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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니힐리즘의 본질과 존재물음

鶴山 徐 仁 2006. 6. 20. 15:34
니힐리즘의 본질과 존재물음  


본 논문은 니힐리즘이 단순한 역사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양사유의 근본성격임을 주장한 하이데거의 입장에 서서 니힐리즘의 본질에 대해 다룬다. 니힐리즘의 시대를 최초로 예언했으며 누구보다도 니힐리즘의 극복을 위해 철저하게 사유했던 철학자가 니체였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의 니힐리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실마리로 해서 니힐리즘의 본질에 대해서 다룬다. 여기에서 과연 니체는 니힐리즘의 본질에 대해 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를 검토한다. 이러한 검토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니체는 니힐리즘의 본질을 오해했으며, 더 정확히 말해서 필연적으로 오해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니체의 철학마저도 니힐리즘 속으로 휩쓰려 들어간 또 하나의 니힐리즘이며, 그것도 니힐리즘의 완성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다시금 다음과 같은 물음들과 직면하게 된다. 니힐리즘의 "본래적" 본질 - 니체는 니힐리즘의 "비본래적" 본질과만 관계했던 것인데 - 은 무엇인가? 니힐리즘은 어떠한 역사적인 유래를 갖는 것인가? 더 나아가 과연 니힐리즘의 극복이란, 니체가 생각했듯이, 그렇게 쉽게 가능한 것인가? 진정한 의미의 극복이란 어떤 것인가?

니힐리즘의 극복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예비적으로 두 가지 점을 먼저 다룰 것이다. 첫째는, 니힐리즘이라는 용어가 철학사에서 어떤 다양한 의미들을 갖는지를 살펴 보기 위해 니힐리즘 논쟁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 본다. 둘째는, 이를 통해서 니힐리즘 논쟁을 현대에서 철학적인 문제로 제기한 니체의 니힐리즘을 살펴볼 것이다. 이후에 우리는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는 니체의 시도의 한계를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고찰할 것이다.

I. 니힐리즘 논쟁의 역사적 과정

하이데거가 전해주듯이 니힐리즘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철학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야코비(F.H. Jacobi)이다. 야코비는 피히테에게 쓴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참으로, 나의 사랑하는 피히테씨, 내가 니힐리즘이라고 비난한 관념론에 대립시켰던 것을 당신이나 그 누군가가 변종주의라고 부르고자한다면 저는 화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야코비는 피히테의 관념론을 니힐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피히테는 그의 초기의 학문론에서 모든 것은 자아에서부터 생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세계를 초월론적인 주관성에서부터 구성해냄으로써 순수한 관념성만을 인정하고 그 결과 사물의 실재성을 부정하게 된다. 피히테는 세계를 초월론적인 주관성에서부터 구성함으로서 모든 것을 주관성의 무 속으로 떨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주의자였던 야코비가 피히테를 니힐리즘으로 몰아서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야코비에 의하면, 피히테의 관념론은 계몽의 이념에 따라서 학문적으로 근거지워진 세계이해를 주장한다. 이러한 계몽적인 인간화된 세계이해는 참된 실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니힐리즘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코비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모든 시도를 니힐리즘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코비가 피히테의 관념론을 니힐리즘으로 비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피히테의 관념론이 갖는 무신론적인 귀결이다. 왜냐하면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의 자리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신론으로서의 니힐리즘에 맞서기 위해 야코비는 전통적인 플라톤주의를 다시금 내세운다. 독일관념론을 니힐리즘으로 비판한 야코비가 다시금 플라톤의 이원론에로 돌아가는 것은 의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니힐리즘 논쟁의 최초의 국면의 특징을 여기서 파악할 수 있다. 독일관념론에서의 니힐리즘 논쟁은 니힐리즘적인 무신론적인 관념론인가 아니면 유신론적인 플라톤적인 관념론인가의 양자택일의 구도내에 있는 것이다.

야코비에 의해 최초로 제기된 니힐리즘 논쟁은 러시아에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니힐리즘은 순수한 관념론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론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경험적 실재론, 흔히 말하는 실증주의가 제시된다. 19세기 중엽 이전의 러시아는 전제군주에 의한 가혹한 통치하에 있었다. 곳곳에서 민중들의 삶을 위협하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러시아의 니힐리즘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과의 연관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정치에 대해서 많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들 스스로는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현실도피적인 기분이 팽배해 있었다. 러시아의 니힐리스트들, 이를테면, Lermontow, Gontscharow, Turgenjew는 이러한 현실도피를 그들의 문학을 통해서 비판했다. 이러한 30년대, 40년대의 문학적 니힐리스트들은 진리와 아름다움과 정의라는 높은 이상들을 신봉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의 문학속에서만 표현되었을 뿐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문학적 니힐리스트들과 러시아의 전제주의의 철학적 근거인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의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고 비판한 사람이 Pisarev이다.

