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영주 부석사

鶴山 徐 仁 2006. 1. 15. 13:37
















































































자연에 순응하는 관용의 미(美)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에 탁월한 안목과 감각을 가졌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고 최순우 선생은 이 감동적 술회를 남겼다. 선생의 말을 좀 더 옮기면,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산수화 같은 서술이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가르는 태백산 줄기를 타고 봉황산을 뒤로 하여 정좌한 고찰,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부석사는 건축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한국의 전통건축 중 단연 수위에 꼽히는 수작이다. 지금은 봉정사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 공인되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건축이었다. 착시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굵게 만든 배흘림의 수법이며, 기둥들을 중앙을 향해 다소 기울게 만들어 집 전체가 뉘어 보이는 현상도 방지하는 ‘안쏠림’ 또는 ‘귀올림’ 등의 목조 건축방식이 여간 지혜로운 게 아니라서 무량수전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가 월등하다.

그러나 부석사의 미적 가치는 무량수전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다. 무량수전에 안치된 불상은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서방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인데 그 좌정한 방향이 남향이 아니라 동쪽의 사바세계를 향하고 있다.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의미하는 3층 석탑은 마당에 놓여 있지 않고 동쪽에 놓여 있으며 마당에는 석등이 놓여 세계를 밝힌다.

절묘한 것은 이 석등의 위치가 무량수전의 정중앙에 놓인 게 아니라 다소 서쪽으로 지우쳐 있는데, 이는 안양문을 지나서 오른 이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무량수전의 동쪽 출입문을 통해 들어오게 함으로써 아미타불과 자연스레 정면으로 대면하게 하는 놀라운 공간 연결을 만든다.

뿐만 아니다. 부석사의 배치를 이루는 축은 두 개가 있는데 이 축을 이룬 방식이 놀랍다.

천왕문과 범종각이 이루는 축과 안양문과 무량수전이 이루는 축이 약 30도의 각으로 틀어져 있다. 이 축의 향을 보면 무량수전~안양문의 축은 바로 앞의 낮은 봉우리를 안산으로 하여 작은 영역을 이루지만, 범종각~천왕문의 축은 태백산에서 내려와 소백산을 지나고 죽령을 이어 뻗은 도솔봉으로 향하고 있어 그 영역이 대단히 광대하다. 혹자는 도솔천으로 향하는 축은 미륵정토를 지향하며 안산의 축은 미타정토를 의미한다고 하여 불교의 다른 두 이념이 여기서 같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676년에 창건

우리 전통건축의 해석에 한 경지를 개척한 김봉렬 교수는 천왕문과 범종각을 이루는 축의 끝에는 본디 다른 대웅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그 위치에는 주초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 추정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석사는 적어도 두 절의 복합체였던 셈이다. 그리고 두 영역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는 일은 서로 다른 자연지형을 지배영역으로 삼았으며 이에 다른 두 축이 발생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본래 우리의 건축은 건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어떻게 배치하여 주위와 관계를 갖게 하는가가 더욱 중요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건축은 지형과 더불어 비로소 완성되는 ‘영조(營造)’의 작업, 즉 가꾸어 지어내는 일이었다.

사실 이 부석사의 입지는 본래 중요한 지정학적 의미가 있었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676년에 창건하였는데, 그는 정치성이 강한 승려로 호국불교를 주창하였다. 통일신라의 국가 이념으로 통일과 융합을 원리로 하는 화엄사상이 대두하자 국가 유학생 자격으로 중국에 유학하였던 의상은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거 귀국하였으며 죽령 부근에 절을 세우라는 왕명을 받고 이 부근을 몇 해 동안 탐색한 끝에 지금의 봉황산을 등진 이곳을 택한다. 창건 당시는 지금의 규모와는 비할 수 없이 조촐하였지만, 입지만은 태백산과 소백산을 잇는 거대영역을 아우르는 지점이었다. 이곳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연결하는 죽령을 관찰하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북으로는 고구려 온달성을 또한 관찰할 수 있어 신라의 수도를 지키기에는 최적지였던 것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구품 만다라의 품계를 상징한다는 석축들을 오르고 오르며 문들을 지나고 누각 밑을 통과하여 이윽고 무량수전의 앞마당에 올라서서 안양문의 기둥에 몸을 의지한 후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는 순간, 펼쳐지는 그 장대한 풍경은 가히 압권이 아닐 수 없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선생의 사무치는 고백을 되뇌지 않더라도 누군들 가슴속 깊이에 숨어 있던 애절함이 절로 솟구치지 않으랴.

그러나 내가 정작 이 부석사를 또 가보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 풍경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석축 때문이다.

부석사 대석단은 정말 아름다운 건축이다. 흔히 잉카인들이 쌓은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기 짝이 없는 석축을 제일로 치거나 일본인들이 만든 아주 일정한 크기의 석축을 앞세우지만, 우리 부석사의 석축이 가지는 그 풍부함과 여유로움에 비하면 한 수 아래도 한참 아래이며 특히 자연을 대하는 태도로 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네들의 석축은 천 년이 경과한 지금에도 인공적이며 적대적인 데 비해 우리의 부석사 석축은 지극히 자연적이며 관대하다.

이 석축은 변화하는 지형의 레벨에 따라 높이가 서로 다르지만 적절한 조화를 이끌어내며 지형을 안정시키고 우리를 상승시킨다. 우리는 돌길을 올라 석축이 설정한 영역 속으로 들어가면서 한 단을 오를 때마다 속계에서 만신창이 된 육신과 마음의 허울을 한 꺼풀씩 벗는 것이다.

수평으로 길게 누운 석축들이 만드는 소리는 라벨의 음악 ‘볼레로’같지 아니한가. 이윽고 안양문이 놓인 마지막 대석단을 오르면 음악은 갑자기 끝나고 사방은 지극히 고요한데 뒤돌아서면 끝없이 펼쳐진 구름의 바다 속에, 드디어 벌거벗은 몸이 되어 던져져 있는 나를 보는 것이다.

그렇다. 부석사의 석축을 오르면 나는 어느덧 벌거숭이가 되어 태고의 울음을 듣는다. 그래서 부석사는 가이없이 아름다운 마음의 고향이 되어 최순우 선생으로 하여금 무량수전의 기둥에 기대어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게 하였으리라.
<'주간조선'에서 참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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