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스크랩] 정의와 그 실천, 그리고 연습

鶴山 徐 仁 2005. 12. 26. 18:24

 

두 번에 걸친 개념 교통정리를 통해 웬만큼 준비운동이 됐다고 보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황봉구 선생님과 청랑 목사님의 '정의'에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 가졌던 질문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정의란 무엇인가?
둘째, 정의의 원형은 무엇인가?
셋째, 정의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의와 정의와 공의

 

첫째 질문은 개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해결됐다고 봅니다.  우리가 흔히 정의라고 그냥 생각하는 개념은 사실상 적어도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와 사회적/공적인 덕목으로서의 정의, 그리고 법적/공적인 덕목으로서의 공의가 그것입니다.

 

개인적/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는 어원적으로 외부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힘입니다.  내 몸의 안위와 마음의 평정과 넋의 생생함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그런 힘/능력의 핵심은 자연과 세상과 하나님에 관하여 옳은 일과 그른 일을 가려낼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수오지심으로 표현된 의의 용례적 의미입니다. 

 

사회적/공적 덕목으로서의 정의는 사회의 규범을 지키는 것입니다.  규범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대한 사회적 약속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든가,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등의 약속입니다.  그런 약속이 잘 지켜질수록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적/공적 덕목으로서의 공의는 그 사회의 법이 얼마나 잘 지켜지는 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법은 사회 규범의 일부입니다.  사회 규범 중에서 그 사회의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골라서 강제 규범으로 지정한 것이 법입니다.  이 법을 어기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습니다.  법이 얼마나 정당한지, 재판이 얼마나 공정한지, 처벌이 얼마나 적절한지, 사람들이 그런 법/재판/처벌의 과정과 효과를 얼마나 존중하는 지에 따라 그 사회의 공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정의/공의의 관계

 

이런 세 차원의 의는 당연히 긴밀한 관계를 갖습니다.  의는 정의와 공의의 바탕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많은 사회라면 당연히 정의와 공의의 수준이 높을 것입니다.  개개인이 의로우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상호작용에도 그런 의로움이 반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공의는 정의의 부분집합입니다.  공의의 기준이 되는 법/재판/처벌은 정의의 기준이 되는 규범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의와 공의와 정의가 항상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닙니다.  규범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의인이 많아질 수가 없는 법이겠습니다만, 설사 의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립되거나 은둔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논어의 태백편에 보면 공자님도 세상에 도(道)가 있으면 나와서 활동해야 하지만 도가 없으면 숨어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정의/공의로운 사회에서 가난하고 천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정의/공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부귀하게 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또 정의와 공의가 항상 나란히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한국 현대사에서도 증명된 바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되고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되고 고문 받고 투옥되고 처형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의 법을 어기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 법 자체가 악법이었다는 점, 재판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점, 처벌이 불공평했다는 점 등, 어느 모로 보나 그 시절 그 사회는 공의가 땅에 떨어진 시절이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수준만큼은 높았습니다.  불의한 법과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정의가 살아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공의가 바닥을 기더라도 정의가 상승세면 가망이 있는 사회입니다.  정의가 곤두박질을 치더라도 공의가 지켜지면 정화능력이 있는 사회지요.  심지어 공의와 정의가 모두 있으나마나한 수준이더라도 의인들이 많으면 그나마 장기적으로나마 소망이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공의도 정의도 없는데 의인마저 없는 사회는 망할 사회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상대로 토론과 협상을 벌여야 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현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밑바닥이었던 데다가 그걸 역전시킬 수 있는 의인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하나님께서 없애버리지 않으셨더라도 자중지란으로 망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의와 사회의 정의와 법적인 공의는 때로는 나란히 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어긋나기도 하면서 그 사회와 그 사회에 사는 개인들의 윤리와 도덕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정의의 원형(?)

 

황봉구 선생님과 청랑 목사님의 글을 번갈아 읽으면서 가졌던 두 번째 의문은 "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였습니다.  사실 두 분 글의 첫 번째 쟁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별다른 구별이 없으면 그냥 '정의'라고 해도 의/정의/공의를 다 가리키는 말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문제제기를 하신 분은 황선생님이셨지요.  "정의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또는 하늘(天)에 의해 주어진 것인지 또는 그도 아니면 인간과 하나님을 넘어서는 또 다른 무엇의 초월적인 것이 있는 것인지"를 물으셨습니다.