피사레프는 관념론적인-미학적인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혁명을 필요로 하는 러시아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였다. 피사레프에 의하면, 플라톤에서는 세계와 사유의 분리가 일어난다. 플라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 도시국가의 특징인 세계내적인 덕을 구체화하려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그리스적인 특징을 그의 사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리는 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영향에 기인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꿈꾸는 이성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형태들의 밝은 세계를 버리고 더 고귀한 그러나 차가운 추상적인 이데아의 세계에 안주한 것이다. 플라톤은 진리를 오로지 정신에서부터 길러내는 일종의 개념시인이 된다. 결국 경험적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인 믿음의 차원으로까지 고양된다. 구체적인 세계경험에 대한 플라톤의 무시는 실천적인 행위의 영역에서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게 된다. 플라톤은 개인의 생의 정황들과는 어떤 관련도 갖지 않는 절대적인 이데아에 대한 전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선이라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거부하는 모든 것은 그에 의해 거짓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인간을 그의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통해서 조정하는 것 이외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독단적인 도덕이해에서 생을 적대시하는 플라톤 철학의 측면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이러한 도덕이해에서 플라톤은 금욕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피사레프에 의해 구체화된 러시아의 니힐리즘은 니힐리즘 논쟁의 두번째 국면을 보여준다. 니힐리즘 논쟁의 첫번째 국면인 야코비에서는 니힐리즘에 대한 보루가 플라톤의 관념론이었던데 반해, 피사레프에서는 이제 플라톤주의와 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이 니힐리즘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니힐리즘논쟁이 최초의 양상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니힐리즘 논쟁은 어떤 하나의 관념론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관념론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관념론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실재론, 경험적 실재론과의 대결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관념론에서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연관을 통해서 규정되었던 인간의 세계경험은 이제 오로지 현세에서부터만 그 정당성을 획득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기는 니체의 니힐리즘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II.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비판


우리는 니체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인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형이상학자의 "적개심"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니체가 어떻게 니힐리즘을 비판하는지를 살펴보겠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는 모든 종류의 낙관주의를 거부한다. 그가 후기 철학에서 형이상학과 기독교를 니힐리즘으로 비판할 때 언제나 척도로 쓰여졌던 것이 바로 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었다. 니체에 의하면, 세계는 근원적인 고통에서부터 잉태된 그럼에도 모든 존재자내에 언제나 현재적으로 머물러 있는 생이다. 이러한 생으로의 세계를 특징지우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생의 특징으로서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한 니체의 기술은 >>비극의 탄생<<에서 상세히 기술되고 있다.

니체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모든 한계와 법칙을 뛰어넘는 것이며 인간과 세계를 직접적으로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아폴로적인 것"이 대립된다. 아폴로는 빛의 신으로서 그리스적 문화의 특징인 척도와 질서를 상징한다. "아폴로적인 것"에 의해 세계는 질서정연한 코스모스가 된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로적인 것은 서로 대립되는 원리들이다. 그럼에도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문화 속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아폴로적인 것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화해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은 바로 그리스의 비극에서 드러나게 된다. 분명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속에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양자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비극에서 주인공인 영웅들은 서사시적인 명료함과 아름다움속에 표현된다. 즉 아폴로적인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비극 속에서 영웅들은 파멸에로 운명지워진다. 이러한 파멸의 긍정을 통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드러난다. 니체에 의하면, 비극에서는 분명 아폴로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만들어내지만, 그럼에도 아폴로적인 것은 결코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해 주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파괴적인 지배가 비극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비극은 아폴로적인 형태의 세계내에서 디오니소스 적인 것이 객관화되고 있는 것이다. 디오니소스가 아폴로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며 결국 아폴로는 디오니소스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는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을 제시함으로써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려 하였다. 이것은 아폴로적인 것을 이론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화는 디오니소스적인 경험의 직접성을 부정하고 매개적인 앎을 긍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론화는 우리의 생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망각이외의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디오니소스적 근원성을 보여준 비극의 죽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니체의 철학의 실마리가 되는 또 다른 개념이 형이상학자의 "적개심"이다. 니체는 존재와 생성의 이원론에 의거해서 니힐리즘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구조를 설명한다.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는 불완전성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왜냐하면 생성의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의 세계이므로 인간의 주관적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세계는 따라서 고통의 세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고통의 세계에 자신을 계속적으로 내맡기고 사는 것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다. "지나가고 변경되고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시의 파토스속에서 인간은 결국 변화하지 않는 완전한 세계를 고안해 낸다. 이렇게 해서 형이상학자들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관념적 실재성의의 세계가 생겨난다.

"이 세계는 가상적인 것이다 - 결국 하나의 참된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제약된 것이다 - 결국 하나의 제약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 결국 하나의 무모순적인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생성하는 것이다 - 결국 하나의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참된, 제약되지 않은, 무모순적인, 존재의 세계의 고안에는,
니체에 의하면, 모순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모순률은 다음과 같은 도식을 제공하였다 : 인간이 거기에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저 참된 세계는 자신과 모순될 수 없는데, 즉 변화할 수 없고 생성될 수 없고 어떤 시원이나 종말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자들이 고안해 낸 세계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적개심(Ressentiment)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형이상학자들은 변화하는 세계의 불완전성을 통해서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세계는 자신들의 수중에 놓여 있지 않다는 각성이 생긴다. 여기서 그들은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적개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적개심은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에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비관적인 전망을 영원하고 불변하는 세계에 대한 이론적인 낙관적인 전망을 통해서 보상을 받으려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낙관적인 전망 속에도 하나의 의지가 숨어 있음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의지를,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어떻게 진리의 의지가 형이상학자의 적개심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인가? 형이상학자의 순수한 이성은 변화하는 세계에서 실재적인 부정을 체험하고 고통을 겪는다고 했다. 즉 이러한 세계는 그를 속이는 미혹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미혹의 세계에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세계를 고안해 냈을 때, 그는 이러한 고안을 통해서 더 이상은 미혹되지 않기를 의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은 미혹되지 않으려는 진리에의 의지가 숨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의 의지에 의해서 영원한 불변하는 세계가 긍정됨으로써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부정은 더욱 강해진다. 적개심은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적개심에 의해 지탱되는 형이상학자의 사유의 구조는 3단계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첫째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부정이요, 둘째는 불변하는 세계에 대한 긍정이요, 셋째는 이러한 긍정에 의해 야기된,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더 강력한 부정이 그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니힐리즘은 "생성, 즉 생겨남과 사라짐을 그 자체로 이미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단지 무제약적인 것, 하나, 확실한 것, 존재자만을 긍정하는" 모든 가능한 종류의 세계부정적인 사유의 방식을 의미한다. 세계부정은 사유의 타자로서 논리적인 법칙과 대립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부정이다. 이렇게 논리적인 법칙의 규범위에서 구축된 형이상학은 생겨남과 사라짐의 과정내에 있는 세계를 부정한다. 형이상학의 니힐리즘은 디오니소스적 현실의 비정상성에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이러한 현실 대신에 경직된 진리의 세계를 정립한다.

