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계백장군 유적지

鶴山 徐 仁 2006. 7. 5. 11:19

▲ 안내표지판

 

▲ 백제군사들의 충정과 한이 서린 황산벌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 연산면(連山面) 일대

소정방(蘇定方)의 13만 당군(唐軍)이 황해를 건너 서쪽에서 진격해 오고,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이 탄현(炭峴;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어 쳐들어오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 황산벌에 포진하였다.

 

                                              (이미지는 군사박물관 내에서 상영중인 애니메이션 중에서)

▲ 나라와 함께 죽은 사람, 계백

계백은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660년(의자왕20)에는 의자왕으로부터 달솔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 당시 백제는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태였고,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백제에 맞섰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장군은 5천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로 나가 5만의 신라군을 맞았다.

전쟁결과를 예측한 계백장군은 전장에 나가기 전에 아내와 자식들을 불러 놓고 "적들에게 붙잡히어 노비가 되어 욕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며 가족들의 목을 베었다.

싸움터에 나간 계백장군은 옛날 중국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5천 군사로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찌른 예를 들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에 사기충천한 계백의 군사는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맞아서 4차례나 싸움에서 이겼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은 패하게 되고 사비성을 잃어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 

훗날 조선시대의 학자 서거정이 저서 [동국통감]에서 계백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며 '계백은 나라와 함께 죽은 사람'이라고 기술했다.

 

▲ 충남국악단 제19회 정기공연이 열린 백제군사박물관

계백장군 묘소로 가는 길의 초입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은 2005년 3월에 개관하였으며, 백제의 군사문화를 통하여 올바른 국가관 확립과 호국정신을 키우는 역사. 문화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어제 23일 오후 8시에는 이곳 야외광장 특설무대에서 부여 충남국악단의 제19회 정기공연이 열려, 실내악, 가야금병창, 부채춤, 소리(경기민요, 남도민요), 사물놀이(유진박과 협연), 창작극(서동전, 사비성의 소리와 몸짓)의 한마당이 펼쳐졌다.

▲ 계백장군의 묘소로 가는 길

백제군사박물관 입구에서 주차를 하고 박물관을 거쳐 잔디밭을 지나 장군의 묘소로 향하면 왼편에 충장사가 있다. 사진의 왼편에 살짝 보이는 곳이 충장사이다.

 

▲ 충장사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홍살문은 능, 원, 묘, 궁전 또는 관아 등의 앞에 세우던 붉게 색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하며 담장과 문짝이 없으므로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서 세운 것은 아니며 예를 갖추고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는 장소에 세워진다.

기원 및 목적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짐작한다.

 

▲ 충장사

계백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곳이다.
묘소 부근인 충곡서원(忠谷書院)에 주향으로 모셔졌고, 부여의 부소산에 있는 삼충사(三忠祠)에도 배향되었다. 

 

            

 

▲ 계백장군의 묘

 

▲ 전망대와 산책로

백제군사박물관에서 계백장군의 묘소로 가는 오른편에 산책로와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있다.

 

▲ 탑정호

군사박물관 주차장에서 논산8경 중 제2경인 탑정호가 가까이 내려다보인다. 

 

'歷史. 文化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조실록> 해제  (0) 2006.07.09
9천년역사를 찾아서  (0) 2006.07.06
봉산 탈춤  (0) 2006.07.05
황하 문명  (0) 2006.07.03
[이야기] 『열하일기』, 새로운 시대의 지향을 일기에 담다  (0) 2006.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