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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들여다 보기] 한승헌

鶴山 徐 仁 2006. 7. 9. 09:19
2005년 6월
 
한승헌(韓勝憲·71) 변호사는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양심수와 시국사건의 단골 변호인이었다. 정권의 미움을 사는 데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다 보니 나서는 변호사가 많지 않을 때였다. 한 변호사는 시국사건 변호를 고수하다 중앙정보부로부터 보복을 당해 피고인석으로 내려앉기도 했다. 종국에는 유죄판결이 확정돼 8년 동안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법정의 변호인석 아닌 방청석에서 시국사건을 지켜봐야 했다.
 
한 변호사는 시집과 수필집을 다수 펴낸 문인이다. 문단의 인연으로 소설가 남정현씨의 ‘분지(糞地)’,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五賊)’ 사건, ‘다리’지(誌)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 체제로 들어서면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사건, 민청학련 사건 법정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는 요즘 변론 사건 실록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한 부분을 이룰 소중한 기록이다.
 
그는 1980년 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와 육군교도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내란음모의 수괴’가 집권을 했고, 그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냈다.
 
시국사건 단골 변호인
 
법무법인 ‘광장(廣場)’에서 원로 변호사로 2선에 물러나 있던 한 변호사는 칠순에 다시 바쁜 시절을 만났다. 그가 독재 치하에서 변론을 맡았던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서 대통령 대리인단으로 참여했다. 지금은 국무총리와 공동으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 위원장을 맡아 매스컴을 탄다. 필자가 인터뷰를 요청하며 “지상(紙上)에서 자주 뵙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그러면 벌써 지하(地下)에 있으란 말입니까” 하는 조크로 받았다.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평검사들의 반발이 시작된 때여서 한 위원장은 인터뷰에 나서길 몇 번이나 사양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올챙이 법조 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필자의 집요한 요청을 떨치지는 않았다.
 
서울 남대문로 2가 해운센터 빌딩에 있는 법무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한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신장 169cm, 체중 55kg의 깡마른 몸매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찍이 ‘구조조정’을 한 몸이라서 ‘단 한 근’도 군살이 없단다. 인터뷰에 앞서 모두(冒頭) 발언을 들었다.
 
“사개추위 위원장은 어느 특정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반을 말해선 안 되는 입장입니다. 사개추위의 최종 결정 과정에서 회의 진행의 책임을 진 사람이 특정 사안에 대해 찬반 의견을 미리 표시하는 것은 중립성과 공정성에 문제를 불러오기 때문이죠. 다만 사법개혁을 위한 논쟁의 관전법(觀戰法) 또는 사안의 감상법을 말씀드릴 수는 있겠죠.”
 
-김승규 법무부 장관을 만나 검찰의 요구사항을 상당히 수용하는 선에서 합의를 해줬지요. 그런데도 평검사들이 수그러들지 않는군요. 나중에 취소했지만, ‘밀실합의’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내기도 했고….
 
“형사소송법 개정안에서 공판중심주의 부분은 종래에 비하면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검사들이 이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민 앞에서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대의를 살려 합의와 봉합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죠. 그래서 법무부 장관과 만나 장시간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자리에서 검찰의 주장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실무진 사이에도 그동안 견해가 엇갈리던 검사의 피고인 신문도 허용키로 의견접근이 이뤄졌지요.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에 관해서는 대법원 판례에 따른 규정을 둔 것뿐이고, 그 보완책으로 조사자 증언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검찰의 의견을 수용한 것이죠. 이미 보도된 대로 영상물의 증거 활용 문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의견 일치를 봤습니다.”
 
그는 후배 검사들이 ‘밀실타협을 수용할 수 없다’는 표현을 쓴 데 대해 못마땅해했다.
 
“사개추위 위원장과 법무부 장관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을 평검사들이 밀실타협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자진 철회했다니 더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공판중심주의에 대비되는 재판이 ‘조서재판’이다. 검사가 조서를 작성하고 피고인이 무인(拇印·손도장)을 찍으면 설사 법정에서 그것을 부인하더라도 증거능력이 인정돼 수사기록 중심으로 재판이 이뤄지는 제도다. 그러나 이미 대법원 전원합의부 판결로 판례를 바꿔 조서재판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편한 재판은 진실규명 어렵다
 
-대법원이 판례를 바꾸어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할 경우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 능력이 없어졌지 않습니까.
 
“대법원 판결로 이미 결론 났죠. 사개추위 개정안은 그것을 법 조문화하는 데 불과합니다. 세계의 흐름이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검찰도 잘 알고 있죠. 다만 검찰의 입증 방법을 보완하기 위해 조사자 증언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원래 사개추위(기획추진단) 안은 검사만 법정에 나와 증언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검사 부담이 과중하다고 해 범위를 넓혀 수사관과 사법경찰관까지 법정증언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공판중심주의는 법관이 수사와 재판을 모두 맡는 제도’라는 비난이 검찰 쪽에서 나옵니다. 영미법계(영국과 미국의 법체계)와 대륙법계(프랑스·독일·일본의 법체계)에서 법원에 유리한 것만 뽑아내 합친 제도로, 공판중심주의가 아니라 ‘법관지상주의’라는 것이죠.
 