형이상학적 니힐리즘은 디오니소스적 현실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금욕적인 이상에 근거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금욕적 이상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전개한다. 니체에 의하면, 금욕적 실천에서 사람들은 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인간은 세계에의 자신의 결합을 포기하고 자아의 충동과 투쟁할 때만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금욕은 일차적으로 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금욕적 이상은 생의 부정을 넘어간다. 즉 금욕적 이상은 생을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한갓된 교량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금욕적 이상에 대한 이론은 "형이상학적인 가치, 즉 진리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가치 - 이러한 가치는 저 이상내에서 보증되고 작성되는데(이러한 가치는 저 이상과 더불어 성립하고 무너지는데) - 에 대한" 믿음에서 정점에 이른다.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믿음은 이제 생으로서의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니체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진리의 가치에 대한 그리고 참된 세계의 인식가능성에 대한 믿음에서 "현전을 향한 몸짓"이 드러난다. "현전"이란 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생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가? 그것은 생의 유지(Erhaltung)를 위한 것이다. 금욕적 실천은 생의 가치를 부정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생을 거역하는 의지는 보호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몰락하는 생에게 생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금욕적인 이상은 이처럼 "생을 유지시키는 비결"이다. 금욕적인 이상은 생의 부정속에 생을 긍정하는 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 진리를 향한 형이상학적 추구는 "생을 거역하는 의지, 생의 가장 원칙적인 전제들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지이며 의지로 남아 있다! (...) 차라리 인간은 아직도 어떤 것도 의욕하지 않기 보다는 무를 의욕한다..." 니힐리즘으로서의 형이상학은 무에의 의지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체 역시 러시아의 니힐리즘 논쟁에서 드러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통해서 니힐리즘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니힐리즘 논쟁과의 차이가 드러난다. 니체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는 문제를 세계가 인간에 대해서 갖는 가치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또한 니체는 니힐리즘을 지금까지는 명료하게 되지 않았던 차원에서 논의하는데, 그것은 그가 존재와 생성의 양극성에 의거해서 니힐리즘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존재와 생성이 전통 형이상학의 근본개념임을 주목할 때, 니체는 러시아의 니힐리즘보다 더 충실하게 형이상학적인 전통 속에 서 있는 셈이다.

III. 니체의 니힐리즘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니체는 전통적인 니힐리즘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니체는 니힐리즘이 아닌 다른 철학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의 철학마저도 분명히 니힐리즘으로 명명한다. 이것은 그가 기존의 니힐리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철학으로서의 니힐리즘을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니체의 니힐리즘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견해에 의거해서 니체의 니힐리즘을 밝혀 보겠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에게서의 니힐리즘은 일단은 야코비가 비판한 피히테식의 관념론도 아니며 또 19세기 중엽 러시아를 휩쓸었던 피사레프의 입장과 같은 실증주의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니체에게서의 니힐리즘은 본질적으로 그 이상을 의미한다. 니체는 니힐리즘에 대해서 말할 때 "유럽의 니힐리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럽의"라는 형용사는, 하이데거에 의하면, "역사적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니힐리즘이 한 때 즉 19세기를 풍미한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에서의 "역사적인" 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서구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즉 존재에 의해서 지금까지 보내어졌으며 다가올 세기마저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니힐리즘은 수 많은 역사적 운동중의 "하나의" 운동이 아니라 서구의 역사를 움직이는 "유일한" 근본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니힐리즘에 대한 그의 인식을 결코 완결된 연관 속에서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니체가 니힐리즘을 모든 본질적인 방향들과 단계들과 방식들에서 속속들이 사유하였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파악을 위해서 하이데거는 니체 사후에 그의 유고를 모아 편집한 "힘에의 의지"는 편집자가 임의적으로 유고를 편집한 것으로서 니힐리즘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에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의 생의 마지막 2년인 1887년과 1888년에 쓰인 유고를 집중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첫째,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고의 가치들의 탈가치화(Entwerfen)"로 이해한다 :

"니힐리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의 가치들이 탈가치화가 되는 것이다. 목적이 없는 것이다;>왜<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신"을 의미한다. 더 포괄적으로는 존재자들 위에 세워진 초감각적인 것들, 이상적인 것들, 규범들, 원리들, 규칙들, 목적들, 가치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존재자 전체에게 하나의 목적이나 질서내지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것들이 그 지배력을 상실하고 무효화되는 것 그래서 존재자가 그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최고의 가치들의 탈가치화로서의 니힐리즘을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로 표현한다.

