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봉구 선생님과 청랑 목사님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그것의 바탕은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이게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는 걸 눈치 채신 촌촌 선생님께서도 황선생님의 글을 스크랩해서 올려놓음으로써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하셨더군요. 지난주부터 저도 한 다리 낄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이렇게 한 줄 올립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는 좀 엉뚱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주장과 저런 주장을 적당히 섞어서 화해를 시도하는 '짬뽕식 절충주의'는 아니고, 두 관점과 딱 부러지게 다르다며 대립각을 세우려는 이른바 '제3의 입장'도 아닙니다. 그저 두분 이야기를 번갈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 점 양해 있으시기를 바라고...
그런데 두 분의 글을 읽으면서 '좀 어렵다'고 느끼신 분들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시는 내용이 중요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여러 번 읽으면서 '잘 생각'해 보면 좀더 얻어지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속속들이 잡히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분의 글 솜씨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당히 무거울 수도 있는 내용을 그 정도로 풀어내시는 글 솜씨들은 가히 경탄할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내용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읽는 우리들의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개념(槪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념이라는 게 '생각 덩어리, 혹은 뜻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그냥 생각/뜻 덩어리가 아니라 정확하게 잘 다듬어진 생각/뜻이어야 합니다. 개념(槪念)은 '평미레^^ 개(槪)'자와 '생각 념(念)'자를 합쳐놓은 말입니다. 생각을 수북이 쌓아 놓았다가 평미레로 싸악 깎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념이란 정확하고 말끔하게 다듬어진 생각/뜻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념이 말끔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으면 이해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정확하지 않은 개념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생각/뜻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생각/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뿐 아니라 생산적인 토론이나 학문을 하기가 무척 어려워지지요.
이번 주제의 경우에는 그게 주로 의/정의/공의/공정/공평/공도/공법 등과 같은 말들입니다. 그런 말을 접하면서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읽는 이들은 그다지 많은 뜻/생각을 건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런 말부터 좀 교통정리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의논이 훨씬 활발하고 쉬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청랑 목사님 글에는 의(義)라는 말과 정의(正義)라는 말, 그리고 공의(公義)라는 말이 섞여 쓰였고, 공정(公正)과 공평(公平), 그리고 공법(公法)이나 공도(公道)라는 말도 적지 않게 쓰였습니다. 황봉구 선생님의 글에서는 거의 모든 개념이 일관되게 정의(正義)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우선 정의(正義)라는 말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공평이나 공정이라는 말도 널리 쓰이기는 합니다만 그 말뜻은 정의와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또 공의/공법/공도 등의 말은 교회 안에서는 이럭저럭 쓰이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별로 쓰이지 않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서만 쓰는 은어처럼 돼 버린 말들입니다.
정의(正義)가 무슨 뜻인지 알아보려면 몇 가지 순서를 밟아야 합니다. 우선 의(義)가 무슨 뜻인지, 그리고 의(義)의 수식어로 쓰인 정(正)이 무슨 뜻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정의(正義)라는 합성어가 어떻게 생긴 말인지, 서양의 어떤 말을 번역하는 데에 주로 쓰였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과정을 거치면 정의(正義)라는 개념이 좀 더 분명해 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정의(正義)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뜻과 없는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 지겠지요.
의(義)란 무엇인가?
우선 한자 의(義)의 어원적 의미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갑골문자와 금석문 시절에 의(義)라는 글자가 어떤 뜻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추적해 보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이른바 파자(破字)입니다. 한자의 각 부분을 해체해서 각 단위 한자의 뜻을 조합함으로써 원래 글자의 뜻을 헤아려 보는 것이지요.
'옳을 의(義)'자는 '양 양(羊)'자와 '나 아(我)'자의 합자입니다. '나 아(我)'자는 다시 '손 수(手)'자와 '창 과(戈)'자의 합자이지요. 그래서 의(義)의 파자해 중의 하나는 '손에 창을 잡은 사람이 양처럼 행동한다'가 될 것입니다.
손에 창을 꼬나 잡은 사람은 '힘/능력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我)입니다. 그런 나(我)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힘/능력을 가지고서 자기 몸과 정체성을 지킬 수도 있고, 나아가서 남의 몸과 정체성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힘/능력있는 사람을 짐승에 비유한다면 당연히 호랑이나 용에 비유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의(義) 개념에서는 그런 사람을 '양(羊)'으로 비유했습니다. 이건 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의(義) 개념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힘/능력이 있지만 남을 해꼬지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양처럼 온순하게 구는 것이 바로 의(義)가 가지는 어원적인 뜻이라고 봅니다.