“공판중심주의가 수사상 자백 중심에서 공판 중심, 법관 중심으로 이행하는 제도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관지상주의라고 말한다면 수사는 검사지상주의라고 해야겠지요. 공판중심주의는 검사실에서 이뤄진 수사 결과보다 공판정 안에서 또는 공판 절차에서 이뤄지는 심리를 존중하는 제도입니다. 법원이 검찰 못지않게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죠.”
 
-공판중심주의에 대해 고비용 저효율 제도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검찰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어려움이 생겨 앞으로 뇌물죄라든가 조직폭력 범죄를 수사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공판중심주의 도입에 따른 수사기관의 부담과 어려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의 본래 목적인 이른바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든가, 정의 실현, 올바른 형벌권 행사를 위해 어느 제도가 더 바람직한가를 따져봐야죠. 검사의 입증 편의라는 관점에선 자백만 가지고 처벌하면 저비용 고효율이 되겠지만, 비용론자도 거기에 동의하진 않을 겁니다. 다소 비용이 들고 복잡한 절차를 거치더라도 올바른 사실 인정과 형벌권을 행사하는 데 목표를 둬야지요. 편하고 쉽게 재판을 끝내려다 보면 인권보호와 진실 규명이 어렵게 되겠지요.”
 
-외국의 사례는 어떻습니까.
 
“공판중심주의를 쉽게 설명하면 공판절차 외의 수사과정에서 이루어진 자백이나 조서, 그 밖의 증거는 공판절차에서 반드시 심리와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의 공판중심주의는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다만 증거 법규를 어느 정도까지 엄격하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냐 하는 문제는 더 논의할 여지가 있죠. 검사들도 공판중심주의 도입 자체를 막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엄격한 증거법이 가져올 결과를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사개추위에서 형사소송 절차에 관련된 여러 당사자의 균형 있는 시각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개추위에 실무경험이 부족한 소장 학자가 많다는 거죠. 그리고 시한에 쫓기듯 여론수렴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고 밀어붙인다는 불만이 검찰 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사개위)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각계 인사가 참여해 얼마나 많은 논의를 했는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2003년 대법원 산하 사개위가 발족한 이후 1년2개월 동안 정부, 판·검사, 변호사, 학계, 언론계, 노동계, 시민단체 대표들이 수도 없이 회의를 하고 전문가 의견을 듣고 공청회를 하고 모의재판을 했습니다. 전체회의가 총 27회, 분과위원회는 25회, 두 차례 공청회, 한 차례 모의재판과 수차례의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 각계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그때마다 검찰도 참여했고, 언론이 기사와 사설을 썼습니다. 그만큼이면 국민 의사를 충분히 수렴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올해 1월 사개추위가 발족한 이후에도 내부 토론은 물론이고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실무위원회와 본 위원회에서도 거듭 논의했습니다. 교수, 판사, 검사, 변호사로 구성된 사개추위의 기획연구팀에서 26차례의 내부회의, 4차례의 외부전문가 토론회(검사 포함), 공청회, 대토론회(검사 참여)를 열었습니다. 바로 그 논의에 법원, 검찰, 변호사 대표가 참여한 것은 물론입니다. 공판중심주의 강화방안도 검찰측이 참여한 연구팀 논의, 보고서, 건의서, 전문가 토론회, 기획추진단 전체회의, 대토론회, 본위원회 등의 논의과정을 거쳤습니다.”
 
-사법부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사개추위가 검토의 기반으로 삼는 자료는 대법원 산하 사개위의 건의입니다. 그러기에 법원의 입장도 상당 부분 반영됐을 겁니다.”
 
검찰은 사면초가다. 법원, 변호사계, 경찰, 정치권 어느 쪽도 검찰 편이 아니다. 안기부와 보안사의 비합법적 견제가 사라지면서 수사에서 검찰의 독주는 오래 지속됐다. 최근 사법개혁과 관련한 일련의 움직임은 비합법적 견제가 사라진 곳에 합법적 견제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상물 증거 활용엔 한계도 있어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협의로 생긴 불만까지 겹쳐 있기 때문에 사개추위가 어떤 안을 내놓아도 검찰을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어요.”
 
-사개추위가 영상물의 증거 활용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을 안 내리고 세 가지 안을 올렸는데요. 신문장면을 녹화한 영상물도 어떻게 보면 조서와 같은 문제점이 있죠. 녹화하기 전에 피의자에게 심리적 압박이 가해질 수도 있고 편집의 가능성도 있고….
 