둘째, 니체는 니힐리즘을 "모든 가치들의 전도(Umwertung)"로 이해한다. 지금까지의 최고의 가치들의 탈가치화는 니힐리즘의 시작에 불과하다. 진정한 니힐리즘은 이러한 탈가치화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가치정립이라는 과제에 나아가야 한다. 니체는 이러한 과제를 떠 안는 니힐리즘을 고전적인 니힐리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철학을 고전적인 니힐리즘이라 칭한다. 이것은 니체가 전통적인 플라톤주의를 니힐리즘으로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철학도 니힐리즘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쨋든 니체는 고전적 니힐리즘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가치들을 부정하고 파괴하며 존재자의 한갓된 부정성만을 의미하는 니힐리즘의 허무주의적인 의미에서 벗어나게 된다. 니체가 "모든 가치들의 전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러한 새로운 가치정립을 시도하는 고전적인 니힐리즘을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의 전도가 수행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새로운 원리가 필요하다. 플라톤주의와 같은 전통적인 니힐리즘에서는 이러한 원리로서 존재자 위에 세워진 초감각적인 것, 즉 이데아를 가치의 척도로 삼았지만, 이제 모든 가치가 탈가치화된 상황에서는 이러한 이데아는 더 이상 새로운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힘에의 의지이다.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가 제시함으로써 니체는 두 가지를 의도하고 있다. 첫째는, 존재자 전체, 니체의 용어로 말하면, 생의 근본성격을 힘에의 의지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즉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존재자의 본질이 힘에의 의지가 된다. 둘째로, 힘에의 의지는 힘의 본질에 대한 해석을 의도한다. 힘의 본질은 그것이 더 많은 힘을 지향하는 한에서만, 힘의 상승을 지향하는 한에서만 힘이라는 것이다. 힘은 그것이 그때마다 도달된 힘의 단계들을 넘어가고 능가하는 하는데서 그것의 본질을 갖는다. 자신을 "능가하는 힘을 얻음"(ubermachtigen)이 힘의 본질이다. 힘이 어떤 하나의 단계에 머물고 만다면, 이것은 이미 힘이 아니며 무력함일 뿐이다. 힘이 단지 힘의 상승으로서의 힘이라면, 이것은 힘이 본질적으로 생성임을 의미한다. 그것도 지속적인 생성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생성은 힘의 상승내에서 포위되어서 계속해서 이러한 힘의 상승에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 결과 이러한 힘에 따른 생성으로서의 존재자 전체는 계속해서 언제나 그 자신에로 회귀하지 않으면 안되며 동일한 것을 나르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힘에의 의지로서의 존재자 전체는 "동일자의 영원회귀"로 규정된다.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힘에의 의지라는 본질을 가진 존재자 전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즉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명칭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들의 전도와 더불어 인간은 새로운 질서하에서 존재자 전체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초감각적인 것, 피안의 것, 하늘이 무효화하였기 때문에 대지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질서는 인간에 의한 대지에 대한 순수한 힘의 무제약적인 지배에 의해서 생겨난다. 대지에 대한 무제약적인 지배를 수행하는 인간은 누구인가? 그것은 가치의 척도를 신에게 두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인간일 수 없다. 그것은 가치의 척도와 중심을 자신에게 두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이 바로 "초인"이다. 초인은 이제 남은 유일한 존재자인 대지의 목적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가 ">인간성<이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초인이 목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셋째, 니체는 니힐리즘을 역사로 파악한다. 이것은 니힐리즘이 역사적으로 추적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를 가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에 의하면, 니힐리즘은 그것의 전단계로 염세주의(예, 쇼펜하우어의 철학)를 가진다. 염세주의는 모든 가치가 탈가치화됨으로서 이 세계는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나쁜 세계라는 믿음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생은 살만한 그리고 긍정할 만한 어떤 가치도 없는 것이 되는 단계이다. 이러한 염세주의도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강한 염세주의와 약한 염세주의이다. 전자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며 위험한 것을 직시하고 아무것도 은폐하려하지 않는 염세주의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도처에서 어두운 것만을 보며 매사에 있어서 그것이 실패로 끝날 이유를 대며 모든 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안다고 자부한다. 약한 염세주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역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역사주의에로 도피한다. 염세주의는 니힐리즘으로 발전한다. 니힐리즘에서는 지금까지의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넘어서 가치평가의 원천이 힘에의 의지임이 분명히 의식되는 단계이다. 니힐리즘에서도 두 가지 단계가 성립한다. 불완전한 니힐리즘과 완전한 니힐리즘이다. 전자는 초감각적인 것의 자리에 새로운 이념들, 이를테면 세계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세계행복론, 사회주의, 바그너의 음악과 같은 이념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불완전한 니힐리즘에서는 아직은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나지 않아서 새로운 가치들이 정립되지 않고 있다. 가치전도와 가치정립은 완전한 니힐리즘에서 일어난다. 완전한 니힐리즘에로 가는데에도 수동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을 거친다. 완전한 니힐리즘에서 비로소 존재자의 근본성격은 힘에의 의지로 규정되고 이 힘에의 의지에서 새로운 가치정립이 가능하게 된다. 니체는 완전한 니힐리즘을 고전적인 니힐리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니힐리즘을 고전적인 니힐리즘으로 파악하였다. 염세주의를 거쳐 고전적인 니힐리즘에 이르는 이러한 과정에서 보면, 니힐리즘은 단순히 역사를 갖는 것이 아니며 서양의 역사이다. 니힐리즘은 서양의 역사의 역사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니힐리즘은 역사의 법칙성, 내적인 논리이다.