 

물론 청랑 목사님의 입장은 "기독교 혹은 성경에서는 정의가 창조주에게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의로우신(just and righteous) 분"이기 때문에 그 피조물인 사람의 정의는 "하나님 또는 하늘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에 대해 황봉구 선생님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초월자라면 윤리를 초월한 존재이어야 할텐데, 어떻게 사람의 윤리적인 문제인 정의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느냐"고 재차 물으셨습니다.  이에 청랑 목사님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정의의 원형이며, 사람의 정의는 그런 하나님의 정의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이게 바로 청랑 목사님과 황봉구 선생님이 교환하신 제 1라운드의 내용입니다.  글이 올라온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한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이은 2라운드에서는 "과연 격을 가진 하나님 혹은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더 근원적인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거기까지 넘어가지는 않기로 하겠습니다.  1라운드, 그러니까 "정의의 근거 혹은 원형"이야기까지만 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정의는 실체가 아니라 상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두 분의 의견 교환의 핵심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정의의 원형이라는 게 뭐냐고 묻는 것은, 마치 정의가 어떤 실체인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의라는 게 구체적인 물건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머리 속으로는 떠올려 볼 수 있는, 흔히 말하는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실체 정도는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점을 잘 수긍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일단 이렇게 한번 보시지요.  실체라는 것은, 그것이 가방이나 컴퓨터 같이 구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사회나 공동체 같은 추상적인 것이든, 항상 명사 등의 체언으로 표현됩니다.  가방, 컴퓨터, 사회, 공동체는 품사가 명사지요.  그런 게 바로 실체입니다.  문장 안에서는 주어나 목적어나 보어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체언입니다.

 

하지만 의(義)는 명사일까요?  얼른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장을 보면 '의'가 주어로 쓰였습니다.  주어로 쓰일 수 있는 것은 명사이며, 명사는 실체를 가리키는 말, 즉 체언입니다. 

 

그러나 그건 '의'가 한자어이기 때문입니다.  한자는 본래 대부분의 글자가 고유 품사를 갖지 않습니다.  명사인 것 같다가도 아무런 형태 변화 없이 형용사나 동사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한자에서는 품사를 구분한다는 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말이나 대부분의 서양말은 좀 다릅니다.  예컨대 의(義)의 한국말 새김은 '옳다'입니다.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체언이 아니라 서술언입니다.  실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상태를 그려주는 말입니다. 

 

물론 '옳다'의 어간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이면 '옳음'이라는 명사형이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형용사의 명사'형'일 뿐이지, 그 말의 근본적인 뜻은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은 잉국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는 형용사 '롸이쳐스(righteous)'의 명사형입니다.  잉어에서도 의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라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롸이쳐스' 조차도 더 근본적인 형용사 '롸이트(right)'에서 나온 다른 형태의 형용사입니다.

 

'저스티스(justice)'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스트(just)'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입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잉국말에서도 의는 실체를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라는 말입니다.  형용사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때로는 형용사가 실체의 상태가 아니라 동작이나 과정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형용사가 부사로 변합니다.  잉어와 마찬가지로 한국말에도 독자적인 부사가 적습니다.  형용사에 부사화 접미사를 붙이면 쉽게 부사를 만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용사가 부사가 되면 실체의 상태가 아니라 실체의 동작 상태, 혹은 과정의 상태를 가리키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말의 형용사는 그 자체로 실체의 상태를 꾸미거나 서술하기도 하고, 부사로 변해서 그 실체의 동작과 과정을 꾸미게 됩니다. 

 

정의의 경우를 봅시다.  의인(義人)은 '옳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의가 사람을 꾸미는 상태 형용사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니 거기에 원형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정의 사회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는 실체이고 정의는 상태를 서술한 말입니다. 

 

의나 정의가 부사가 되면 실체의 움직임과 그 과정을 표시합니다.  "의롭게 생각하다"라든가 "정의롭게 행동하다"는 표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형용사인 의/정의/공의의 실체를 찾거나 그 원형을 찾는 일은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으로 봅니다.  실체가 없는데 없는 실체의 원형까지 찾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정의 문제와 관한 한 실체는 그런 정의의 주체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사회가 바로 정의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공의롭다"거나 "사람이 의롭다"거나 "사회가 정의롭다"는 말은 가능합니다.