“검찰은 영상물이 과학적이고 조작 편집의 우려가 없고 임의성 있는 진술의 번복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의견도 만만찮습니다. 한 사람의 형사 책임을 좌우하는 진술 또는 진술태도를 담은 영상이라면 단순히 영상물 또는 사진의 과학성만 가지고 사용의 정당성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만에 하나 조작, 편집, 연출에서 오는 문제점도 걱정되지만 실무적으로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만약 영상물을 증거로 채택하자면 법정에서 그 영상물을 실제로 재생해야 하는데, 조사가 30분 만에 끝난 경우라면 모르지만 10시간 걸릴 수도 있고 큰 사건이면 20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 영상을 계속 재생해서 바라보는 게 재판이라면 공판중심주의가 아니라 수사과정의 ‘영상중심주의’가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피고인이 진술하는 모습을 공개 법정에서 만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정말 피고인을 위해 좋은 것이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사개추위에 파견된 검사 4명이 어떻게 검찰을 대표할 수 있냐는 항변이 나오는데요.
 
“법무부 장관이 사개추위 위원이고 법무부 차관과 대검 기획조정부장도 실무위원회 위원입니다. 검찰이 보낸 파견 검사 4명도 ‘친정’과의 교량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대표성 문제는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어요.”
 
한 위원장은 고등고시 8회 사법과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됐다. 고시 8회는 필기시험 합격자가 158명이나 돼 50명은 9회로 넘어가고 108명이 최종 임용됐다. 고시 8회는 숫자도 많고 인재도 많은 제제다사(濟濟多士)의 기수다. 고시 8회 출신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대법관, 안기부장, 감사원장이 수두룩하다.
 
한 위원장은 1960∼65년 법무부 검찰국과 서울지검에서 검사를 하다 사표를 냈다. 성격이 검사보다 변호사 쪽에 더 맞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사표를 내자 신직수 검찰총장이 직접 불러 만류했다. 한 검사가 고집을 꺾지 않자 “변호사 하다 힘들면 언제든지 복귀하라”고 따뜻하게 말했다. 한 변호사는 그러나 신직수씨가 중앙정보부장을 할 때 남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검찰총장과 평검사의 좋은 인연이 험난한 시절을 만나 중앙정보부장과 반체제 변호사로 바뀐 것이다. 그는 “인간사란 참 묘한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본시 경찰의 인권침해를 감독하고 소추를 담당하는 법률가 기구로 생겨났습니다. 검찰이 직접 수사하는 것은 본래의 검찰 기능에 맞지 않다는 견해가 있어요.
 
“현 제도상으로 수사 주체는 검찰입니다. 검찰이 모든 범죄수사의 1차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 무리라 하는데 이는 수사권 조정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물론 사개추위의 소관 사항이 아닙니다. 검찰의 기능을 현재대로 둘 것이냐, 아니면 세계적 추세에 맞추어 조정할 것이냐 하는 정책판단문제에 관해 지금 내 입장에서 말하기는 부적절합니다.”
 
엄격한 준칙주의, 느슨한 인가주의
 
-검·경의 수사권 조정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경찰로서는 오랜 숙원사업이고 검찰로서는 난제였죠. 제도의 틀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민의 공감을 얻어야 하지요. 경찰을 수사 주체로 삼을 경우 인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것이 검찰 쪽의 반대의견입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검찰처럼 수사권을 독점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경찰 쪽 얘기고요. 검·경간 논의를 통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국민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검찰 선배이고 그동안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묻는 건데 지난해 검찰 수사를 받고 나온 사람이 자살하는 사건이 속출했습니다.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장, 안상영 부산시장, 박태영 전남지사…. 김승규 법무부 장관이 취임한 후에 인격을 존중하는 수사를 강조하는데요. 검찰의 직접적인 수사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사실을 정확히 모릅니다. 혹시 검찰 수사의 강제성이 지나쳐 자살에 이를 정도의 충격을 줬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어요. 다만 검찰 조사를 받은 뒤에 자살에까지 이르렀다면 검찰 조사와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자살한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상태를 모르니까 함부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검찰 조사가 자유롭고 임의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왜 같은 조사를 받고 나와도 어떤 사람은 법정에서 검사와 다투는데, 어떤 사람은 자살을 합니까. 개인차도 있을 수 있죠.”
 
-후배 검사들의 집단반발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퇴임 40년 만인 지난해 대검에서 특강을 할 때 ‘검찰은 영원한 나의 친정’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비록 법정에서는 검찰과 대향적(對向的)인 당사자로서 논쟁을 했지만 검찰 출신으로 그동안 검찰이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좋고, 검찰이 외부에서 비난받을 때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번 사법개혁안은 위원장 개인 의사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누구 못지않게 검찰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합리적인 귀결에 이르도록 최대한 힘쓰겠습니다.”
 
-사개추위에서 추진하는 일 가운데 국민과 각 대학의 관심이 아주 높은 사안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인데요. 사개위에서 정원을 1200명으로 하자는 의견이 붙어서 넘어왔죠. 그런데 정원이 줄거나 늘어날 수도 있습니까.
 