넷째, 니체는 니힐리즘의 기원과 전개와 극복을 논할 때 그것을 오로지 가치사상에서부터 사유하며, 여기에서 그의 니힐리즘은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임이 드러난다. 니체는 존재를 가치로 파악한다. 이때 가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어떤 것인가? 그렇지 않다 :

"추론-결과 :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가지고 세계를 우선 평가하고자 했으며, 기초로 놓여질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을 때 결국 탈가치시켜 버렸던 바인 모든 가치들 - 이러한 모든 가치들은 심리학적으로 추산해 볼때는, 인간의 지배-형성물의 보존과 상승을 위해서 유용한 특정한 전망들의 결과이다:그리고 단지 사물들의 본질내에로 거짓 투사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물들의 의미와 가치의 척도로 정립하려는 것은 또한 언제나 인간의 과장된 소박함이다."

이 인용문에 의하면, 가치는 인간의 지배-형성물의 보존과 상승을 위한 전망들의 결과로 규정된다. 여기서 인간의 지배-형성물은 과학, 예술, 국가, 종교 그리고 문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배-형성물의 보존과 상승의 배후에 있는 것은 힘이다. 즉 힘의 보존과 상승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보존과 상승은 힘에의 의지의 본질이다. 힘에의 의지는 계속해서 자신을 넘어가려하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가치를 정립하는 자는 바로 힘에의 의지이다. 가치정립과 힘에의 의지의 본질적 연관은 다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가치들과 가치들의 변화는 가치를 정립하는 자의 힘의 성장과 관련된다."

니힐리즘을 가치사상에서부터 이해하는 니체의 니힐리즘은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진리를 다룬다. 니체가 존재자 전체를 생으로 규정하고 생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로 파악한다면, 니체의 니힐리즘은 존재자 전체를 힘에의 의지에서 규정하는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인 것이다. 니체의 니힐리즘이 형이상학이라는 하이데거의 해석은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니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들과 전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니체는 참된 세계로서의 초감각적인 세계를 제거함으로써 모든 형이상학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형이상학에 대한 궁극적인 부정을 감행한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을 헤라클레스주의나 의지의 철학이나 생철학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서양 형이상학을 그 전경에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오는 피상적인 해석이다.

IV. 니체의 니힐리즘과 서양 형이상학

전통적인 니힐리즘은 생성의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를 구분하고 이러한 초월적인 세계를 존재, 목적, 진리의 세계로 간주한다. 니체는 이러한 초월적인 세계속에 놓여진 존재, 목적, 진리를 가치로 파악하고 이러한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힘에의 의지에 의해 정립된다고 생각했다. 니체에게서는 가치정립의 원천에 대한 물음은 힘에의 의지에로 소급되어 설명되고 있다. 문제는 니체처럼 가치를 힘에의 의지로 소급한다고 해서 가치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해결되는 것인가? 왜 가치의 원천이 힘에의 의지인가? 니체의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단순히 니체의 독창적인 사상인 것인가? 여기서 하이데거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의 원천을 묻는다. 즉 힘에의 의지는 서양 형이상학과의 연관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 이전의 서양 형이상학은 니체의 가치사상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치 사상의 도래는 니체 이전의 시대의 형이상학을 통해서 예비되었다고 주장한다. 가깝게는 주관을 인간으로 파악한 데까르뜨 이후의 근세 형이상학에 의해서, 그리고 더 멀게는 중세 형이상학과 플라톤에게로까지 소급되는 그리스의 형이상학에 의해서 예비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치전도를 통해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 했던 니체의 시도의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근세 형이상학은 "주관"(Subjekt)의 지배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여기서 "주관"은 철저하게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만이 주관이 되는 것이다. 원래 "주관"에 해당되는 라틴어는 "sub-iectum"이며 이 라틴어는 다시금 희랍어 ???-????????의 번역이다. ???-????????은 밑에-놓여 있는 것, 근거에-놓여 있는 것, 그 자체에서부터 이미 앞서-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돌, 식물, 동물들도 인간에 못지 않는 앞서-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이 근세에서 유독 인간에게만 해당되게 된 것은 데까르뜨의 공적이다. 데까르뜨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가장 확실한 명제로 내세운다. 보통 사람들은 이 명제를 생각한다라는 사실에서부터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제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피상적인 해석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데까르뜨는 이 명제를 통해서 다른 것을 말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cogitare의 본질에 대한 데까르뜨의 설명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데까르뜨는 중요한 귀절들에서 cogitare 대신에 percipere를 사용한다. percipere는 "어떤 것을 꽉 붙잡다", "어떤 것을 소유하다", "하나의 사태를 장악하다"를 의미하며, 그것도 자기-앞에-세움(Vor-sich-stellen)이라는 의미에서의 자기-에게로-세움(Sich-zu-stellen)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것을 꽉 붙잡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percipere를 의미하는 cogitare는 표상(Vor-stellen)이 된다. 여기서 앞에 세우는 "자기"는 누구인가? 그것은 표상하는 자이다. 이 점은 데까르뜨의 "ego cogito"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ego cogito(나는 생각한다)"는 "ego cogito me cogitare(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이다. 이것은 모든 표상(cogitare)에서는 표상하는 자아가 더 본질적으로 그리고 더 필연적으로 함께 표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표상된 것은 표상하는 자아에게서 확실성을 보장받게 되므로 그것은 표상하는 자아에게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하는 자아가 이제 앞서-놓여 있는 것, 즉 주관이 된다. cogito에서 표상하는 자로서의 주관이 말해진다면 데까르뜨의 "cogito sum"도 달리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cogito sum은 내가 생각한다라거나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또 흔히 그렇게 해석되었듯이, 나의 생각이라는 사실에서부터 나의 존재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cogitare가 표상을 의미한다면, cogito sum은 나는 표상하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것, 나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표상을 통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나의 표상이 모든 표상된 것의 현존, 즉 존재자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규정함을 의미한다. 존재는 중세에서처럼 신에 의한 피조물, 즉 창조되어 있음으로 규정되지 않고 표상되어져 있음(Vor-gestelltheit)으로 규정된다. 인간만이 주관이 되는 사건은 이처럼 존재를 다르게 규정할 뿐만 아니라 진리도 다르게 규정한다. 중세 기독교는 존재를 창조되어 있음(Hergestelltheit)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근세에서 진리의 근거는 인간에 의해 놓여진다. 진리는 표상하는 자의 확실성(Gewissheit)에 의해 결정된다. 데까르트가 cogito sum을 명석판명한 진리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곧 표상하는 자의 확실성이다. 중세의 구원의 확실성의 자리에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인간 표상의 확실성이 들어서게 된다. 진리는 확실성이 된다.

