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보길도 세연정 원림

鶴山 徐 仁 2006. 1. 15. 13:25



[한국의 명풍경을 찾아서] 보길도 세연정 원림(園林)

낙원의 섬, 그 섬 속의 낙원

낙원을 재연한 정원의 전형







▲ 세연정의 아침. 싸아한 새벽 공기가 코끝에 와 닿는다. 깊은 숨으로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아침햇살이 앞산 능선 위에서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세연정(洗然亭) 처마 사이로 밀려들어와 있었다.
“참방!” 파문이 수면 위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지고 있었다. 수면을 가득 덮은 수초 이파리의 한 부분이 움칠하고 움직였다. 여명을 깨는 발걸음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싸아한 새벽 공기가 코끝에 와 닿는다. 깊은 숨으로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아침햇살이 앞산 능선 위에서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세연정(洗然亭) 처마 사이로 밀려들어와 있었다. 정자 옆에 서 있는 장송(長松)의 그림자가 땅위에 길게 그려져 있다. 세연(洗然)이란 물에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한 풍경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윤선도가 1637년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다.

낙원의 발견과 건설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년) 서울에서 태어나 26세에 진사에 급제한 후 유배와 관직에 등용되기를 거듭했다. 인조 때에는 송시열과 함께 봉림(나중에 효종이 된다), 인평대군의 스승이 됐다. 그러다가 모함에 의해 좌천되어 1635년에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온다. 고산이 쉰 살이 되던 해(1636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고, 왕의 가족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산은 집안의 노복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가지만, 결국 인조는 청나라에게 항복하고 만다. 그 때 윤선도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뱃머리를 탐라(耽羅)로 향했다. 그 뱃길에서 보길도를 발견한 것이다. 수려한 산세와 맑고 깨끗한 풍경에 매료된 그는 가는 길을 멈추고 이곳에 머물기로 한다. 그 때의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한 것이다.”(윤위 <보길도지>에서)







▲ 세연정과 세연지. 세연지는 계류를 막아 만든 못이다. 이 못은 수제선(水際線·물과 육지가 만나는 부분)의 처리가 일품이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바위 주위는 직선으로, 그리고 물과 만나는 산기슭은 자연스런 곡선의 호안으로 마감하여 어디서든지 정원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했다.
나는 돌다리를 건너 세연정으로 들어갔다. 널판지로 만든 문이 사방으로 달려 있는 건물이다. 그 문을 모두 들어올려 처마에 걸어 놓았다. 청정한 계담(溪潭)과 장송(長松), 그리고 싱싱하게 이파리를 달고 있는 상록수림이 정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풍경들이 정자 속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거처를 마련하기로 작정한 것은 시원하게 펼쳐진 들과 계곡에 가득한 숲, 특히 유자, 산다, 석란, 석류와 오래 된 동백나무, 그리고 맑은 계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지기(地氣)가 청숙(淸淑)했기 때문이다. 그가 거처로 마련한 낙서재(樂書齋) 주위는 ‘사방이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려 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은 형국이다. 그래서 그 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고 명명했다. 그곳은 풍수적인 의미로는 명당이며 윤선도의 낙원이다.

낙원은 두 종류가 있다. 도원경이나 에덴과 같은 산의 낙원과, 봉래섬 또는 유토피아와 같은 섬의 낙원이 그것이다. 이 두 종류의 낙원은 어느 것이든 외부와 격리되어 있다. 그래서 접근하기 힘들다. 티벳의 낙원 샹그리라가 ‘고기 자르는 칼’과 동의어라는 점은 그곳이 칼날 같은 산 능선 저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용된 자에게는 열려 있는 장소다. 낙원은 타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자폐의 공간이다.

윤선도가 강화도에서 돌아오는 뱃길에서 보길도라는 섬에 주저 없이 정착한 것도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하고 자기만의 낙원을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섬 속의 낙원과 고독







▲ 세연지의 바위. 나는 그 정자 한 가운데에 앉아 사위를 감싸듯이 펼쳐져 있는 정원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크고 작은 바위가 수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바위들을 칠암이라고 한다. 고산은 칠암이 보이는 정자의 서쪽에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나는 그 정자 한가운데에 앉아 사위를 감싸듯이 펼쳐져 있는 정원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크고 작은 바위가 수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바위들을 칠암이라고 한다. 고산은 칠암이 보이는 정자의 서쪽에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는 산란기에 송어나 은어가 올라오면 이 바위에서 낚시를 하기도 하고 옥소대쪽으로 활쏘기를 했다.