이런 어원적인 의(義) 개념에서라면 '창을 꼬나 잡은 나'는 그런 힘/능력을 자기를 지키는 데에만 쓴다는 뜻이겠습니다.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입니다. 양처럼 온순해 보인다고 해서 남이 나(我)를 해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방어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물리력으로부터 뿐 아니라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공격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의(義)라는 말입니다.
중국의 갑골문과 금석문의 시대가 지나고 서책(書冊)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의(義) 개념은 여전히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됐습니다. 특히 의(義)는 유교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맹자님이 말씀하신 사단(四端)의 하나인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품성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마음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그런 마음의 능력을 갖는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에 하늘(天)으로부터 성(性)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하늘(天)의 기본 속성인 리(理)가 사람에게 구현된 것이 바로 성(性)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속성인 리(理)와 사람의 속성인 성(性)을 열심히 탐구하던 학문이 바로 고려말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활발했던 성리학(性理學)이었던 것이지요.
한국의 중심 사상중의 하나인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바로 이런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의 관계 때문입니다. 하늘의 리(理)가 사람의 성(性)으로 구현되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사단(四端)을 갖게 됩니다.
맹자님은 의(義)를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고 푸셨습니다. 자기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잘못이란 마음씀과 행동을 모두 가리킵니다. 나쁜 행동 뿐 아니라 나쁜 마음을 갖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맹자님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오지심으로서의 의(義)를 갖고 있다고 보신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옳음과 그름'을 구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그런 분별력이 무디어 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거야 그 사람이 자기 마음을 제대로 닦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본래적으로 의(義)의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정진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갑골문과 금석문 시대를 거쳐 성리학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무려 5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의(義) 개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의(義)는 자기의 몸/마음/넋을 지키는 마음의 힘/능력이며, 그런 마음의 힘/능력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천리(天理)로 부터 부여받은 인성(人性) 덕분이며, 그것의 구체적인 발현형태는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바로잡을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여 경계할 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의(義)는 남을 해치는 공격적인 덕목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수신의 덕목이지요.
의(義) 개념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인 개인의 능력이요 덕목이라는 점입니다. 의(義)는 사회의 특성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자주 쓰이지만 '의로운 사회'라는 말은 쓰이지 않습니다. 사회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로는 다른 말이 주로 쓰이는데, 그 점은 이어지는 글에서 살피게 될 것입니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그럼 그런 의(義) 앞에 '바를 정(正)'자를 덧붙인 정의(正義)는 무슨 뜻일까요? 정의(正義)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정의(正義)를 앞에서 본 의(義) 개념의 연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앞에 수식어로 붙은 '바를 정(正)'의 뜻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정(正)과 의(義)의 개념을 합쳐서 정의(正義)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또 하나의 방식은 의(義)와 정의(正義)를 전혀 다른 개념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비록 두 개념이 같은 한자 의(義)를 공유하고 있더라도, 서로 관련되지 않은 별개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지요.
개념의 구조나 역사로만 보면 그런 해석이 우스운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우스운 역사를 거치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했었습니다. 20세기 전반은 일본말에, 20세기 후반은 서양말에 언어/개념의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세기 들어서야 생긴 정의(正義)라는 개념은 19세기까지 통용되던 전통적인 의(義)개념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고, 그저 '우연히' '옳을 의(義)'자를 차용했다는 우연적인 공통점을 가졌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서로 비슷해 보여도 "의(義)와 정의(正義)를 족보가 다른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전통식 한자어 의미론의 정의(正義)
우선 첫번째 방식으로 정의(正義) 개념을 정리해 봅시다. 정(正)은 요즘 '바를 정(正)'이라고 새겨집니다. 한국말 '바르다'는 것은 원래 '굽은 데가 없이 곧다'는 뜻이고, 파생적인 뜻으로 '찬성하다, 으뜸이다, 맞다, 착하다' 등의 뜻도 갖습니다. 그래서 정(正)의 상대어로는 반(反), 부(否), 부(副), 오(誤), 사(邪) 등이 꼽힙니다.
한편 파자를 통해 헤아려지는 '바를 정(正)'의 어원적인 뜻이 재미있습니다. 정(正)은 '한 일(一)'자와 '그칠 지(止)'의 합자입니다. 일(一)자는 어떤 일의 한계를 그어놓은 선이고, 지(止)자는 발 모양을 그린 글자입니다. 그러니까 정(正)의 어원적인 뜻은 '행할 데/때와 멈출 데/때를 안다'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바꾸면 "낄끼빠빠"입니다. '낄 데/때 끼고 빠질 데/때 빠질 줄 안다'는 것이지요. 제 분수를 알고 그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어원적으로는 "낄끼빠빠"라는 뜻이고 용례적으로는 "곧다, 찬성한다, 으뜸이다, 맞다"는 뜻을 가진 '바를 정(正)'자가 의(義)를 수식해서 만든 정의(正義)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직역을 하면 '바른 의'가 되는데 이게 좀 웃기는 말입니다. 원래 의(義)라는 것에 '바른(正) 의'가 따로 있고 '잘못된(邪) 의'가 따로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는 그냥 '의'일 뿐이고, 그 속성은 당연히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것을 '옳을 의(義)'라고 새기지 않습니까?