“아직 정식으로 논의하거나 결정한 바 없습니다. 사개추위가 법안을 만들 때는 정원을 명시하지 않을 겁니다. 법학전문대학원도 교육인적자원부 소관의 고등 교육기관입니다. 따라서 그 입학정원은 교육부 장관이 고등교육의 주관 부서로서 관련부처와 협의해 정할 것으로 압니다.”
 
문재인 수석과 서대문구치소 동기생
 
-로스쿨을 고등법원 소재지에 하나씩은 둬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대학의 전통이나 실적으로 볼 때 유명대학에 안 줄 수는 없을 것이고, 여자대학에 하나를 배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죠. 벌써부터 대학간에 사활을 건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심판을 볼 건가요.
 
“법학전문대학원의 설치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준칙(準則)주의와 인가(認可)주의가 있습니다. 준칙주의는 설치기준 요건에 해당되면 모두 설립인가를 내주는 것이죠. 인가주의는 선별적으로 인가하는 것입니다. 두 제도에 각기 장단점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이른바 준칙주의에 의해 현재 74개의 로스쿨이 생겼습니다. 준칙주의를 택하면 원하는 대학에 다 주니까 우선 불만이 안 생겨 좋은데 그 많은 입학생을 어찌하냐는 문제가 생기죠. 일본은 준칙주의 때문에 벌써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설치 인가 기준을 엄격히 하면 준칙주의를 택해도 사실상 수가 많아지지 않죠. 인가주의라 하더라도 인가기준을 조금 느슨하게 하면 준칙주의의 폐단을 막는 선에서 로스쿨 수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엄격한 준칙주의와 느슨한 인가주의를 잘 배합하면 거기서 어떤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대학에 주고 안 주고 하는 인가권은 교육부 장관 소관이므로 사개추위가 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사개추위와 관련한 질문을 끝내고 사진을 찍기 위해 인터뷰를 잠시 중단했다.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은 층에 있는 한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책과 자료가 이중 삼중으로 쌓여 좁지 않은 공간이 비좁아 보였다. 옛날 컴퓨터 시대 이전의 신문사 편집국 같다. 책상 위에도 책과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 변호사는 “9·28수복 직후의 서울 광경 같아서 손님은 회의실에서 주로 만난다”고 했다.
 
한 변호사는 지난해 3월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서 노무현 대통령 대리인단 변호사로 선임돼 5월14일 탄핵심판 청구가 기각될 때까지 활동했다. 그는 문재인 변호사(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의 부탁을 받고 대리인단에 합류했다. 문 변호사와는 서대문구치소 동기생이다.
 
“1975년 3월 필화 사건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 중일 때 많은 학생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 들어왔습니다. 경희대생이던 문재인군도 시위하다가 붙잡혀 구치소에 신입으로 들어왔습니다. 여름이었죠. 땀나면 갈아입으라며 내가 그에게 새 러닝셔츠를 줬다는 거예요. 내 기억에는 없는데 문 수석이 얘기해줘서 알았어요.”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은 올 3월 기자회견에서 “재판관들의 소수의견을 만에 하나 공개했더라면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닥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소장은 “만약 4대5로 기각했다고 치고 이를 공개했다면, 법적으로는 기각이라도 정치적으로는 탄핵 통과나 다름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이어 “반대로 8대1로 기각됐다면 한나라당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것”이라며 “정치적 후유증을 감안하더라도 소수의견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고 본다”고 언급했다.
 
-헌재가 소수의견을 공개했어야 옳은 것 아닌가요.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이었습니다. 전원일치 결정이 아닌 이상 대법원 판결처럼 소수의견을 병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헌재는 헌법재판소법을 거론하면서 공개하지 않았지만 원론적으로 말해 그렇게 중대한 판단에는 각 재판관의 책임 있는 의견이 명시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수 의견 속에 소수 의견을 혼입하다 보니까 결정문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이 훼손됐습니다. 속된 말로 ‘짬뽕’이 됐죠.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수의견을 누가 냈냐는 것이 거의 다 알려졌으니까요.”
 
비밀을 유지하는 헌재 평의(評議)의 내용이 어떤 경위로 알려졌는지는 모르지만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기각의견 6명, 각하 1명, 인용 2명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75년 한 잡지에 쓴 글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첫 옥살이를 했더군요. 그 반공법이 나중에 국가보안법에 흡수되지 않습니까. 국가보안법 존폐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데 개인적으로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국가보안법은 북한이 반국가단체임을 전제로 만들어진 법입니다. 7·4 공동성명, 남북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북한이 더는 반국가단체가 아니라는 전제를 대한민국이 수용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면 헌법 제4조에 평화통일 조항은 폐지돼야 합니다. 반국가단체는 무력으로라도 궤멸시킬 의무가 국가에 있습니다. 유엔 헌장 4조엔 평화 애호 국가만을 회원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더러 함께 유엔에 들어가자고 권유해 같이 회원국이 됐습니다.
 
남북 기본합의서나 부속합의서를 보면 남과 북은 상호 관할구역을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아니 한다고 돼 있습니다. 반국가단체라면 궤멸 또는 토벌의 대상인데 무슨 관할구역을 합의해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할 수 있습니까.
 
