있다.
 
“이 책이 없어지면 또 다른 책이 생기겠죠. 그런데 왜 모래성처럼 쌓고 부수기를 계속해야 하죠? 적어도 ‘객석’이라는 잡지 하나는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인수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모아놓은 돈 4억5000만원을 고스란히 투자했어요. 후배들이 맡아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는데 제가 맡지 않으면 없어질 것 같더라고요. 그 돈은 결국 제가 CF 해서 벌었어요. 제가 CF를 한 것도 연극배우로서 관객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죠.”
 
-CF를 몇 건이나 했습니까.
 
“맥심 모카골드 커피 광고 딱 하나 했죠. 그러나 3년 계속 했거든요. ‘객석’은 아무리 힘들어도 5년은 버텨보고 아무리 좋아도 5년 후에는 떠나려고 했어요. 지난해 9월이 만 5년이었죠. 사람들이 약아져서 돈 안 되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문화관광부나 기업 같은 데서 거들어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하기엔 참 힘들어요. 1년만 더 버티면 제가 없어도 잘 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제부터 잘 돼야만 좋은 인수자가 나타날 겁니다. 그래서 요즘 기도하고 있어요.”
 
요즘 활자매체들은 모두 어렵다. 돈과 공을 들여 만든 콘텐츠를 독자들이 인터넷에서 공짜로 얻는 데 익숙해져 있다.
 
-민법에는 부부별산제가 규정돼 있습니다. 결혼해 같이 살더라도 남편과 아내의 재산이 구분되는 거죠. 남편 재산 빼고 순수한 윤 선생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동산, 부동산 포함해서요.
 
“지금은 아무 것도 없죠.”
 
-연극만 해도 돈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못했네요.
 
“하지만 저는 가난하다고 생각지 않으니까요. 돈 벌려고 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어요. 월간 ‘객석’만 해도 한 달에 2000만원은 깨져요. 그래도 제가 지금 1년에 이럭저럭 2억원은 벌어요. 그러니까 이 살림을 꾸려나가죠. 만날 허덕허덕 하지만.”
 
‘돌에 꽃을 피우는 사람’
 
그는 강남구 청담동의 100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이것도 남편 소유다. 그녀는 재산이 없다고 잡아떼다가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시골에 제 소유의 조그만 집이 하나 있어요”라고 말했다.
 
“겉에서 보면 창고 같은 집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코지(cozy)하지요. 결혼하기 전에 꿈이 뭐였냐 하면 시골에서 사는 거였어요. 그래서 조그만 집을 하나 지었어요. 그래도 1억5000만원 정도는 나갈 거야.”
 
-‘정미소’라는 극장 이름이 특이합니다.
 
“정미소에서 쌀을 정성스럽게 도정해내듯, 예술을 생산하는 장소라는 의미예요. 사람이 사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죠. 육체와 정신. 육체만 있고 정신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볼 수가 없죠. 육체의 양식이 있어야 되듯이 정신에도 반드시 양식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정신에 필요한 양식이 예술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정신에 필요한 예술을 생산해내는 정미소지요.”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는 글을 재밌게 쓴다. MBC PD 출신이다. 그가 쓴 ‘석화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을 인용해본다.
 
‘살아 생전 몇 명의 천사와 몇 명의 천재를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민망하고 쑥스러워 못 견딜 테지만 그대는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천재임에 분명하다. 대사를 외우는 건 기술이고 연기를 하는 건 재주이지만, 그대에겐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어쨌든 석화는 제대로 몸값 이름값 하는 여자다. 무생명(돌)에 생명(꽃)을 피우는 사람 아닌가.’
 
“제가 천재였다면 아직까지 살아 있겠어요? 천재는 다 요절하잖아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 보면 분명히 천재는 아니고요. 다만 천재 아닌 저도 남다르게 예민하죠. 저도 힘든데 진짜 천재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는 거죠. ‘너 남들보다 짧지만 굵게 살았다. 진짜 너 수고했으니까 내 품으로 일찍 들어와 천국에서 평안을 누려라’ 하고 데려가는 거죠. 저는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고요. 다만 예술하는 사람한텐 ‘자뻑’은 필요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뻑 가는 거….”
 
-‘자뻑’이라…. 자아도취를 그렇게도 표현하는 건가요.
 
“자아도취도 예술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 생각해요. 다만 거기에 빠지면 안 되죠. 저는 늘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지요. ‘정말 내가 너무 괜찮아’ ‘어 이건 나밖에 할 수 없어’ 하고 감탄했다가도 ‘나는 왜 이렇게 해도 해도 안 될까’ ‘이렇게 안 되는 거면 이제 그만둬야 하나보다’로 바뀌며 슬럼프를 맞죠. 내려갈 때는 한없이 내려가요. 조울증이 심해요.
 
나이를 먹으면서 조와 울의 갭이 조금 완화되는 것 같아요. 생활인으로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의 어떤 특장이 닳아진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생깁니다.”
 
-아까 ‘위트’가 성공한 비결이 뭐냐 물어보니까 ‘윤석화의 힘’이라고 했는데요. 그것도 ‘자뻑’적 표현입니까.
 
“그건 아니고요. 예전엔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는데요. 이젠 그런 부분에서 조금 당당하고 싶어요.”
 
늘 천국과 지옥 오간다
 
신문 문화면의 단골손님인 윤석화에게 고언(苦言)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극을 오래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만날 새로운 것, 트렌디한 아이돌 스타(idol star)에 환호하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밸런스를 갖춰야지요. 어른도 존경을 받아야죠. 진보와 보수가 만나 역사를 이루는 것 아닙니까. 진보만 있어서도 안 되고 보수만 있어서도 안 돼요.
 
지킬 건 지키고 앞으로 나갈 건 나가야 되는데 너무 새로운 것에만, 젊은 아이들한테만 편중되는 것 같아요. 문화선진국에 비해 심해요. 그럴 때 조금 섭섭하고 안타깝지요.”
 
그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란다. 교통방송에 출연하기로 약속이 돼 있는데 늦었다고 했다.
 
필자가 “먼저 떠나세요. 짐 정리해서 천천히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죄송해요. 제가 못 챙겨드려서. 나중에 연락주세요”라고 말하곤 종종걸음을 쳤다. 덴마크에서 귀국한 다음날 오전에 ‘신동아’ 인터뷰와 방송출연 일정을 연달아 잡아놓은 것이다.
 
경기도 문화의전당 홍사종 사장은 “윤석화는 숨가쁘게 살아가는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여 한숨 돌리게 해놓고 영혼을 치유해주는 외로운 광대”라고 평가했다.
 
“관객에게 끊임없이 자기성찰의 질문을 던져 삶을 깨우쳐주는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배우입니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자료출처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