물론 '옳음'과 '바름'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사랑하는 친구가 도박에 미쳤다고 칩시다. 만날 때마다 "너, 그러면 안 된다"고 쓴소리를 하는 것은 '바름'입니다. 그러나 그런 쓴소리를 해지르는 대신 도시락 싸 가지고 쫓아다니면서 구슬리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설득해서 결국 도박에서 손을 끊도록 만드는 것은 '옳음'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름'은 '옳음'의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래서 '바르다(正)'는 '옳다(義)'에 포함되는 개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정의(正義)는 의(義)보다 작은 개념이 되고 맙니다. '사람 인(人)'은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인(女人)'이라고 하면 남자는 다 빠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여인(女人)은 인(人)보다 범위가 작은 말입니다. 정의와 의의 관계도 그렇게 돼 버립니다. 말하자면 의(義)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정의(正義)라고 하면 다른 종류의 의는 다 빠져 버린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의(義)에는 정의(正義)말고 다른 게 또 있다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컨대 부의(副義)라거나 반의(反義)라거나 오의(誤義)라거나 사의(邪義)라는 게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그런 말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전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義)와 정의(正義)는 결국 같은 말이고, 따라서 정의의 정(正)자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상 정(正)자와 의(義)자가 생긴 이래로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정의(正義)라는 말을 쓰인 예는 19세기 전까지는 없었습니다. 그 두 글자는 만나서 합성어를 만들 수가 없는 뜻의 글자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정의(正義)라는 말은 전통적인 뜻에서 보면 생길 수 없는 말이요, 생겨서는 안 되는 사생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요즘 정의(正義)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씁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지금 쓰이는 '정의(正義)'라는 말이 지금까지 살펴본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인 '의' 개념과는 전혀 족보가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을 짚어보려면 20세기초의 한국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서양식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
한국 문헌에 정의(正義)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까지 어떤 책에도 그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컨대 1900년에 번역이 끝난 신약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한글 번역에 참고했던 킹 제임스 역본 영어 성경에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라거나 저스트(just)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런 말들도 그저 '의(義)'로 번역됐을 뿐입니다.
신약성경이 번역된 후 딱 10년이 지난 1911년에는 구약성경의 번역도 마무리되어서 출판됩니다. 그런데 이 구약성경에는 정의(正義)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성경 번역본의 낱말 사용 용례를 통해서 우리는 '정의'라는 말이 1900년과 1911년 사이에 한국에 유입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입니다. 1860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서양에 문호를 활짝 개방했습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서양문물을 수입했습니다. 서양 용어를 그대로 쓸 수 없으니까 모두 번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서양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용어들이 새로 번역됐습니다. 정의(正義)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서양어 '저스티스(justice)'의 번역어로 만들어진 일본식 한자어입니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양의 서양 용어를 제한된 인력으로 번역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한자의 전통적인 의미론을 세세히 따져가면서 번역하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졸속 번역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사정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서양어 '저스티스(justice)'의 번역어로 여러 용어가 만들어 졌었는데, 그 중에서 일부는 한글 구약성경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아직도 요즘 한글 개역판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공도(公道)니 공법(公法)이니 공의(公義)니 하는 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동 번역 성경이나 새번역 성경은 물론, 최근에 다시 개정된 한글 개역판 성경에서는 '공도'니 '공법'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정의'나 '공의'로 바뀌는 추세이기는 합니다. 공의(公義)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시 뒤에서 살피게 될 것이므로 건너뛰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정의(正義)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한국 사람들의 일상어가 됐습니다. 지금 쓰이는 정의(正義)개념은 한자어의 전통적인 의미론과는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그냥 서양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유포된 것이지요.
저스티스(justice)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유래된 말인데, 그 어원적인 뜻은 '법(法, law)'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법대로 하는 것'이 저스티스입니다. 법은, 신정국가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왕정이나 귀족정에서처럼 특권층의 의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민주주의 나라에서처럼 '사회적 약속'에 바탕을 둘 수도 있습니다. 그 기원이야 어떻든, 그 사회의 법에 따르는 것이 바로 저스티스입니다.