6·15 공동선언과 남북교류 협력·왕래 이런 것을 다 종합하면 사실상 생명력을 잃은 법률입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국가 안보를 걱정하지 않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나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국가의 규범을 통해서든, 국방력으로든, 정신력으로든 다 해야 합니다.”
 
고문에 의해 지탱되는 국가 시스템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간첩행위를 하거나 전복하려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은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정부를 전복 또는 파괴하려 하거나 간첩활동을 하는 행위를 좌시하자고 할 사람은 없겠지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도 현행법 내지 대체입법으로 다 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는 사람을 좌경으로 모는 이들이 있는데 그러면 북한하고 유엔에 함께 가입할 때, 그 분들은 왜 반대 안 했습니까. 앞뒤가 맞아야지요.”
 
한 변호사는 1980년 5월17일 밤 10시경 서울 갈현동 자택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됐다. 신군부는 남산 지하실에서 지독한 고문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시나리오를 썼다. ‘역사의 길목에서’(나남출판사)라는 책에 들어 있는 대목을 인용해본다.
 
‘보안사 소속의 현역이란 자가 주로 악역을 맡아서 야전침대에서 뽑은 침대봉으로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패는 것이었다. 주먹으로 얻어맞고 발길로 걷어차이기도 했다…양 무릎 안쪽에다 각목을 끼워놓고 위에서 짓밟는 고문도 견디기 힘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놓고 잡아 트는 간단한 고문도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조사요원들은 모두 미쳐 있었다. …구속영장도 없고 가족 면회도 막아놓은 채, 엿새 모자라는 두 달 동안 하늘 한번 보지 못하고 지하실에서 지옥 같은 밤낮을 보냈다. 이 방 저 방에서 고문당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때로는 죽음 같은 침묵만 이어지는 두려움의 시간도 있었다.’
 
고문 피해자로서 고문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다.
 
“고문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국가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정치범에 대한 박해 수단, 범죄의 자백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문이 자행됐습니다.
 
인간이 고문이라는 국가 폭력 앞에서 얼마나 견뎌낼 수 있냐 하는 점에서 권력과의 싸움이자 자기와의 싸움이지요. 남산 지하실에선 고문이 예외적 수단이 아니라 원칙이었던 것 같습니다. 명색이 변호사로 사회활동을 해 알려진 사람한테까지 그렇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하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고문에 의해서 지탱되는 국가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때 재확인했습니다.”
 
-고문을 할 때 얼굴을 가리고 합니까.
 
“나한테는 그러지 않았어요. 다른 분한테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전에는 나를 잡아가더라도 이렇게 허약한 몸에 고문을 가하면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어버릴 테니까, 설마 살인까지는 못하겠지 하고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약한 몸을 야전침대의 침대봉으로 두들겨 패더라고요. 침대봉을 무릎 밑에 끼우고 위에서 발로 지근지근 밟으면 무릎이 끊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고통보다 치욕감, 그건 정말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아픈 건 어느 선을 넘으면 멍합니다. 그보다 치욕감이 더 견디기 어려웠죠.”
 
-고문하던 사람들을 혹시 밖에서 만난 적 있습니까.
 
“조사관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 고문을 전담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풀려난 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 방의 팀원 중에서 비교적 양식 있어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나중에 전화도 하고 만난 적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오늘 저녁엔 틀림없이 고문이 있을 것이니 각오하라’고 알려주기도 했어요. 그 사람은 제 딴에는 나한테 좋게 해준다고 알려준 거죠. 그런데 ‘고문 사전예고제’가 고마운 건 아니죠. 고문은 갑자기 당할 때 당해버려야 하는데, 알려주니까 미리 공포감이 생기고 더 안 좋더라고요.”
 
5월만 되면 허리 아파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5월17일 잡혀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혀 한 나흘쯤 지나서 알았어요. 나를 담당한 지하실 수사관 가운데 악역도 있고 악당도 있지만, 거기도 사람 사는 데라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광주사태의 규모라든가, 참상이 어땠는지는 몰랐어도 광주에서 큰 시위와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은 알았어요.”
 
“고문 후유증이나 상처 같은 건 없냐”고 묻자 한 변호사는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중정 지하실에서 당하고 난 후 몇 년 동안은 5월만 되면 여기가 아팠어요”라고 말했다.
 
“그 계절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통증이 찾아왔어요. 시일이 오래 지나 지금은 괜찮아요. 아프려면 계속 아프지, 꼭 그 무렵만 되면 아팠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게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인지 궁금해요.
 
1980년 5월17일 잡혀가 형이 확정되고 육군교도소를 거쳐 김천 소년교도소에서 12월을 맞으니까 그만 나가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어요. 나 좀 석방되게 해주십사고. 그런데 성탄절이 그냥 넘어갔어요. 아직 때가 아니구나 생각하고 마음잡고 모범수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 5월 어느 날 새벽에 철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면도해주고 보따리 주면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나와 보니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어요. 석방시켜달라고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 드렸는데 정작 부처님 오신 날 나왔잖아요. 나뿐만 아니라 목사님도 부처님 오신 날 나왔어요.”
 