인간을 주관으로 파악함으로써 존재를 표상되어져 있음으로 규정하고 진리를 확실성으로 규정하는 근세 형이상학은 결국 인간 이성을 주관성의 본질로 간주하는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다.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데까르뜨에 의해 시작되고 라이프니쯔에게서 변경을 겪고 난 후 칸트에게서 그 "중심"에 도달하게 된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경험 일반의 가능조건들이 동시에 경험의 대상들의 가능조건들이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것은 경험 일반의 가능조건, 즉 표상의 가능조건은 동시에 경험의 대상들의 가능조건, 즉 표상된 것의 가능조건이외의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표상의 가능조건들이 표상되어져 있음을 형성한다. 이러한 표상되어져 있음이 대상성의 본질이며 대상성은 존재의 본질이다. 결국 존재는 표상-되어져 있음(앞에-세워져 있음, Vor-gestelltheit)이 된다. 이러한 앞에-세워져 있음은 동시에 앞에 세우는 자(표상하는자)가 세워진 것을 확신하는 그러한 방식의 세워짐이다. 확신은 확실성내에서 쁹아지게 된다. 이러한 확실성이 진리의 본질을 규정하게 된다. 칸트에게서도 진리의 근거는 표상, 즉 cogito me cogitare라는 의미에서의 "사유"이다. 칸트는 위의 명제를 통해서 대상의 표상되어져 있음으로서의 진리, 즉 객관성은 그것의 근거를 주관성, 즉 자신을 표상하는 표상에서 근거를 가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에 의해서 중심에 도달한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주관성을 절대정신으로 파악한 헤겔에서 정점에 이른다.

근세 형이상학을 지배하는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니체에게서도 그 나름의 변형을 거치면서 그대로 나타난다. 이 점을 하이데거는 4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첫째, 데까르뜨에게서 인간이 표상하는 자아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이었듯이 니체에게서 인간은 충동을 느끼고 흥분하는 신체라는 의미에서의 주관이다. 니체에게서의 모든 세계해석은 형이상학적인 단초로서의 신체에로 되돌아감으로써 수행된다. 둘째, 데까르뜨에게서 존재자는 자아-주관에 의한 표상되어져 있음을 의미하였는데 니체에게서도 존재는 일단은 표상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표상되어져 있음으로서의 존재는 존재의 진정한 성격인 생성을 완전히 파악하기에서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표상되어져 있음으로서의 존재는 생성의 가상일 뿐이다. 이러한 생성으로서의 존재의 본래적인 성격이 힘에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힘에의 의지로서 존재를 규정하는 니체의 입장속에는 존재를 표상되어져 있음으로 보는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셋째, 데까르뜨에게서 진리는 표상된 것을 확실하게 표상하는 자에게로 세움, 즉 확실성이었다. 진리는 표상하는 자의 확실성이다. 이에 비해 니체는 진리를 "참으로 간주함"(Fur-wahr-halten)으로 이해한다. 즉 전통적인 형이상학적인 진리는 힘에의 의지에 의해 참으로 간주된 것이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힘의 상승을 위해서는 존재자를 참으로 간주하고 정립할 수도 있고 또한 거짓으로 간주하고 폐기할 수도 있다. 어떤 존재자가 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것은 확실한 것이라면, 참으로 간주함 속에는 확실성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넷째, 데까르뜨에게서 표상하는 자의 확실성에 의거하여 표상된 것 즉 존재가 참이 된다면, 표상하는 자로서의 인간이 모든 존재자의 척도가 된다. 이것은 니체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표상된 것은 인간의 산출물이다. 더 나아가 표상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형태지움이나 각인이 인간의 산출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전망(Perspektiv)에 의거해서 세계를 형태지우는 무제약적인 주인인 것이다.

근세의 데까르뜨에 의해 시작되었고 20세기의 자연과학의 시대에서 완전히 꽃핀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근세 이전의 철학과는 어떤 관계속에 있는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단순히 근세의 역사속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세에 의해 간접적으로 예비된다. 중세는 "구원의 확실성"(Heilsgewissheit)을 믿었다. 구원의 확실성이 근세에서의 진리인 주관의 확실성을 가능하게 한다. 근세는 "구원의 확실성을 목표로 하는 기독교적인 인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예비된다". 그래서 근세의 모든 현상들은 기독교의 일종의 세속화일 뿐이다. 중세에 의해 예비된 주관성의 형이상학의 기원은 더 나아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로 소급된다. 이 점을 하이데거는 니체의 가치개념과 플라톤의 이데아개념과의 연관을 통해서 설명한다.