신정국가에서는 법에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해석됐겠지요. 왕정이나 귀족정에서는 법을 지키는 것이 곧 그 사회의 엘리트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겠습니다. 민주정에서는 법대로 사는 것이 곧 그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법을 지키는 이유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저스티스는 사회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가 갖는 특징
바로 이런 뜻의 저스티스가 바로 요즘 우리가 쓰는 정의(正義)라는 말의 뜻입니다. 정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사회의 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의 정의 개념은 몇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 준법(遵法)이라는 뜻의 정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생각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로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법을 어기면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더라도 법을 어기면 그것도 정의가 아닙니다.
물론 그럴 경우에는 '정상 참작'이라는 사후조치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후 구제의 편법일 뿐이지요. 의도나 사정과 상관없이 법을 어기는 '행위'는 정의에 배치되는 일입니다.
둘째, 저스티스로서의 정의는 개인적인 덕목과는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더 나아가서 사회전체의 이익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공익(公益)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도덕적인 비행이나 윤리적인 잘못은 저스티스로서의 정의가 다루지 않습니다.
도덕적 비행이나 윤리적 일탈은 이 글의 맨 앞에서 보았던 의(義)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행이나 일탈이 심각하게 사회의 공익을 해친다고 여겨지면 법(法)으로 금지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이런 행위는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의 소관이 됩니다. 의(義)에 관련된 비행과 일탈은 대부분 개인적/사적인 것이며, 그런 행위는 대개 사회적인 제재를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정의(正義)와 관련된 비행과 일탈은 특별히 범죄라고 불리며, 공적이며 법적인 제재를 받습니다.
셋째, 저스티스에는 반드시 공식적인 재판이 따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법이 사회의 약속인 만큼 법을 지켰는지 어겼는지를 따지는 공식적인 제도가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검찰/법원/교도소입니다. 이런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를 우리는 법무부(法務部)라고 부릅니다. 법에 관련된 일을 다루는 기관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에서는 법무부를 '디파트먼트 오브 저스티스(Dept. of Justice)'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쓰인 '저스티스'는 당연히 '법'입니다. 또 검찰/법원/교도소에다가 경찰제도까지 합쳐서 부르기 위해서는 크리미날 저스티스(Criminal Justice)라는 말도 씁니다. 범법 행위와 관련해서 체포하고 재판하고 구금하는 일을 하는 모든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때의 저스티스도 사법(司法)이라는 뜻입니다. 법과 관련된 모든 일을 관장한다는 뜻이지요.
저스티스 업무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재판입니다. 재판이란 범법 행위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의 기준이 바로 법입니다. 이렇게 법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판단의 결과는 크게 두가지 뿐입니다. 유죄와 무죄가 그것이지요. 유죄면 처벌을 받고 무죄면 방면됩니다. 유죄 여부를 가려서 형량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저스티스, 즉 정의(正義)의 핵심 사항입니다.
이게 바로 서양식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 개념입니다. 앞에서 본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서 본 정의(正義) 개념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납니다. 전통적 의미의 정의(正義)는 그냥 의(義)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나 저스티스로서의 정의 개념은 사회적이고 공적인 준법 행위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개념이 모두 정의(正義)라고 불리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언어 생활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정의(正義) 개념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의(正義)라는 말로 가리키는 바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쓰는 정의(正義) 개념은 전통적 한자어 의미론에서 본 의(義)와 서양식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의 중간 지점 어디 쯤에 위치한 개념입니다.
이런 정의(正義)는 의(義)와는 달리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격하게 '법을 지키는 일'로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 정의'라든가 '경제 정의'라는 말도 만들어서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정의는 수오지심이라는 개인적인 덕목으로서의 의(義)도 아니지만, 민법이나 형법이나 경제관련 법을 잘 지킨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정의(正義) 개념은 그 구체적인 뜻이 좀 모호한 편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호함 때문에 대화나 토론을 할 때 혼선을 빚기도 합니다.
황봉구 선생님과 김청랑 목사님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글 내용을 잘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주거니 받거니가 아주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 두 분의 글을 읽기만 하는 저 같은 사람은 아직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제가 두 분의 생각을 잘 천착하지 못한 까닭이겠습니다만, 부분적으로는 두 분이 쓰시는 용어, 특히 정의(正義)라는 용어의 일반적인 뜻이 아직 명확하게 개념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글이 이미 너무 길어졌고, 또 황봉구 선생님이나 김청랑 목사님과 촌촌 선생님, 그리고 여러 독자 분들의 생각이 어떠신지가 궁금하기도 해서 일단 멈추려고 합니다.
여기까지의 개념 점검 작업이 의미 없지 않다고들 여기시면, 다음 글에서는 (언제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의(正義)의 대체 개념으로서의 공의(公義) 개념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는 본격적으로 그런 공의의 원천과 실천 방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뛰어들어 보려고 합니다.
긴 글을 다 읽어 주셔서 참 감사하군요.^^
평미레/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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