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스퀘어 가든" 지하에 있는 펜 스테이션에서 필라델피아 행
9시 반, 기차표를 샀다.
필라델피아의 내 동기생이 밀워키에 사는 친구와 나를 2박 3일 일정으로
초청하여서 겨울 밤을 함께 지내자는 것이었다.
밀워키의 친구는 전직 신부님으로 나와 지난 여름에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위시하여 중서부 대 평원을 일주일간 쯤 함께 헤매고 다닌
동기로서 미국 이민 생활 35년째를 맞고 있었다.
기차는 정시에 도착하였다.
1시간 25분 걸리는 Amtrek의 기차요금은 비슷한 거리와 시간의 포킵시
가는 때보다 4배 이상 비싸서 54불 40전이었다.
다만 객차의 모양이나 실내는 깨끗하여서 흔히 스릴러 영화 같은데에서
보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맨해튼을 빠져나가는 구간은 포킵시 갈때처럼 10여분 가량 지하의
어둠 속이었고 지상으로 겨우 고개를 내민 지역은 저지 시티와 뉴아크
역이었다.
뉴아크 역은 뉴욕 메츠의 세이(Shea) 구장이 있는 동네였고 그 다음은
나도 가끔 이용하게 되는 "뉴아크 국제 공항" 역이었다.
그러나 짙은 안개가 끼어서 시계는 제로였다.
차창으로 사진을 찍기는 힘들었으나 겨울 여행의 또 다른 운치였고
대도시 주변의 퇴락한 풍경을 가려주는 가리개이기도 하였다.
(필라델피아 역의 메인 홀)
기차는 필라델피아의 "30번가 역(30th Street Station)"에 제 시간에
도착 하였다.
필라 사는 친구는 공항에서 밀워키 친구를 픽업하여 역의 메인 홀에 있는
2차대전 전몰 장병 기념상 앞으로와서 기다리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지나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보니 비행기가 1시간 10분이나 연착이라는 것이다.
열차에서 감상했던 안개낀 풍경이 생각났다.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갔고 내 옛친구들은 만면에 웃음을 띄며 나타났다.
공항과 역 사이는 10분 거리였다.
익숙하면 모두 편하게 보이는가 보다.
얼마전 밀워키 친구는 거의 한 세대만에, 그리고 펜실베니아 친구는
2년만에 처음 만났을 때에는 모두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고 어색했던
얼굴들이 다시 보니 그 옛날 소년 시절로 돌아가 있었고,
마음도 이미 동심을 회복한지 오래였다.
우리는 이제 얼싸안을 필요도 없이 재회에 익숙해 있었다.
아니 내 친구 둘이는 공항에서 얼싸안았을 것이다.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필라 친구는 동반자가 있었고 밀워키 친구는 혼자였다.
미국이니 흠될 것도 없다.
부인과는 오래전에 헤어졌는데 똑똑한 아들은 물론 따로 살고 있다.
전직 신부님인 이 친구는 역사의 소용돌이도 다 겪었고,
남녀간의 개인사도 보통 사람은 흉내도 못낼만큼 감성적이고
운명적인 데가 있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그 궤적을 달려본 적이
있는데 사실은 그 작품의 구성이 어찌 따라오기나 하랴.
우리가 위스컨신과 일리노이와 아이오와 평원을 달릴 때, 그는 자신의
개인사를 다 말해주었고 내게 "팩션(fact + fiction)"을 써도 좋다고
동의를 해주었는데도 나는 아직 그 옥구슬같은 자료를 꿰지 못하고 있다.
"숙제를 못해서 면목이 없어."
내가 남의 개인사를 들추고 감추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주제가 너무 거대 서사 구조라서 손을 못대며 끙끙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외쳤다.
"숙제같거들랑 쓰지 말고 해방 되거라."
과연 선사(仙士) 다웠다.
나는 그를 선사라고 부른다.
신부님 직분은 벌써 아니고, 그렇다고 범인도 아니고,
선계(仙界)에서 온 사람같은 그의 풍모를 보고 내가 붙인 호칭이다.
하여간 그는 나에게 해방 선언을 해 주었지만 나는 숙제를 하고야 말
기세이다.