소크라테스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존재를 피지스로 규정하였다. 피지스는 자신-에서부터-개현함(das von-sich-aus-Aufgehen), 열린 장-내에로-자신을-개방함(das ins-Offene-sich-Offenbare)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우시아로 규정한다. 우시아는 존립하는 것의 비은폐된 것내에로의 현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피지스에 대한 변화된 해석이지만 그럼에도 존재를 현전성으로 이해하는 점에서 일치된 해석이다. 플라톤은 우시아를 인식하는 자의 봄과 연관지움으로써 이데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데아는 볼 수 있음, 즉 외양으로서의 현전성(Anwesenheit)이다. 이러한 외양속에 서 있는 것이 존재자이다. 나아가 그는 이데아중의 이데아로 선의 이데아를 말한다. 선의 이데아는 태양의 비유에 의해 설명된다. 감각적인 눈은 사물을 보기위해서 제 3자인 태양을 필요로 한다. 태양이 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성이 이데아를 인식하기위해서는 제 3자인 선이라는 이데아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선의 이데아가 존재자를 존재자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선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가능하게 함"(tauglich machen))이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에서 존재는 "고유한 이중성"을 갖는다. 첫째는 현전성을 의미하며, 둘째는 이데아를 선으로 해석하는데서 오는 가능케함을 의미한다. 존재는 순수한 현전성이면서 동시에 존재자를 가능케함인 것이다. 그런데 존재자가 존재보다 더 두드러지면서 그리고 보는 자로서의 인간의 태도가 더 중요시됨으로써 존재는 존재자를 위해서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된다. 현전성으로서의 존재는 망각될 운명을 지니게 된다.

현전성으로서의 존재는 망각되고 가능하게 함으로서의 존재만이 남게 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한 주관이 되는 근세 형이상학에서이다. 데까르뜨에게 cogito는 percepio를 의미했다. percepere는 자기-앞에로-세움이라는 의미에서의 무엇을 장악함을 뜻한다. 이제 존재는 앞에 세우는 주관에 의해 장악된 것이 된다. 현전성으로서의 이데아는 앞에 세워져 있음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이러한 앞에 세워져 있음이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인 대상을 가능하게 한다. 존재는 대상의 가능조건이 된다. 경험의 가능조건이 경험의 대상의 가능조건이라는 칸트의 유명한 주장이 여기서 성립된다. 가능조건으로서의 존재의 개념은 결국 니체에게서 가치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니체는 가치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의 보존과 상승의 조건으로 규정했었다. 이렇게 보면 니체의 가치사상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예비된 것이다. 그것은 이데아를 선으로 규정한 플라톤과 이데아를 percepere로 규정한 데까르뜨, 그리고 존재를 대상의 대상성의 가능조건으로 규정한 칸트에 의해 예비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니체 이전의 모든 형이상학이 가치사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의 가치사상은 형이상학속에서 그 뿌리가 놓여 있었으며 니체에게서 존재는 가치로 개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체의 가치사상과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서양 형이상학이 없었다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었던 서양 형이상학의 適者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의 형이상학은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이자 완성이다. 형이상학의 역사속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규정되었다. 형이상학은 이성적 합리성과 동물성이라는 양극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헤겔은 이성적 합리성의 궁극적 완성을 보여준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단순한 오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합리성은 아니다. 그의 절대정신을 자신을 알아가는 의지로서의 무제약적인 주관성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앎(합리성)과 의지의 통일로서의 주관성이다. 이에 반해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동물성의 궁극적 완성을 보여준다. 니체는 의지의 무제약적인 주관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무제약성은 헤겔의 형이상학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니체의 입장은 형이상학의 본질적 가능성, 즉 극단적인 반대의 가능성이 완전히 길러내어진 결과 생겨난 것이다 :

"그렇다면 >>형이상학의 종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답:형이상학의 본질적 가능성들이 그 속에서 길러내어지는 역사적 순간. 이러한 가능성들중의 최후의 가능성은 그 속에서 형이상학의 본질이 역전되는 저 형이상학의 형식(즉 니체의 형이상학)이다."

니체의 형이상학을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이자 완성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사상가의 사유의 경험은 그 사상가 자신의 것일 수 없으며 존재의 그 사상가에 대한 말걸음의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사유의 경험은 "존재의 현성하는 진리"에서부터 생겨나며 이러한 존재의 진리의 영역내에서 사상가의 사유는 움직이는 것이다.

V. 니체의 니힐리즘의 한계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는 첫째로, 존립하는 것의 비은폐된 것에로의 현전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는 플라톤에게서 선(아가톤)으로 해석됨으로서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함, 즉 가능조건을 의미한다. 존재를 가능조건, 그것도 존재자의 가능조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존재보다 존재자가 더욱 전면에 드러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곧 현전성으로서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이며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망각으로서의 존재망각은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에서 백일하에 드러난다.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앞에 세워진 것으로, 그리고 인간을 앞에 세워진 것을 장악하는(percipere) 주관으로 파악함으로써 존재자에게만 주목할 뿐 존재자가 드러나는 場인 현전성,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중세에 의해서 예비되고 그것의 시원은 존재를 선으로 해석한 플라톤에게까지 소급된다. 비록 플라톤이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아니라할지도 그에게서 주관성의 형이상학으로서의 서양 형이상학의 근원적인 토대가 놓여 있는 것이다.