-김대중씨도 고문을 당했나요.
 
“본인이 구타를 당했다는 말씀은 안 하신 것 같아요. 그러나 옷을 벗기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을 줬다고 그래요. 그만한 지도자를 옷을 벗기고 모욕감을 줬으면 그것도 고문의 범주에 들어가지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한 전두환 일당이 거꾸로 내란군사반란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됐습니다. 20년 만에 역사가 바로잡힌 건가요.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중형을 받았지만 그건 한마디로 김대중 죽이기를 위한 연출이었습니다. 저는 같은 법정에 섰지만 조연급도 못 되고 엑스트라였는지도 모르죠. 그때 왜 전두환 군부가 다른 정치 지도자는 제쳐놓고 DJ만 잡아서 사형에 처하려 했을까요. 자기들의 집권 야욕을 채우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 DJ였기 때문에 제거하려고 한 것이죠.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들이 당대에서 구속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예는 참 보기 드뭅니다. 한국에서는 까마득한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기 전에 바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내란과 군사반란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지가 역전됐지요. 어찌 보면 하품 나는 역사의 심판에 맡겨 위안을 삼지 않고 바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해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유죄 판결을 받게 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노 양씨를 구속해 재판에 회부하고 처벌받도록 한 것은 YS의 공로가 분명합니다. 치적이라 해도 좋고 공로라는 말도 좋습니다. 그후에 그들을 사면해 조기 석방한 조치가 과연 정당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국민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져 있지 않습니까.
 
내란과 군사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정치적 고려에 의해서 이른바 국민화합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일찍 풀려 나와 자기 과오에 대한 반성 없이, ‘언제 내가 무슨 죄인이었냐’는 태도로 살아가는 데 대해 많은 국민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아무튼 두 전직 대통령을 보는 국민의 시각은 대체로 곱지 않다. 총칼로 시민을 대량 학살해 정권을 잡은 뒤 청와대에 들어가 수천억원을 도둑질해 나왔으니 살인강도죄로 처벌했어야 한다는 관점도 있다.
 
-국회의원, 도지사 출마 권유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왜 안 나갔습니까.
 
“법조계가 내 무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였다면 정치를 했을 겁니다. 정치 하는 사람을 욕하긴 쉽지만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 분야입니까. 제대로 잘할 수 있으면 비록 욕을 먹더라도 거기에 나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거기 가서 제 구실을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능력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하자고 그냥 법조계에 남아 있는 거예요.”
 
전봉준, 순수하기에 무모했던 사람
 
한 변호사는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서 축사를 한 인연으로 1994년 이 단체의 이사장을 맡았다. 2004년에 그만둘 때까지 만 10년 동안 일했다.
 
동학농민운동은 과거에 진주민란, 고부민란과 같이 ‘동학란’으로 불렀다. 그렇게 불온시되던 동학농민운동이 사시(斜視)의 굴레를 벗어나 차츰 긍정의 공간으로 들어오고 혁명으로 평가받게 됐다.
 
“일부 사학자와 지식인에 의해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를 제대로 잡으려고 했던 큰 민중운동이었습니다. 첫째,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목표가 오늘의 과제하고 맞닿아 있습니다. 둘째, 청군·일군을 무장 싸움으로 막아보려 한 외세배격의 의미가 있죠. 동학농민세력은 전주를 중심으로 집강소를 운영하며 부정부패 척결, 정의사회 구현, 자주·자치·차별 철폐를 목표로 삼았죠.
 
그러한 목표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가 지향해온 국가적 과제하고도 그대로 맞닿아 있기 때문에 높이 평가하는 거죠. 일부 학자들의 미화가 아니라 문헌을 통해 실증된 겁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갑오경장은 위에서 아래를 향한 개혁이어서 역사에 크게 남을 수가 없었죠.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에 의한 최초의 집단적 자각(自覺)이자 거의 전국적인 궐기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 거죠.”
 
-전봉준이란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서당에서 훈장 하던 사람이 군사 봉기의 지도자가 됐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퍽 아이러니컬합니다. 어쨌든 전봉준을 제쳐놓고 동학농민운동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전봉준은 당시 잘못된 국정을 바로잡겠다는 일념으로 거병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성공했더라도 집권을 하거나 나라의 공신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세상을 바꿔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일어났지만 실패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병들어가는 나라의 위기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었던 거죠. 한마디로 전봉준은 대단히 순수한 사람이었죠. 순수했기에 무모했고 개인의 욕심이나 계산이 없었기에 아름답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배신행위, 그런 배신행위를 유발하는 미끼에 의해 어이없게 체포됐죠. 그것은 역사의 비극이자 교훈입니다. 전봉준의 최후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고 생각해요. 그냥 살아남아서 어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병사한 것보다는요. 마치 예수가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2000년이 넘도록 큰 빛을 남겼듯이 말입니다.”
 