계담의 수면에는 이미 산등성이를 넘어온 아침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물위에 그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는 옥소대(玉簫臺)가 그 산에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좌우로 각각 3층씩 석대를 쌍은 방대(方臺)가 있다. 이를 동대(東臺)와 서대(西臺)라고 한다.

윤선도의 5대손 윤위(尹偉)가 쓴 <보길도지(甫吉島識)>에 따르면 이 정원을 사용한 것은 청화(淸和)한 날이라고 한다. 악기 소리가 은은히 퍼지는 가운데 동, 서대와 옥소대에서 긴 소매의 무희에게 춤을 추게 하고는 이 모습이 수면에 비치는 광경을 정자에서 바라보았다. 또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에 태우고 그가 지은 어부사시가를 부르게 하며 이 계담을 돌게 했다.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꾸나 /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아온다’(윤선도의 ‘어부사시가 춘사(春詞)’ 중에서)

그러나 이런 열락의 광경은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세연지 주위로 토성을 150m 정도 쌓아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 까닭이다.







▲ 바위와 잘 어우러진 세연지 물가의 선.
정원은 ‘둘러싸인 토지’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간정원은 대개 풍광이 좋은 곳에 작은 초정을 세우고 사각형의 연못과 그 속에 둥근 섬을 만들어 이를 신선이 사는 섬으로 여기는 것이 고작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에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원은 ‘둘러싸인 뜰’이라는 의미의 ‘정원(庭園)’보다는 ‘자연 속에 있는 뜰’이라는 의미의 ‘정원(庭苑)’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세연정은 흔히 말하는 정원(庭苑)이 아니다. 폐쇄된 공간인 정원(庭園)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파도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조용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왜 이렇게 성대한 연회를 즐겼을까. 그 대답은 쉽지 않지만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낙원의 장치인 격리는 외부와의 단절로 인한 고독과 등을 맞대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고독에 못 이겨 탈출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윤선도가 이 정원을 극장 무대처럼 풍악과 무용하는 무희와 노래 소리로 가득 채운 것은 실은, 낙원의 정적과 고독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명품의 물가와 판석보

나는 정자에서 나와 못 주위를 걸었다. 세연지는 계류를 막아 만든 못이다. 이 못은 수제선(水際線·물과 육지가 만나는 부분)의 처리가 일품이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바위 주위는 직선으로, 그리고 물과 만나는 산기슭은 자연스런 곡선의 호안으로 마감하여 어디서든지 정원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 겹 한 겹 베일을 벗듯이 정원의 속살이 드러나는 이 세연지를 안압지와 함께 나는 우리나라 정원 풍경의 명품으로 꼽는다.







▲ 판석보와 동대. 판석보는 물막이 석보(石洑)다. 높이 1m의 판석(널판지처럼 얇고 넓은 돌)을 폭 2.5m로 세우고 그 속에 강회를 넣어 물이 새지 못하게 한 후 1.2~2.4m의 판석으로 뚜껑을 닫듯이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정원학자 정재훈도 이것을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라고 하였다.
나는 판석보로 다가갔다. 물막이 석보(石洑)다. 높이 1m의 판석(널판지처럼 얇고 넓은 돌)을 폭 2.5m로 세우고 그 속에 강회를 넣어 물이 새지 못하게 한 후 1.2~2.4m의 판석으로 뚜껑을 닫듯이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길이는 11m. 정원학자 정재훈도 이것을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라고 하였다. 세연지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장마 때 활처럼 휜 판석을 타고 넘치는 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잘 만든 토목 시설물은 정원예술의 중요한 소도구가 된다.

나는 판석보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섬과 푸른 하늘, 그리고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거울 같은 수면에 반영(反影)되어 있었다. 물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가 수면을 건드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오히려 정원의 정적을 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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