지금도.
(자유의 종 뒷편 길건너 건물은 인디펜던스 홀)
우리는 우선 시내에 있는 자유의 종 기념관으로 갔다.
"마틴 루터 킹 기념일"의 연휴가 계속되는 데에도 겨울날이 차가워서
그런가 구경꾼들은 한산하였다.
다만 메모지를 들고 다니는 중등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어서 다원국가
미국의 내일이 그리 근심할 지경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스캔들이 한 때 나오더니---."
"그런 이야기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벗나무 자른 일화가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고증 같은건 여기서는 대범하게 넘기더군.
그런 것 쓸데없이 다 따지다가는 화폐에 넣을 초상이 없어질걸---."
우리 대화의 일부였다.
자유의 종은 사실 깨어진 상처까지 있고, 규모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작은 것을 크게 중하게 여기는 것이 이 사람들의 공덕이었다.
이곳에서는 종을 지키는 경찰들의 태도도 어찌보면 과도하게
히스테리컬한 정도이다.
그러나 스스로 존중할 때에야 남의 존중을 받을 수 있으려니---.
어쨌든 기세에 눌려 우리는 건너편 인디펜던스 홀은 들어가 보지도
않고 사진만 찍었다.
점심은 지난번 처럼 순두부 집에서 먹고 교외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배가 부르자 친구의 집으로가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자고했다.
우리는 관광객으로 만난게 아니라 친구로서의 재회를 위하여
천리길을 달려온게 아니던가.
얕은 언덕 숲속에 자리한 친구의 아늑한 집은 구면인 나를 활짝 반기는
듯 하였다.
우리는 벽난로에 나무를 지피면서 지난 시절을 반추하였다.
나는 최근에 따로 두 친구를 만나보았기에 이번에는 나서지 않고
두 사람의 지난 시절에 관한 담소를 경청하였다.
답을 알고 있는 서로간의 질문에도 나서지 않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스테이크를 구으면서도 담소를 나누느라 고기를
많이 태웠는데,
집안에서 음식을 만들던 안 사람들도 음식을 좀 태웠다.
담소란 이렇게 즐거운 것이렸다.
집 주인은 건설계통에서 CEO까지 거친 경력이었으나 우리의 대화는
그저 인생론이었다.
물론 종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으나 신부를 그만 둔 내 친구가
무신론자가 아니었음은 물론이었다.
"욥 기"에 관한 문제, 구원의 문제 등에 그의 해박한 해설이 있었으나
여기 내 블로그 마당에서 논쟁을 불지를 형편은 아니다.
우리는 맛있게 저녁을 먹고나서 오랜만에 식욕을 찾은김에 이 댁에
준비된 감자와 고구마까지 벽난로에 구워먹으며 자정을 훌쩍넘겨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지난번 왔을 때에 나는 건강 때문에 일찍 자리에 누울수 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나도 자정을 넘기는 대열에 거뜬히 참여하였다.
크게 늦잠을 자지도 않은 그 다음날, 우리는 "아미시 마을"을 찾았다.
"아미시 마을"은 16세기 스위스에서 유래한 기독교 재세례파에서
떨어진 한 종교집단이 17세기 말 유럽 종교개혁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해 세운 신앙촌이다.
(아미시 마을 입구의 기프트 숍)
현재 오하이오, 인디애나, 펜실베이니아 주에 걸친 7개 지역에
약 1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미시 마을 입구에 갓더니 여름처럼 방문객이많지는 않았으나
꾸준하였다.
다만 겨울이라서 외부 관광은 막고 주거지에서만 설명을 들었다.
이 곳 랭커스터 아미시 마을에는 약 2000명이 살고있는데 이들중
외부인들과 결혼을 하는 경우에는 공동체에서 방출이 된다고 한다.
지난 20년 동안 그들은 10퍼센트 정도의 인구를 밖으로 보냈으나 전체
인구는 두배가 되었다고 한다.
안내와 설명은 나이든 부인들이 맡고 있었다.
"They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렇다면 부인은 아미시가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당연하지요, 그들은 외계와의 접촉을 피하니까요."