-전봉준 장군이 호남에서 집강소 정권을 세웠다가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며 공주에서 일본군-관군 연합군과 맞붙은 것은 무모했던 것 아닙니까.
 
“서울 쪽으로 쳐들어가서 권력을 잡겠다기보다 일본군의 침투를 그대로 볼 수 없어 북상한 것이죠. 조정의 요청으로 일본군이 들어왔지 않습니까. 일본군은 기관총까지 갖고 있었는데 달랑 죽창을 들고 공주로 향한 것은 실패가 예견된 전략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지만 그때 농민들의 애국정신은 우리가 인정해야죠.”
 
노무현 정부에는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가 많아 ‘민청 정권’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한 변호사는 민청학련 중심세력 34명 중 김지하 나병식씨 등 10여 명의 변호를 맡았다.
 
“그때 온 세상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광풍 앞에서 얼어붙어 떨고 있을 때 그만큼이라도 나라의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나선 젊은이들의 행동은 높이 평가돼야 합니다. 지금 세상이 민주화되고 나니까 이런저런 사람들이 무슨 말이고 함부로 하지만 그때 그만큼이라도 독재세력에 맞서 투쟁하기가 참 어려운 때였죠.”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민청학련은 중앙정보부가 날조한 것이지 실체는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민청학련이란 이름이 붙은 조직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은 유인물에만 있던 거죠. 그러나 그 사람들은 반유신 반독재 운동을 하다 찍힌 것이지, 아무 일도 안하고 그냥 붙잡혀왔던 건 아닙니다.”
 
‘정찰제 판결’의 명명자
 
한 변호사는 민청학련의 피고인이면서 인민혁명당 사건의 연결고리로 기소된 경북대 학생 여정남의 변론도 맡았다. 여군의 어머니가 몇 번이나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와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먹이며 애원했다. 한 변호사는 기대를 안 하면서도 “죄가 없으니 잘될 것”이라는 빈말로 위로했다. 그러나 여군은 1975년 4월8일 사형이 확정됐고 20시간 후 교수형이 집행됐다.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이라고 발표한 인혁당 사건은 완전한 조작이죠.
 
“4월8일 대법원 판결이 나고 왜 그 다음날 바로 죽였는가, 그것이 모든 걸 말해줍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겠지만 민주화운동 인사를 몇 명이나 변론한 건가요.
 
“지금 변론 사건 실록을 준비 중인데, 어림잡아 100건은 될 거예요.”
 
한 변호사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재담가다. 긴급조치 1, 4호 사건 군사법정에서 ‘정찰제 판결’이라는 어록을 남겼다. 군사법정의 판결은 검찰관의 구형에서 한푼도 깎아주지 않았다. 한 변호사는 군법회의 법정에서 “우리나라의 정찰제는 백화점의 상도의로 확립된 것이 아니라 삼각지(육군본부가 있던 곳) 군법회의 판결에서 확립됐다는 오명을 쓰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1975년 1월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이병린 변호사가 간통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이 변호사가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할 때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찾아가 대표위원 사표를 내라고 요구하면서 거부할 경우 간통죄로 구속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사표 내기를 거부하자 그 다음날 정말로 검찰에 불려가 간통죄로 구속됐다,
 
상대는 일식집 여종업원이었다. 그 여성은 독신으로 어린 자녀 둘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일식집에 나온다고 말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게 안타까워 가끔 돈을 줬다. 이를 테면 이 변호사는 그 여성과 연애를 한 셈이다. 그런데 남편이 있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연애하는 현장에 들이닥쳐 사진을 찍고 그녀의 남편을 찾아내 고소하도록 시켰다.
 
한 변호사는 이 변호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구치소로 접견을 가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는 서울구치소에서 나오는 길에 법조기자실에 들러 풀을 했다. 그런데 유독 ‘동아일보’ 기사는 ‘한승헌 변호사 전언(傳言)’이라는 부제를 뽑았다. 중앙정보부는 자상한(?) 기사 부제 덕분에 소스(취재원)를 찾아내는 고생을 하지 않고 바로 한 변호사를 붙잡아갔다.
 
이병린 변호사 가장 존경
 
-당시 ‘동아일보’ 법조담당 김재곤 기자가 기사 소스인 한승헌 변호사를 기사에 밝히는 바람에 한 변호사가 고초를 겪었다고 미안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김 기자는 소스를 안 밝히려 했는데 당시 사회부장이 이름을 안 밝히면 기사를 못 내보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사를 쓴 기자에 대해 추호도 원망은 않지만 적어도 그 시절에 그런 기사에 그런 부제를 붙여서는 안 되지요. 혹시 기사 안에 이름이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제목에까지 한승헌이란 이름을 뽑아놓았으니….”
 
최근 미국에서는 기자들이 기사 소스를 밝히지 않기 위해 법정 증언을 거부해 감옥에 간 사례가 몇 건 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은 뉴스의 출처 밝히기를 강요하는 것은 언론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법관들과 싸우고 있다.
 