존재를 망각하는 이러한 서양 형이상학을 하이데거는 존재 그 자체에 있어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즉 "존재 그 자체에 있어서는 무인 역사"(die Geschichte, in der es mit dem Sein selbst nichts ist)로 규정한다. 여기서 존재는 무(nihil)로 규정된다. 존재를 무로 규정하는 형이상학이 바로 Nihilismus이다. 서양 형이상학은 본래적으로 니힐리즘이다. 이러한 니힐리즘으로서의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이 니체라면 니체의 철학 역시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일 수 밖에 없다. 니체가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이었다는 것은 그가 존재를 가치로 사유하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존립하는 것으로 사유되고 있다는 것은 존재가 존재로서 보여지지 않고 존재자로 보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존재가 무로 보여지고 있다면, 니체 역시 존재자에게만 주목하는 존재망각 속에 있는 것이다. 사실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초로 경험했으며 무엇보다도 니힐리즘을 극복하려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고의 가치들의 탈가치화로 경험하고, 지금까지의 가치들의 전도를 수행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를 제시함으로써 니체는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니체의 극복은 그의 철학 역시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이라면 진정한 극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니힐리즘에로의 "최종적인 휩쓸려 들어감"이다. 여기에서 니체의 니힐리즘의 한계가 드러난다.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를 사유하지 않았고 니체 역시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이자 종말로서 존재를 가치로 사유함음으로써 존재를 사유하지 않았다고 할 때, 이것은 서양 형이상학은 전적으로 존재와 같은 것을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다루기는 했으나 그것을 존재자와 연관해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존재자는 그것이 무엇-임(was-sein)과 어떻게-임(wie-sein)에서 규정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무엇-임을 이데아로, 어떤 이들은 본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존재에 해당하는 본질은 존재자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은 존재를 언제나 존재자에서부터 묻는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로 사유하지 않은 이유가 드러난다. 또 형이상학은 존재를 Apriori로 규정하는데 이것 역시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자에서 사유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존재자 보다 "나중의 것"(das Aposteriori)이지만, 그것의 "본성에 있어서는" 존재자 보다 "앞선 것"(das Apriori)이다. 존재는 존재자에서부터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는 "있으며"(ist) 존재는 "현성한다"(wesen)는 사실을 형이상학은 망각하는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에서부터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결국 존재를 최고의 존재자인 신에서부터 규정하게 되는 운명에 처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이상학을 존재-신-학(Onto-theo-logie)라고 명한다.

VI. 맺는 말

형이상학은 존재를 망각한, 그래서 존재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니힐리즘이다. 이러한 니힐리즘으로서의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것, 니힐리즘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극복"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자기 밑에 두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자기 밑에 놓여진 것을 이후로는 어떤 결정적인 힘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극복은 제거의 의미를 갖지만, 제거를 의미하지 않을 때에라도, 최소한으로는 "...을 향해서 쇄도함"(ein Andringen gegen...)의 의미를 갖는다. 극복의 이러한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니힐리즘의 극복"은 "인간이 자신에서부터 존재를 향해서 관계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존재 자체를 향해서 관계할 정도로 또 존재를 자신의 수중에 가질 정도로 능력있는 자인가? 앞에서 보았듯이, 니힐리즘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역사는 바로 존재 자신이 자신을 보내온 역사이며 동시에 인간이 이러한 존재의 부름에 응답한 역사였다. 따라서 인간이 존재를 자신의 수중에 두는 의미에서의 극복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일은 인간의 본질을 그 축에서부터 제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에서부터 존재를 향해서 관계함"으로서의 니힐리즘의 극복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사유는 존재자신에 의해서 요구되면서 존재에 대해서 "응답적으로 사유할"(entgegendenken) 뿐이다. "응답적으로 사유함"이라는 말은 "존재 자체는 멀어지지만 그러나 이러한 멀어짐으로서의 존재는 바로 존재의 도래의 처소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요구하는 바로 저 연관"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응답적으로 사유함"은 존재의 멀어짐, 존재의 밖에 머물고 있음을 방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존재의 밖에 머물고 있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를 그것의 스스로 멀어짐에서 뒤쫓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와 관계하게 하며 존재의 편에서 다시 머무는 것이다. "응답적으로 사유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다시 머뭄을 하이데거는 "되돌아감"(Schrit zuruck)이라 부른다. "되돌아감"은 존재의 방임에서부터 존재 자신에 의해서 이미 오래전에 사유에게로 보내어진 저 영역, 즉 존재의 비은폐성의 영역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존재자에게만 주목할 뿐 >>존재에게서 있어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니힐리즘의 시대의 깊은 밤 속에서 니힐리즘의 극복은 존재물음을 새롭게 일깨우는 일이라는 하이데거의 외침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의 길로 남아 있는 것 같다.

* 참고 문헌
- M. Heidegger, Nietzsche II, Neske, 1961.
- Hans-Juergen Gawoll, Nihilismus und Metaphysik, frommann-holzboog.
1989.
- F. Nietzsche, Wille zur Macht, 1888.
- F. Nietzsche, Sa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aendern. Hrsg. von Giorgio Colli und Mazzino Montinari.
-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Verlag. 
출처 : 작은 삶 작은 이야기
글쓴이 : 비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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