 

그런 주체가 원형을 갖는지를 따지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예컨대 삼각형의 원형을 따지거나 애국심의 원형을 따지려는 시도가 서양에서 있었습니다.  청랑 목사님께서 "의 또는 정의의 원형, 근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플라톤주의의 냄새"이야기를 슬쩍 꺼내신 것은 아마도 그런 시도를 생각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나, 생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추상적인 실체의 원형을 찾아  보려는 것은, 뭐, 플라톤의 자유였겠습니다.  그래서 책상이나 삼각형의 원형이라든가, 애국심이나 효도의 원형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고, 그런 원형에다가 이데아니 뭐니 독특한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시도가 좀 심드렁해 보입니다.  예컨대 황봉구 선생님이나 청랑 목사님이나 촌촌 선생님이나 청담 선생님, 이 글을 읽어 주시는 한분 한분의 모든 독자님들, 심지어 평미레 조정희 같은 구체적인 사람을 뭉뚱그릴 수 있는 원형 혹은 이데아를 생각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설사 그런 걸 만들어 내어서 "이게 바로 사람의 이데아다"라고 제시한다고 해도 제게는 그다지 흥미거리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제게는 황봉구 선생님, 청랑 목사님, 촌촌 선생님, 청담 선생님, 그리고 평미레 조정희 같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주고받는 구체적인 분들이 소중할 뿐입니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구성된 '사람의 이데아'라고 하더라도 제게는 그저 무의미할 뿐입니다.

 

하물며 주체도 아니고 실체도 아닌, 상태에 불과한 정의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는 게, 설사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있겠느냐는 회의가 듭니다.  그러므로 저 같으면 정의의 원형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일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생각해 볼거리가 됩니다.  정의인가 불의인가를 가르는 데에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런 기준은 의의 경우 수오지심의 판단 능력이고, 정의의 경우 사회 규범이며, 공의의 경우 법입니다. 

 

이런 정의의 기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정의의 주체와 사회의 종류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정 사회에서는 그런 기준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할 것입니다.  왕정이나 귀족정 사회에서는 그게 사회 엘리트의 뜻에 바탕을 둡니다.  민주 사회에서는 그런 기준이 국민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모든 정의 기준이 이렇게 일대일 대응하듯이 근거를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민주 사회의 사회 규범이나 형법,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개인의 능력이 하나님한테서 유래한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또 법의 근거는 국민의 합의이겠지만 규범의 근거는 전통적인 사회 엘리트들의 영향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의를 어떻게 실천할까?

 

그렇습니다.  정의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생각하거나 '정의롭게' 행동하는 게 바로 정의의 실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실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의롭게 생각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게 바로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정의/공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나 의/정의/공의의 근거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한 것일 테니까요.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필요한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마음입니다.  앞에서 의는 정의와 공의의 바탕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맹자님에 따르면 의의 핵심은 수오지심입니다.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사람의 마음은 그게 세 가지 기능을 갖습니다.  그것은 느낌과 생각과 뜻입니다.  흔히 지정의(知情意)라고 말하곤 하지만 저는 그걸 의정지(意情志)라고 바꿔 부르곤 합니다.  이 세 한자는 모두 "뜻"이라는 새김을 갖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뜻 의(意), 뜻 정(情), 뜻 지(志)입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천착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한국말 '뜻'은 사람 마음의 기능을 가리키거나 그런 기능을 통해 나타난 결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수오지'심'은 의정지를 모두 동원합니다.  옳거나 그른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뜻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수오지심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의가 가능하지 않으면 정의나 공의도 난망입니다.  그래서 수오지심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주체적인 조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기준'입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느끼고 알고 뜻하기 위해서는 그런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공의의 경우에 그 기준은 법입니다.  정의의 경우에는 기준이 사회 규범이지요.  법과 규범을 알아야 하고, 그게 중요하다고 느껴야 하고, 그걸 지키겠다고 뜻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의의 경우에는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하기가 어렵습니다.  맹자님의 경우나 후대의 성리학자들의 경우에는 그게 인성(人性)이겠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天)로부터 부여받게 되는 성(性)이 바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그런 판단의 기준까지도 내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그게 하나님의 형상일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고 그리스도교는 가르칩니다.  그 형상은 외모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 방식도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누구나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마음과 함께 의/불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겠습니다.

