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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이야기] 『열하일기』, 새로운 시대의 지향을 일기에 담다

鶴山 徐 仁 2006. 7. 1. 11:35
  글쓴이 : 신병주     날짜 : 06-06-28 09:12        

『열하일기』는 조선후기의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 박지원(朴趾源 : 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 1783년에 완성한 기행문 형식의 책이다. 박지원은 44세 때 사신단의 일원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황제가 피서 차 쉬고 있던 열하(熱河)를 거쳐 돌아왔다. 이곳에서 약 2개월간 견문한 내용을 정리한 『열하일기』에는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조선후기 한 지식인의 실학정신이 녹아 있다.


박지원이 열하까지 간 여정을 대략 살펴보면 압록강에서 연경까지 약 2천 3백여리, 연경에서 열하까지 700리로 육로 3천리의 긴 여행이었다. 거리도 거리려니와 끝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상한 날씨는 여행을 더욱 힘들게 하였지만 박지원은 뜻밖의 행운에 이 모험을 즐기며 가는 곳마다 세심하게 여행스케치를 했다. ‘수레 만든 법식(車制)’이란 글을 보자.


수레 활용과 도로망 건설 등, 시대를 앞서 간 구상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 거리가 비좁고 산마루들이 험준하다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하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것이 입으로만 외울 뿐이며,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하며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한가 하는 데는 연구가 없으니 이야말로 건성으로 읽는 풍월뿐이요, 학문에야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어허! 한심하고도 기막힌 일이다.”


이 글에서 박지원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 종사하지 않는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수레’를 통해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변명에 대하여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라 반문하면서 수레를 만들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정신 자세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직접 수레를 만들어 활용하면 수레를 이용할 길은 만들어진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수레를 단순한 교통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수레의 활용에서 비롯되는 도로망 건설 등 국가 산업 전반의 발전을 꾀했다는 점에서 박지원의 이용후생 사상은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문체 속에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 담아내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현재 내용이 조금씩 다른 『열하일기』 필사본이 9종이나 남아있는 것을 보아도 『열하일기가 당시에 어느 정도 유행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열하일기』가 이렇게 유행하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글이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인은 『열하일기』가 종종 턱이 빠질 정도로 웃도록 만드는 책이라고 평가한 바도 있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기도 하였고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체 문체를 사용하는 등 당시 지식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판에 박힌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면서,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암의 글에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녹아 있었기 때문에 의식 있는 지식인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의 글은 문체와 그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점잖은 글을 쓰는 양반들에게 『열하일기』는 경박하거나 비속한 책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정조가 패관잡기를 불온시하고 순수한 문체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곡을 올린 중심에는 바로 『열하일기』가 있었다. 박지원의 글이 지닌 파격성과 그 비판적 성격 때문에 정조는 직접 하교를 내려 박지원의 문장이 비속함을 지적하였고, 『열하일기가 전파되는 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연유로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 지 약 80년 후인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다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열하일기』는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활자본으로 출간되면서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북학사상의 선구자 박지원의 이름은 후대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유머와 역설이 풍부하면서도 시대를 꿰뚫는 치밀한 실학정신이 녹아 있는 책, 『열하일기를 통해 시대를 앞서간 조선시대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을 찾아보는 작업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글쓴이 / 신병주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 저서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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