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

鶴山 徐 仁 2006. 4. 19. 12:43

남산편지 606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어두운 시대에 사회운동, 민족교육, 언론 창달에 온몸을 바친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충남 서천군에서 가난한 선비인 이희택씨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조정의 신임을 받던 젊은 박정양(朴定陽)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사랑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국내외 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가 38세 되던 해 1등서기관으로 미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는 “무엇이 이 나라를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미국이 신봉하는 종교에 궁금증을 갖게 되어 그가 기거하던 공사관 부근의 교회를 시간 나는 대로 찾아갔지만 삼강오륜으로 굳어진 그의 머리로는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수구파들이 조작한 개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상재는 우연히 감방 벽 틈에 끼여 있던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발견하여 읽고 또 읽으면서 자신의 부족함과 죄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진정한 애국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기독교 신앙으로 정신무장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침 언더우드와 아펜절러 등 선교사들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자 그는 동지들과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에 입교하여 YMCA를 통해 구국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57세에 YMCA 간사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일제의 회유에 언제나 성경으로 응대했습니다. “검(칼)을 쓰는 자는 검(칼)으로 망한다” 이 말에는 ‘일본은 결국 저절로 망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신중함과 우둔함을 구별해 전략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이미지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가 활약한 중심적 활동 단체가 YMCA이며, 그의 주변에는 청년애국지사가 항상 함께한 것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 자체도 언제나 청년이었습니다. 노년에도 그는 청년들과 어울려 담소하며 즐겼기 때문에 한 친구가 충고했습니다. “젊은 사람들하고 너무 허물없이 굴면 버릇이 없어지지 않겠나?” 월남이 대답했습니다.  “아니, 여보게,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그럼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하겠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청년 노릇을 하는 걸세!”

1927년 민족 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한 신간회가 창설되어 회장이 되었지만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1927년 3월29일 78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장례 행렬에는 무려 10만 명의 국민이 따랐고 YMCA를 비롯한 243개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사상 첫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은 NGO의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참으로 많은 NGO가 있고 NGP의 리더들이 있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깊이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정의로움에 있어 이상재 선생을 따르지 못하고 있지 않나 우려합니다. 영원한 청년이 그리운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개정 욜 2:28 NIV]

“남산편지”는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인 정충영 교수가 이메일로 한 주에 네 차례씩 무료로 보내드리는 예화중심의 글입니다.

* 신청하시면 누구에게나 보내드립니다. 신청은 남산편지 홈페이지(http: //www.nsletter.net)에서 하시거나 (cyjung@knu.ac.kr)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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