한 변호사는 그 기사가 나간 직후 중정 지하실로 붙들려갔다. 중정은 한 변호사가 2년 반 전 ‘여성동아’에 게재한 수필 ‘어떤 조사(弔詞)’에서 사형제도를 비판한 내용을 반공법 위반이라고 몰았다. 비인도적인 조사를 받고 사흘 만에 풀려났지만 결국 구속으로 이어지는 꼬투리가 됐다.
 
그가 구속된 김지하 시인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선임계를 내자 사퇴 압력이 들어왔다. 두 번의 요구를 거절하자 중정에 붙들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어떤 조사’라는 글이 간첩으로 사형당한 김규남(검거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을 애도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글에는 김규남의 ‘김’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의 억지 해석이었다. 그러나 129명의 변호인단도 소용이 없었다. 사법부는 꼭두각시였다.
 
한 변호사는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이 누구냐고 묻자 주저 없이 이병린 변호사라고 대답했다.
 
“정의 실현과 인권 옹호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신·구 학문에 달통해 박식했죠. 변호사로서 사회참여에 주저하지 않았고 민주화운동에서 지도적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사퇴 요구를 거부해 간통으로 구속까지 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죠.
 
그분이 구치소에서 나온 후에 저녁 회식을 마치고 댁까지 차로 모셔다 드렸는데, ‘한잔 하고 가라’며 저를 집으로 끌고 들어갔어요. 그리고 ‘여보, 여보’ 하고 늙은 사모님을 부르더니 한마디 하시더군요. ‘아, 이 사람이 내가 간통죄로 들어갔다 나온 뒤로는 밉다고 집에서는 술 한잔도 안 준다고. 오늘은 한 변호사 덕분에 술 한잔 얻어먹세….’”
 
한 위원장은 전북대 법정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법학과에 가기 싫어 정치학과로 갔는데 지방대 출신으로 전도(前途)가 난감해 주변의 권고를 받고 취직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고시를 치렀다. “당시는 필기시험 외에 구술시험이 있었습니다. 시험관인 대법관이 나를 보더니 ‘한군은 전북대구만. 가만있자, 전북대가 어디에 있던가. 광주에 있던가’라고 하더군요. 말 한번 잘못하면 떨어지고 마는 그 가슴 조이는 순간에도 속으로 ‘썅, 법률은 나보다 많이 알겠지만 지리는 빵점이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만큼 전북대가 알려져 있지 않을 때였어요.”
 
‘산민(山民)’이란 아호는 젊은 시절 서예 스승이던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선생이 지어줬다. 산민은 요즘말로 하면 민중 혹은 서민대중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자기 아호를 일본말이나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러시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아호는 러시아어로 ‘빨치산’이라고 하더군요.”
 
한승헌류의 객담이다. 그는 이름과 관련해서도 일화를 갖고 있다. 중정에서 조사받을 때 조사관이 “당신 이름이 ‘한(韓)’국의 ‘헌(憲)’법을 ‘이긴다(勝)’는 뜻이냐”고 비꼬더라는 것이다. 이름부터 법조인의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한(韓)’국의 ‘헌(憲)’법을 ‘이긴다(勝)’
 
그는 2004년 ‘산민객담(山民客談)’이란 유머집을 펴냈다. 잡지에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다. 다시 2권을 낼 만큼 분량이 쌓였다고 한다. 범우사에서 출간한 ‘산민객담’은 6쇄 1만2000부를 찍었다. 지금 같은 출판 불황시대에 히트작이다. 오는 여름에는 일본어 번역판도 나온다.
 
한 변호사는 두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그러나 시작(詩作)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 20대에 시인 아니던 사람 어디 있느냐”고 받아넘긴다. 김남조 김남주 김용택 안도현 시인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에는 조병화 시인의 ‘인간 고도(孤島)’와 ‘사랑이 가기 전에’를 애송했다.
 
그는 변론활동을 하다 기독교에 귀의했다. 한국 교회가 이래저래 탄압을 받을 때 기독청년 목사와 전도사들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감동을 받았다. 어떻게 저분들은 저렇게 용기 있게 정의를 좇아 자기를 내던지고 행동할까 하는 경외심이 생겼다. 그는 “변호인이 거꾸로 피고인한테서 오염돼 예수를 믿게 됐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불광동 양광교회에 다닌다.
 
인근 일식집에 가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인터뷰를 계속했다. 한 위원장은 생맥주 300cc 한 조끼를 시켜놓고 절반도 비우지 못했다. 필자는 혼자서 히레사케 한 잔을 비웠다.
 
한 위원장은 술을 마시면 동네 술 혼자 마신 것처럼 ‘적화(赤化)’되고 머리가 어지러워 술자리에서 술잔을 입에 대고 마시는 척만 한다. 저서가 20권이 넘는다. 저서가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술을 잘 못하는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글을 써야 하니까.
 
저녁 먹은 시간을 포함해 5시간 반짜리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진 시간이 밤 9시를 넘겼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자료출처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