"전기는 쓰지 않나요?"
"그럼요. 가스(가솔린)와 석유는 쓰지만 밖에서 만든 전기는 쓰지
않지요. 아마도 전기선은 외계와의 연결이라고 보고, 또 TV등과도
직결된다고 보는 것이겠지요.
전화는 이제 휴대폰까지도 인정하지만 단 밖에서 사업상 필요할 때에만
인정합니다."
"영어를 쓰나요? 당신처럼---."
"하이랜드 독일어를 일상어로 쓰지요. 다만 영어도 다 압니다. 또 그들
외에는 모두 잉글리쉬, 영국인이라고 한답니다. 당신들도 포함해서---."
우리는 졸지에 영국인이랄까, 잉글리쉬 족속이 되었다.
별난 주장같지만 세상이 이 지경이 된것이 모두 물질 문명의 탓이라고
본다면 그들의 삶의 방식이야말로 지상 천국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두 환경론자임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미시 사람들은 입는 옷도 모두 짙은 검정으로 사치를 극도로 배제
하였다.
다만 결혼식 때만은 여자들이 짙은 브라운, 흰색, 진초록 등에서 가려
쓸 수 있는데, 설명을 하는 부인이 "Big choice!"라고 하면서 웃었다.
이 때 입은 컬러풀(?)한 옷은 나중에 이 세상 하직할 때 입고간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펜실베이니아의 전원에서 손수 나무를 베고 가꾸고
잔디를 심고 낙엽과 눈을 직접 치우는 내 친구도 숨은 환경론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밀워키에서 온 친구도 전원 생할에 대하여 깊은 조예가 있었다.
두사람이 잔디 가꾸는 일에 관하여 깊은 지식을 나눌 때에 문외한인
나는 침묵하였다.
그들의 대화는 평원을 달리면서 이제는 경마장의 말을 어떻게 기르고
조련하고 또 마주가 되는 입장이 한국과 미국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전문적 이야기로 진도가 나아갔다.
알고보니 우리 셋은 모두 마주(馬主)를 친구로 갖고 있었다.
한국에 하나, 위스컨신에 하나씩 내 친구의 차지였고,
나는 미국의 작가, "셔우드 앤더슨"이 오래 전에 쓴 "I Want to Know Why."라는 단편 소설 속에서 한사람을 알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친구의 아들이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열고 있는
큰 커피점을 찾았다.
백여평 되는 큰 규모에 실내는 매우 인상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저녁에는 일주일에 두번 라이브 공연도 있다고 한다.
잠시 우리가 들렀을 때에는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날"을 추념하는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평화, 평등, 정의, 진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음으로
이 시대 반전 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였다.
이라크 전에 대한 반전 포스터가 미리 무대 위에 붙어져 있는 것을
우리는 심상하게 바라보았다.
승용차의 뒤에 리본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하여 찬반을 표하고 다니는
나라가 아닌가---.
어쨌던 공연 시간이 밤 늦은 시간이고 대상이 젊은이들이어서 우리는
푸짐한 카푸치노와 뜨거운 사과 주스를 대접 받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어둠 속으로 나왔다.
다시 돌아온 친구의 따뜻한 집에서 이날도 자정을 넘기는 대화가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떠나는 날은 항상 섭섭하였다.
밀워키에서 사는 친구를 위하여 우선 우리는 공항으로 모두 가서
작별을 아쉬워하고 다시 기차역으로 왔다.
가까이에 있는 커티스 음대를 보며 우리는 또다시 작별하였다.
워싱턴 DC와 피츠버그를 거쳐서 달려온 Amtreck은 눈이 자욱히 내린
철길을 눈발을 날리며 힘차게 달려서 맨해튼으로 향하였다.
1시간 25분만에 도착한 맨해튼은 건물 사이의 계곡풍으로 몸이 날릴
지경이었다.
이런 눈바람도 처음이었다.
인적도 많지않았는데 그나마 모두 얼굴을 싸고 나왔다.
눈이 얼어붙은 어느 길거리에서 아이가 쓸어지는데 벌거벗은
마네킹이 속옷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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