 

불교의 경우에는 제가 워낙 무지해서 이렇다 하게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누구나 부처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는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바로 그런 마음을 사용함으로써 유교인들이 성(性)을 활용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형상을 이용하듯이, 의/정의/공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세 번째의 조건은 상황 파악입니다.  수오지심과 하나님의 형상과 부처님의 마음이 정의 판단/실천의 주체이고, 법이나 규범이 정의 판단/실천의 기준이라면, 상황 파악은 그런 기준을 적용할 대상입니다.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그런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그 두 도시를 박살내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렇게 다급하게 하나님과 공의/공평성 논쟁을 벌인 것이겠지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였던 롯과 그의 가족들은 상황의 다급성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떠나기를 거부하기도 하고, 떠날 시기를 미루기도 하고, 떠난 후에도 뒤를 돌아보기도 한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설령 롯이 의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의인으로서 가진 마음과 기준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  의/정의/공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저는 롯이 의인이었다는 게 그다지 믿어지지 않기는 합니다.  그는 의인 아브라함의 조카였다는 인척관계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내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온 뒤에 보인 롯과 그 두 딸의 행태를 보아도 그들이 의인이었다고 믿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주체와 기준과 상황이 다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정작 정의를 실천하는 데에는 또 한가지의 장애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에 신사에 참배했던 종교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유생이든 불교도이든 그리스도교인이든 거의 모든 종교인과 그 지도자들이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의인도 아니었고 정의나 공의를 행동에 옮길 능력이 없어서 그랬다면 그냥 그랬나 보다 하면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개인적으로는 의인이고 정의를 실천할 주체적, 상황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데다가 정의를 판단/실천할 기준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사 참배를 결정하고 감행했습니다.  심지어 훗날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와 신학교를 보호할 수 있는 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그런 주장은 그저 불의를 감추기 위한 변명거리로만 들립니다.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드나들었던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지요.  "어쩔 수 없었다"며 고개를 숙이던 분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전두환을 "구국의 영도자"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 그의 건강과 영도력을 진심으로 기원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게다가 각 종교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정의 판단의 주체적 조건과 기준과 상황판단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방법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방법은 그저 이론적으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연습을 통해서 몸에 배도록 습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정의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실체'가 아니라 의로의 힘/능력을 갖춘 주체가 정의 판단의 기준을 익히고 그것을 상황에 적용해 가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연습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의 실천 연습

 

"의와 공도를 실천해내는 일은 ... 수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번 '정의 이야기'는 바로 위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청랑 목사님의 첫 글에서 비롯됐습니다.  이게 논의의 시작이었지만 사실은 결론이기도 하다고 저는 봅니다.  아무리 정의 판단과 실천을 위한 주체적 조건과 기준, 그리고 상황 파악이 잘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게 몸과 마음에 배지 않으면 열매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일상 속의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의/정의/공의를 실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정의 실천 연습은 청랑 목사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해 나가는 일에서부터 적용되겠지요.  아무리 작은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에라도 "공정하고자 하는 긴장을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하고 "편견이나 편애가 작용하지 않도록 하면서, 상황과 자녀들의 각자의 은사와 형편에 맞게 판단하고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정의 실천 연습은 황봉구 선생님의 말씀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유교문화에서의 出仕, 불교에서 小乘을 넘어선 大乘 등" 사회 속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상황마다 "배우고 질문을 하고 또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모두 혼자만의 무엇을 위함이 아닌 즉 결국 실천과 행동을 위함"이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런 정의 실천 연습이 쌓이고 쌓이면 습관이 될 것입니다.  그런 연습이 개인의 습관이 되면 의인으로의 길은 훨씬 쉬워지겠지요.  또 그런 연습이 사회의 습관이 되면 정의와 공의의 수준도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통해서나마 이런 '정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어찌 보면 '정의 실천 연습'의 일환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평미레/
조정희 드림.


 
출처 : 블로그 > 평미레 | 글쓴이 : 평미레 [원문보기]